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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P] '야구, 잠실 그리고 한일전'…뜨거웠던 1997년의 추억

기사입력 2013.05.15 13:47 / 기사수정 2013.05.18 11:21

서영원 기자


[엑스포츠뉴스=서영원 기자] 1997년은 스포츠 팬에게 잊지 못할 해다. IMF 사태로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나라 전체가 큰 위기였다. 스포츠가 국민들의 유일한 위안이자 희망이었다. 해외에서는 LA 다저스의 박찬호가 승전보를 전해왔고 골프의 박세리는 LPGA(미여자프로골프) 무대에 데뷔했다. 국내 스포츠도 마찬가지였다. 그 즈음 아시아를 호령했던 축구대표팀의 선전과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우승이 무르익고 있었다.

1997년 야구·축구 한일전 열린 잠실

그 해 11월 1일 잠실벌은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는 1998 프랑스월드컵 본선 진출이 확정된 한국축구대표팀이 일전을 준비 중이었다. 상대는 본선행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던 일본이었다. 일본은 한국을 반드시 잡아야만 플레이오프를 통해 프랑스행 가능성을 살릴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한국은 기존에 중용하지 않던 일부 선수를 포함한 엔트리를 발표했다. 한국의 '도쿄대첩'으로 자존심까지 구긴 일본은 나카타 히데토시, 미우라 카즈요시 등 당대 최고의 스타플레이어를 포함한 풀 전력이 예상됐다. 일본 응원단 '울트라 니폰(현 울트라스)'이 8천명 이상 방한했다. 경기 티켓은 발매한지 10분만에 매진돼 8만 5천여명의 관중이 잠실벌로 모여들었다. 

야구 한일전도 관심을 끌었다. 1997 한일프로야구골든시리즈로 불린 이 대회는 해태 타이거즈 중심의 선발팀과 LG 트윈스-현대 유니콘스의 혼합팀이 구성됐다. 일본은 오릭스 블루웨이브(현 오릭스 버팔로스)와 주니치 드래곤즈 혼합팀으로 선수단을 꾸렸다. 특히 일본선발에는 '나고야의 태양' 선동열이 포함돼 야구 팬들의 큰 관심을 모았다.

1차전은 LG-현대 연합팀이, 2차전은 해태 선발팀이 나서게 됐다. 당시 선동열은 공식 기자회견에서 축구, 야구 한일전에 대한 질문에 “야구는 지더라도 축구는 이겨야한다”라며 축구대표팀을 응원했다. 일본의 다구치 소는 “야구는 이벤트 경기지만 축구는 운명이 걸렸다”며 역시 일본축구대표팀을 응원했다. 두 나라 미디어에선 20세기 마지막 최대 한일전이라며 분위기를 돋웠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잠실주경기장과 잠실야구장에는 7천여명의 경찰기동대가 배치됐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억된 야구-축구 동시 한일전은 축구장에 8만5천여명이 모였고 야구장에 2만2천여명이 몰렸다.

축구장에서는?…두 차례의 긴 침묵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리자 마자 일본이 기세를 올렸다. 일본은 왼쪽 사이드백 소마의 낮은 크로스를 나나미 히로시가 침착하게 골로 연결시켰다. 경기 초반 실점에 한국은 당황했고 이후 타이트한 수비로 맞대응했다. 그러나 일본 허리진의 나나미-나카타 히데토시-기타자와 쓰요시의 플레이는 정교했고 단단했다.

한국은 고정운, 서정원이 포진했던 측면과 윙백 이기형의 오버랩에 이은, 최전방의 최용수에게 볼을 몰아주는 전략을 택했으나 중앙이 잠식되다 보니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일본의 측면공격을 막기 급급했고 전반 37분 또 다시 로페즈에게 추가골을 헌납했다. 한국은 공중볼을 경합하던 최용수가 코뼈 부상을 당하는 악재까지 겹쳤다.


현재 중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는 오카다 다케시 당시 일본대표팀 감독은 “2골차 리드도 불안했다 계속 공격해야만 했다”라며 당시 경기에 전력을 다했다고 고백했다. 한국대표팀의 차범근 감독은 “송구스럽다. 일본이 한국보다 잘 했다. 월드컵 본선 대비를 잘 하겠다”라고 경기 소감을 밝혔다. 


 
야구장에서는?… 엎치락 뒤치락 승부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1차전에서 한국은 LG-현대 연합팀을 내세웠다. 한국 선발은 현대의 정명원. 반면 일본은 호시노 마키노를 선발투수로 올렸다. 다구치가 정명원을 상대로 1회 첫 안타를 뽑았고 4번타자 야마사키 다케시가 2루타를 터트리며 일본이 선제점을 냈다. 이어 오가와의 3루 땅볼 때 현대 권준헌의 실책이 나오면서 한 점을 더 내줬다.

2회 한국의 반격이 시작됐다. LG 김동수의 홈런과 현대 이숭용의 안타, LG 신국환의 희생타로 따라붙기 시작했다. 일본의 실책까지 곁들이며 한국이 3-2 역전에 성공했다. 그러나 5회 현대 최창호가 다구치에게 홈런을 허용했고 6회에는 LG 김용수를 상대로 마스다가 적시타를 때려내 한국은 3-4로 다시 리드를 빼앗겼다. 

6회 한국은 LG 서용빈과 송구홍의 땅볼과 희생타에 힘입어 5-4로 재역전에 성공했다. 그러나 8회 한국은 추가실점을 내주며 끝내 1차전 승리를 일본에게 넘겨줘야 했다. 국내 팬들은 결과에 상관없이 LG-현대 투수들이 한 팀에서 뛰는 것을 보며 기뻐했다. 정명원을 시작으로, 차명석, 최창호, 김용수, 조웅천, 이상훈 등이 이어던진 한국 마운드는 일종의 팬서비스와 다름없었다. 

일본은 스즈키 이치로가 1회 수비 종료 후 허리통증을 호소하며 교체됐고 곧바로 귀국길에 올랐다. 또 일본선발팀의 선동열은 이날 불펜피칭만 했다. 다음날 열린 2차전은 선동열과 이종범의 맞대결로 큰 관심을 모았지만 이번에도 한국은 승리하지 못했다. 그러나 호시노 센이치 일본 감독은 “한국과 일본의 격차가 크지 않다"고 말해 한국야구의 발전을 인정했다.

 야구·축구 동시 한일전, 그 이후

축구대표팀은 1998년 프랑스월드컵 E조에 편성돼 네덜란드, 벨기에, 멕시코를 상대로 1무 2패(2득점 11실점)의 성적을 남기고 조별리그 탈락의 쓴잔을 마셨다. 그러나 서정원과 이상윤은 각각 프랑스리그 스트라스부르, 로리앙에 진출했다. 또한 월드컵 본선 무대서 이동국과 고종수가 깜짝 등장하며 2002년 한일월드컵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기도 했다.

야구선발팀은 이후 이종범, 이상훈이 일본프로야구 주니치에 진출하며 나고야 삼총사 시대를 열었다. 해태는 모기업의 재정난으로 KIA 타이거즈로 탈바꿈했고 현대는 이후 10여년 동안 지속됐으나 히어로즈로 변경됐다. 당시 멤버 가운데 일부는 현재 감독, 코치 등으로 활발한 지도자 생활을 보내고 있다.

1997년 당시 '열정의 장'이었던 잠실은 지금도 프로야구 LG와 두산 베어스의 공동 홈구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축구 한일전이 열렸던 잠실주경기장은 이후 세계 최강이었던 브라질전 승리 등으로 화려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하지만 2002년 한일월드컵 축구전용구장이 대거 신설되면서 잠실주경기장은 상대적으로 홀대를 받았다. 

그런데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잠실주경기장에서 오랜만에 축구 A매치가 열린다. 다가오는 7월 동아시아축구대회 잠실 개최가 확정됐으며 상대는 '영원한 라이벌' 일본이다.

서영원 기자 sports@xportsnews.com

[사진=축구대표팀 ⓒ 엑스포츠뉴스DB]

서영원 기자 schneider190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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