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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원로들의 노력이 프로야구 탄생을 가능하게 했다

기사입력 2009.01.28 19:21 / 기사수정 2009.01.28 19:21

유진 기자

[엑스포츠뉴스=유진 기자] 카(E.H.Carr)는 그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했다.

이는 곧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사자성어의 뜻과도 일맥상통한다. 옛것을 바탕으로 새것을 안다 함은 역사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한다. 그래서 국사를 배운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뿌리를 배움으로써 '미래'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 될 일이다.

이는 프로스포츠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여진다. 질레트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야구를 소개한 이래로 '홈런왕' 이영민의 배출, 고교야구의 활성화, 프로야구의 탄생, 프로야구의 중흥, 외국인 선수 제도 도입,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4강, 올림픽 금메달과 500만 관중 돌파 등은 대한민국 야구역사의 일부로써 마땅히 후배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재산이다.

따라서 단순히 야구장을 찾아 프로야구를 즐기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적어도 야구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나라 프로야구의 뿌리를 먼저 파악함으로써 야구 원로들의 노고를 돌아보고, 아울러 우리나라 프로야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되짚어 보아야 한다.

야구원로들의 ‘기발한’ 발상이 프로야구 출범을 이끌어

그 전에 프로스포츠(축구를 포함) 탄생에 대한 양분된 시각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우선 프로스포츠가 제5공화국의 3S(스포츠, 영화, 성문화) 정책의 하나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이는 당시 국민에게 집중된 정치 분야 관심을 조금이라도 다른 곳으로 끌어보기 위한 시각이 존재한다. 그리고 프로스포츠 출범의 필요성에 의해 탄생되었다는 ‘필연성’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이는 당시 고교야구 등 아마야구의 활성화가 프로스포츠의 탄생으로 이어졌음을 주요 골자로 한다. 딱히 '어느 시각이 맞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프로스포츠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1970년대 초부터 거론되고 있었다.

왜냐하면, 재미교포 홍윤희씨가 짜놓은 프로야구 기초 자료가 이미 1970년대 초에 존재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를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 당시 KBS 해설위원 이호헌씨였다. 따라서 이상주 당시 청와대 수석비서관이 ‘프로스포츠’에 대한 의견을 구하고자 박영길(당시 실업야구 롯데 감독)씨를 초청했을 때 박영길 감독은 프로야구에 대한 필요성을 피력하면서 ‘프로야구 기초 자료’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이호헌씨를 추천한 것이었다.

오래전부터 거론되어 왔던 이야기였지만, 야구의 프로화에 대한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나왔던 것은 공교롭게도 5공화국 때였던 것이다. 그리고 박영길 감독은 이호헌씨와 더불어서 이용일씨(초대 KBO 사무총장)도 추천하여 프로야구 탄생에 대한 토론을 이어갔다.

그렇다면, 야구가 축구를 제치고 먼저 프로화를 선언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역시 가장 민감한 문제는 돈이었다. 축구협회가 139억의 보조를 요청했지만, 이용일/이호헌씨는 "정부 보조 한 푼 없이 프로야구를 출범시킬 수 있다"는 보고를 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발상'이 야구의 프로화를 촉진시켰고, 결국 18쪽 분량에 해당하는 '한국프로야구창립계획서'는 대통령의 결제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프로야구 출범과 관련하여 참여 기업들을 보고 난 이후 "MBC는 참여하지 않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나 이상주 당시 수석비서관은 방송사가 참여해야 야구 붐이 일어날 수 있고, 야구 붐이 일어난 이후에 MBC가 손을 떼어도 늦지 않다고 설득했다. 전 대통령이 프로야구에 대한 의견을 피력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야구냐 축구냐를 두고 노심초사했던 이호헌/이용일 두 원로는 대통령의 결제가 끝이 나자 비로소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그러나 창단 기업을 물색하는 데에도 상당한 진통이 따랐다. 두 원로가 전국 각지를 돌며, 또는 각 기업을 돌아다니며 발품을 팔았지만, 정작 적극적으로 하겠다고 나서는 구단들이 드물었던 것이다.

이때 보이지 않는 도움을 주었던 또 다른 야구 원로가 바로 당시 MBC 사장이었던 이진희 씨였다. 맨 처음 창단 의사를 표했던 MBC, 롯데, 삼성을 포함하여 해태, OB, 삼미 등의 회사가 뒤늦게라도 참가 의사를 보였던 것도 단연 세 원로의 공이 컸던 셈이다.

이해관계가 얽혔던 창단 초기의 산고가 심해

그러나 연고지 문제와 관련하여 OB가 자신들의 연고와는 전혀 상관없는 대전으로 출발한 것에 난색을 표했다. 그래서 프로 창단 3년 후에 서울 입성을 허락하는 조건으로 참가의사를 밝혔지만, 사실상의 구단주였던 이진희 MBC 사장이 '절대 불허'를 외쳤던 것이다. 또한, 이진희 사장은 본인이 총재까지 겸하겠다는 열정까지 지니고 있었다.

이에 더 애가 탄 것은 이호헌/이용일 두 원로였다. 이진희 사장에게 '프로창단 백지화'까지 될 수 있다며 그를 설득했지만, 서울을 둘로 양분할 수 없다는 이진희 사장의 입장은 단호했다. 그러했던 이진희 사장의 마음을 돌려놓은 것이 바로 이학봉 당시 민정수석비서관이었다. 5공화국의 실세였던 이학봉 비서관의 말을 거절할 입장이 되지 못했던 이진희 사장은 그제야 OB의 '창단 3년 후 서울 입성'에 동의해야 했다.

이렇게 서로 이해관계가 얽혔던 6개의 프로야구단은 1981년 12월 11일, 창립총회를 개최하면서 본격적인 레이스를 시작했다. 실로 오랜 산고 끝에 본 결실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이용일씨는 KBO 초대 사무총장에, 이호헌씨는 초대 사무차장에 임명되어 프로야구 활성화에 큰 공을 세우게 된다.

결론적으로 세 원로(이용일, 이호헌, 이진희)의 노력과 이상주 당시 청와대 수석비서관의 행정적인 지원이 바탕이 되었기에 프로야구가 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물론 프로야구에 뛰어들겠다고 자원을 했던 당시 6개 구단의 사장단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렇게 산고가 심했던 1982년 초기 프로야구는 개막전 이종도 선수(당시 MBC 청룡)의 속 시원한 만루 홈런으로 시작하여 한국시리즈 김유동 선수(당시 OB 베어스)의 깨끗한 만루홈런으로 끝나 그 아픔을 치유할 수 있었다(공교롭게도 당시 두 만루 홈런을 허용했던 선수가 삼성 라이온스의 이선희 투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단계 성장한 한국 프로야구는 세계를 두 번이나 깜짝 놀라게 하며 지금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야구 원로들의 피와 땀, 지식인들의 바탕이 없었다면 ‘프로스포츠’는 그 빛을 빨리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야구 원로들을 대접하는 풍토가 제대로 조성되지 않은 것 같아 내심 안타깝다. 새롭게 탄생하게 될 KBO 총재나 대한야구협회장이 이러한 부분을 염두에 두기를 기원한다.

[사진(C) = 한국 야구 위원회(KBO) 공식 홈페이지]



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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