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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최초 '40S' 화려한 컴백

기사입력 2006.03.10 12:20 / 기사수정 2006.03.10 12:20

윤욱재 기자
[프로야구 25년 특별기획 - 나의 몬스터시즌 12] 1994년 정명원


▲ 코치로 활약중인 정명원 선수 ⓒ 현대유니콘스

“재활은 끝났다” 전문 마무리 새 출발


태평양 돌핀스의 암흑기는 계속됐다. 1989시즌, 일약 돌풍을 일으키며 인천팀 역사상 처음으로 포스트시즌 무대에 섰던 태평양은 이후 다시 침체에 빠지며 예전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김성근 감독과 프런트는 마찰을 일으켰고 후임 박영길 감독은 기대보다 더 큰 실망을 안기며 팀을 떠났다. 다음으로 정동진 감독이 팀을 맡았지만 크게 달라지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사실 주력 선수들의 부상으로 인한 전력 이탈도 큰 악재였다. 당시 태평양 투수진을 이끄는 선수들은 모두 ‘부재중’이었다. 정명원, 박정현, 정민태, 김홍집 등 없어선 안 될 투수들이 도미노처럼 부상 악령에 시달리니 태평양으로선 방법이 없었다. 특히 정명원은 92시즌에 당한 팔꿈치 부상으로 2년간 고생할 만큼 말끔하게 치유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줬다.


이 때 정동진 감독은 부상에 시달리는 선수들은 과감히 전력에서 배제시켜 원활한 재활을 도왔다. 이 결정 하나가 94시즌의 판도를 모조리 바꿔놓을 줄이야. 정 감독은 ‘기다림의 미학’이 어떤 것인지 몸소 보여주며 부상 선수는 일차적으로 관리 대상임을 상기시켰다.


한편 정 감독은 팔꿈치 부상에서 벗어난 정명원을 선발투수로 많은 이닝을 소화하기 힘들다고 판단, 마무리투수로 전격 발탁했다. 사실 정명원에게 마무리는 낯선 보직은 아니었다. 문제는 부상에서 벗어나 예전 같은 위력을 다시 보여주느냐에 달려있었다.


태평양은 주축투수들이 속속 복귀하며 어느 정도 틀이 잡히고 있었다. 마치 퍼즐이 완성되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마무리 정명원’이란 마지막 한 조각이 끼워지면서 ‘투수왕국 퍼즐’은 완성되었고 한국시리즈에 ‘출품’되는 기염을 토했다.


40세이브, 최고 마무리 우뚝


태평양은 시즌 초반부터 줄곧 상위권에 포진하며 상승세를 타더니 좀처럼 2위 자리를 뺏기지 않으며 수성에 성공, 플레이오프 진출 티켓을 따내는 쾌거를 이뤄냈다. 무엇보다 태평양은 ‘야구는 투수놀음’이란 말을 가장 잘 실천했다.


팀 방어율 1위라는 통계가 보여주듯 태평양은 팀 타율 꼴찌를 극복할 수 있는 두터운 마운드가 돋보였다. 부상에서 돌아온 김홍집과 최창호, 정민태는 33승을 합작했고 훌쩍 성장한 안병원은 11승을 거두며 뒤를 받쳤다. 여기에 신인 최상덕이 팀 내 최다승인 13승을 보태며 신인왕급 활약을 펼쳤다. (신인왕을 노려볼만했지만 LG 신인 3인방의 활약이 워낙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이들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준 정명원의 활약이 눈부셨다. ‘포크볼’이란 신무기를 장착한 정명원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당시 포크볼은 희귀종이나 다름없었다. 80년대 후반 최일언 이후 명맥이 잠시 끊긴 상태. 정명원은 미국에서 배워온 포크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움을 갖지 않는 자신감을 얻었다. 마무리투수에게 있어 자신의 공에 대한 자신감은 빠른 공과 통틀어 첫 번째 조건이다.


정명원은 전년도 선동열(해태)이 처음으로 세운 31세이브를 한 단계 뛰어넘어 40세이브를 기록, 이 부문 최다신기록을 수립했다. 정명원의 기록은 여러모로 의미를 둘 수 있다. 먼저 그만큼 태평양의 투수 역할 분담이 확실했다는 증거다. 만약 투수진의 교통정리가 이뤄지지 않았다면 40세이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뒷문 단속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배경 조성을 잘해놨다는 얘기다.


정명원의 활약은 마무리투수란 보직이 전문직으로 정착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당시 셋업맨과 마무리투수의 개념이 따로 잡지 못할 만큼 이겨야하는 경기에선 무조건 투입되는 게 마무리투수였지만 이 때부터 세이브 상황에서 경기 마지막을 책임지는 선수로 바뀌게 된 것이다. 실제로 정명원은 50경기에서 40세이브를 따냈으니 개념 전환의 계기가 되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한편 올스타전에 참가한 정명원은 3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하며 MVP를 거머쥐었고 정규시즌 구원 1위(44세이브포인트)는 물론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까지 휩쓸며 성공적인 부활의 느낌표를 찍었다.


아! 한국시리즈


인천 팬들에겐 감격의 연속이었다. 암흑기를 뚫고 포스트시즌에 당당하게 진출한 태평양이 플레이오프에서 한화를 3연승으로 간단하게 제압하고 한국시리즈에 올라가 우승에 도전한다는 자체가 놀라웠다. 인천에 프랜차이즈를 둔 팀 중 역대 최초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태평양은 프로 출범 후 첫 인천팀 우승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이광환 감독의 자율야구로 무장한 LG. LG는 신인 3인방과 스타시스템을 앞세워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한 강팀이었다. 태평양은 정규시즌 LG전에서 상대전적 5승 13패로 꼬리를 내리며 ‘LG 징크스’를 겪었다. 특히 정명원도 LG전에서 대형 사고를 일으킨 적이 있어 우승의 길은 험난한 수준임을 암시했다.


잠실에서 펼쳐진 1차전에서 선발 김홍집이 13회까지 완투했음에도 불구, 끝내기홈런을 맞아 석패했고 2차전에선 완봉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정명원이 처음 등장한 것은 3차전. 1승이 급했던 태평양은 경기 중반까지 잘 잡아오던 리드가 흔들리자 즉각 정명원을 투입시켰다. 2점차 리드 상황에서 정명원은 7회 김영직에게 적시타를 맞아 1점차로 쫓기고 유지현에게 역시 적시타를 허용, 동점을 내줬다. 이때 좌익수 윤덕규의 홈 송구를 포수 김동기가 뒤로 빠뜨리는 사이 박종호가 홈인했다. 역전을 당하고 만 것이다.


이게 끝이었다. 정명원은 충격 속에 마운드를 내려갔고 태평양은 힘 한번 못쓰고 미끄러졌다. 4차전에서도 석패를 당하며 결국 준우승에 만족해야했다. LG 징크스를 꺾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웠다.


그러나 두 번 다시 시련은 오지 않았다. 정명원은 현대로 바뀐 96년에 다시 한번 한국시리즈에 진출, 4차전에서 노히트노런이란 진기록을 수립했고 98 한국시리즈에선 LG를 꺾고 첫 우승의 감격을 맛봤다.


정명원 (1994) → 4승 2패 40세이브 방어율 1.36



윤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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