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9.01.22 10:51 / 기사수정 2009.01.22 10:51
[엑스포츠뉴스=유진 기자] 은퇴 이후의 김소식 : 나는야 셀러리맨
Q : 은퇴 후 야구인으로써는 드물게 많은 분야를 섭렵하셨습니다(경남은행, 조광무역 등). 이렇게 왕성한 활동을 펼치시게 된 계기가 있으시다면요?
김소식(이하 ‘김’으로 표기) : 제가 은퇴 후 실무에 들어간 후 첫 해 1/4분기 은행장 표창을 받았습니다. 여기에서 다시 대리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시험을 봐야 했는데, 총 6과목이었습니다. 그런데 6과목 중에서 은행장 표창을 받은 사원은 두 과목을 면제시켜 주었습니다. 즉, 저는 4과목만 시험 봐서 합격하면 대리가 될 수 있었죠.
그래서 세 과목 먼저 시험을 봤는데, 결과는 모두 합격이었습니다. 이제 한 과목만 남아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과목 남겨 둔 상황에서 제가 경남은행으로 이직을 했습니다. 이유는 당시 경남은행 신경성 차장님께서 ‘같이 일해보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딱 2년만 일하겠다’라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실제로 저는 그 해 9월에 이직하여 2년 후 8월에 그만두었습니다. 딱 2년만 일한 셈이죠.
경남은행에서 근무한 이후 1976년에 부산을 근거지로 한 국제그룹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 제의에 응했죠. 이에 저는 국제그룹 계열사인 ‘조광무역’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당시 조광무역은 미화 3천만 달러에 해당하는 의류를 수출하는, 대규모 회사였습니다. 그렇게 조광무역에서 근무하다가 이후 옥천에 있는 ‘국제종합기계(농기계 전문 메이커 회사)’로 다시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조광무역 넷째 사위가 전무로 앉아 있었는데, 소위 저와는 ‘같은 라인’에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제가 카메라에 취미가 있어 사진도 많이 찍고 다녔는데, 그분 역시 같은 취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두터운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이분이 ‘국제종합기계’의 대표를 겸직하게 되신 겁니다. 그래서 이분이 저보고 “나를 좀 도와 달라. 그곳을 지켜 줄 사람이 당신밖에 없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이 때문에 제가 옥천으로 적을 옮기게 되었고, 당시 ‘자재차장’을 맡아 새로운 업무에 열중하게 됐습니다. 이후에는 자재부장을 맡으면서 총무, 노무, 관리를 총괄하게 되었습니다. 꽤 비중 있는 자리에 앉게 된 셈이었죠.
▲ 김소식 위원은 ‘셀러리맨’ 시절 이야기를 비교적 자세히 언급했다.
Q : 이후의 사회생활에 대해서도 조금 더 이야기 해 주십시오.
김 : 자재부장을 맡은 이후 회사에서 사고가 터진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옥천이 작은 도시였기 때문에 사고가 발생하면 금방 지역 언론에도 공고되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언론 보도만큼은 막아야겠다는 생각에 지역 신문사를 포함하여 연합뉴스 담당자까지 만난 일도 있었습니다. 당시 제가 했던 이야기는 똑같았습니다. “집에서는 자녀들이 나를 최고의 아버지로 알고, 아내가 나를 최고의 남편으로 알고 있는데, 이 보도가 나가게 되면 어떻게 되겠느냐? 내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죄 없는 내 가족들은 무슨 죄가 있겠느냐? 한 번만 도와 달라. 하지만, 당신이 나를 도와준다고 해도 내가 당장 당신에게 은혜를 갚을 여력은 없다. 그러나 도와달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다행히 당시 회사에서 발생했던 사고에 대해서는 언론 보도 없이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
비록 제가 직접 벌인 일은 아니었지만, 부하직원 관리를 제대로 못한 제 책임이 분명 컸습니다. 그래서 사고 수습 이후 스스로 감봉을 하고, 사표를 냈습니다. 그런데 기술이사를 포함하여 총무이사가 사표제출을 막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저의 지인들이 대부분 부산고교 선/후배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대전 세관장께서는 저의 부산고교 10년 선배셨거든요. 무역을 하는 회사 입장에서 세관장과의 관계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죠. 그래서 두 분께서 ‘너 아니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매일 저를 찾아오시더군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부장대우로 승진을 시켜줄 테니, 사표 제출은 없던 일로 하자’고 하셨습니다. 결국, 그 해 7월 말까지만 다니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해당 날짜가 되자 미련없이 사표를 내고 회사를 나왔습니다.
Q : 퇴사 이후 다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김 : 사표 낸 다음에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상경 이후 ‘어린이 야구 교실’을 하면서 운동화 전문 브랜드인 나이키 대리점을 오픈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구두보다 비싼 운동화가 등장했던 시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기려고 할 무렵, 국제상사에서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이유인즉슨 자신들이 ‘프로스펙스’ 브랜드를 출시하려고 하는데, 스포츠에 일가견이 있고 영업실적도 우수한 사원을 찾다 보니 이에 맞는 사람이 국제그룹의 김소식밖에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그러나 당시에는 퇴사 상황).
하지만, 처음에는 고사의 뜻을 표하다가 나중에는 수락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프로스펙스’ 영업차장으로 국제그룹에 복귀했습니다. 이때부터 외국브랜드 나이키와 경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해외 브랜드인 나이키는 대체로 서양 사람들 발에 맞춰 운동화가 나왔습니다. 저를 비롯한 당시 독고중훈 이사님(前 TBC 드라마 PD 출신으로 김소식과 마찬가지로 국제그룹에 스카우트 되어 온 인재)은 이 점에 착안했습니다. 솔직히 저보다는 독고중훈 선배님의 공이 더 컸지요(웃음). 동/서양 사람들의 발 구조가 엄연히 다르다는 점과 '한국의 상표 프로스펙스'라는 문구로 애국심에 호소한 마케팅을 했습니다.
이는 1984년 LA 올림픽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당시 영업부에서 올림픽 경기가 열리는 동안 프로스펙스 깃발을 흔들었는데, 이 또한 앞서 말씀드린 독고중훈 당시 이사님의 생각이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다른 회사들도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깃발을 만들어 흔들더군요. 모두 홍보 차원이라고는 했지만, 결국 이러한 행동은 곧 제지당했습니다(웃음). 어쨌든 이때를 계기로 프로스펙스가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광고비 부족으로 간접광고를 많이 했습니다. 복싱계와 인연이 되어 장정구 등 당시 복서들에게 프로스펙스 운동화를 제공했고, 복싱경기장 링 바닥과 기둥에 프로스펙스 마크를 붙여 놓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매스컴으로 복싱 경기가 방송되면 자연스럽게 프로스펙스 마크가 노출된다는 점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었죠.
Q : 국제그룹으로 복귀하시면서 생긴 에피소드는 없으셨습니까?
김 : 서울에서 데이비드컵 지역예선이 열렸는데, TV중계를 한다는 정보를 알아내고 전영대, 유진선, 김봉수 등 대표선수들에게 프로스펙스 신발을 신겼어요. 그런데 프로스펙스 신발이 잘 미끌어 진다고 하는 거예요. 하지만, 끝까지 신발을 신겼죠. 그런데 한 선수는 끝까지 나이키를 고집하더군요. 결국, 호텔 마스터키를 이용해서 그 선수 방으로 들어가서 나이키 신발의 상표만 우리 것으로 바꿔 신겼지요. 나중에 그 선수가 그 사실을 알고 나서 짜증을 냈는데, 제가 정색을 하면서 이야기를 했어요. “너는 대표팀이라는 녀석이 우리나라 물건 사용하자는 진심도 모르냐?”라고요. 어쨌든 그 일을 계기로 ‘프로스펙스’ 홍보에 대성공을 거뒀는데 그만 나중에 들통이 났어요. 누군가가 나이키 상표가 떼어진 흔적이 있는 신발을 가져가 버린 것이죠. 그래서 이번에도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최소화시키기 위해서 아는 기자들에게 신신당부를 하느라 여기저기 뛰어다녔습니다.
Q : 프로야구 출범에 대하여 김소식 위원님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야사가 있다면 간단하게 들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김 : (고개를 가로 저으며) 없었습니다. 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도에 저는 영업 일선에 뛰어들었던 시기였지요. 하지만 프로야구 출범에 대해 한 말씀만 드리자면 이용일, 이호헌 두 원로분과 박영길 전 롯데감독께서 큰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정리 = 엑스포츠뉴스 유진 기자]
- 3부(김소식, 한국야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말하다)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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