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11-23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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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엽의 격투사담] 인생(人生), 파이터(鬪事), 고난(苦難)

기사입력 2008.12.09 16:26 / 기사수정 2008.12.09 16:26

남기엽 기자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관중 속에서 온갖 영욕이 활개치는 전장. 이 속에서는 그 누구라도 혼자일 수 밖에 없다.

 '인생이란 어찌되든 좋은 것이다'라고 그 누가 말했던가. 필자는 이 명제에 동의할 수 없다. 그 말을 한 사람이 대문호 괴테의 말이라도 말이다. 차라리 '인생은 고(苦)'라고 설파한 철학자 쇼펜하우어에게 지지를 보내겠다.

누구에게나 시련은 있다. 그것은 실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절대적인 명제이다.국정을 총괄하는 행정부의 수장이든, 경제를 주무르는 전자기업의 대주주이든, 하루하루 벌어먹고 사는 소시민이든, 시련의 성격은 다르더라도 본질은 같다.

그리고 이러한 본질은 파이터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연히 필자도 마찬가지다.

한 명의 위대한 파이터 뒤에는 그와 같이 되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는 수많은 이들의 희생이 필요하다.

내가 공부를 하면서 크고 작은 어려움을 느끼며 담배 한 개비와 함께 도서관 앞에서 시련을 느낀다면, 파이터들은 그들의 전장에서 턱까지 차오르는 숨과 함께 육체 피학적 절정을 맛보는 시련을 느낄 것이다.

그 시련을 딛고 밟고 이기고 올라온 이들이 오늘날 우리가 이름을 아는 '파이터'들이다. 물론 아직도 영광을 위해 지하 어느 체육관 구석에 틀어박혀 샌드백을 두들기는 이들도 전 세계에 넘쳐 흐른다.

대개의 일반적인 사람들은 시련 즉, 고난(苦難)을 본질로 한 시련을 겪지만 이들이 육체적으로 고난을 겪는 경우는 사실상 없다. 가령 자신이 좋아하는 축구를 신나게 하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경우가 있다고 해서 그게 고난이 될 수는 없다.  그곳에서 당신은 쉬고 싶을 때 얼마든지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기 축구회 시합을 포기했을 때 돌아오는 대가는 동료 돌의 질책 외에는 없다.

파이터의 포기는 그의 위치,경제력 그리고 무엇보다 팬들의 성원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파이터들은 이런 의미에서 우리와는 정 반대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같은 육체적인 고난을 겪은 구기 종목의 선수들보다도 어떻게 보면 더욱 극점에 서 있다. 당장 힘들고 지치고 속된말로 그냥 엎어져서 쉬고 싶을 경우가 한둘이 아닐 것이다. 당장 앞에는 무식한 주먹을 가진 한 놈이 나를 공격하려 벼르고 있고 사회도 아닌 사각(死閣)의 링 혹은 팔각(捌却)의 옥타곤은 얻어터지기 전까지는 공격을 말려주지 않는다.

강한 친구와 형이 있더라도 믿을 건 자기 자신 뿐이다.

맞고 있다고 해서 경찰도 부를 수 없다. 그곳에서는 오직 믿을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곳에는 자신의 친인척 친구들, 훈련 파트너들이 모두 곁에 있지만 역설적으로 아무도 자신이 위기에 있을 때 도와주지 않는다. 그저 심하게 공격당할 때 말려주는 존 맥커시라는 산적 같은 심판이 있을지는 몰라도 말이다.

"눈 앞에 있으면 그 사람과 가까워지고 눈 밖에 있으면 그 사람과 멀어진다고?(Out of sight, Out of Mind?) 젠장할, 멀어져도 좋으니 누가 내 앞에 있는 이 무식한 놈 좀 어떻게 해 봐!"라고 아무리 외쳐본들 팬들의 야유와 경멸 외에 돌아오는 답은 없다. 앞에 놈도 이기기 힘든데 자신까지 이겨야 하는 이 험난한 과정은

역시나 '파이터'라는 일도 세상 어느 일 못지 않게 힘들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아니 훨씬 많이.

'누가 이 미친 인간좀 막아줘!'라고 마음 속으로 소리쳐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그 말이 입밖으로 나오면 누군가 도와주긴 하겠지만 그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파이터를 좋아하나 보다. 정신적으로 힘들 때는 육체적으로 벅찬 고통을 맛보자. 어디가서 스트리트 파이팅이나 하며 사고 치라는 말이 아니다. 운동을 전혀 안 해 본 사람은 도장부터 가서 줄넘기 10분 만 해도 뭐가 육체적 고통이니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육체적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즐거움인지 느껴보자.

물론 당신이 하는 일도, 겪는 시련도 파이터들 못지않게 힘든 일임을 안다.

상사 앞에 작아지고 가족을 위해 애써 눈물을 닦아가며 꿋꿋이 다니는 이 시대의 아버지들의 고난이 결코 가볍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사람들이 쉽게 겪기 힘든 육체적 고난과 함께 상대를 눕히지 않으면 내가 당하는 살벌하고 압축된 전장 속에서 매일 보내야 하는 파이터들에게 열광하는 이유와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걸 안다면, 조금만 더 그들을 존중하고 박수를 보내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투혼을 보고 우리네들 삶에 좋은 청량제를 넣어줄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다.



 PRIDE 미들급 신데렐라의 탄생도 바로 샌드백을 친 미숙한 한 주먹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행동의 씨앗을 뿌리면 습관의 열매가 열리고, 습관의 씨앗을 뿌리면 성격의 열매가 열리고, 성격의 씨앗을 뿌리면 운명의 열매가 열린다."고 야망에 가득 차 그것을 실현한 정복자 나폴레옹이 말했듯이 이제껏 가꿔온 것이 없는 사람은 뭐라도 자신이 목표로 한 행동의 씨앗을 뿌려보자. 복싱의 챔피언 벨트도, K-1의 왕관도, 모두 처음 글러브를 끼고 설레는 마음에 샌드백을 친 바로 그 주먹에서 나왔다.

오늘 내가 뿌리는 이 씨앗도 비록 처음엔 고난(苦難)의 땅에 뿌렸지만 인생(人生)이라는 텃밭에서 치열한 경쟁(鬪事)끝에 화려한 열매를 맺을 일이다.



남기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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