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9.03.16 11:20 / 기사수정 2009.03.16 11:20
[엑스포츠뉴스=전성호 기자] 이상과 현실은 수천 년에 걸친 인간사에 있어 언제나 가장 어려운 양재택일의 문제다.
이상을 선택하고자 하면 현실의 어두운 면이 발목을 잡는다. 그러나 현실을 택하기엔 놓치고 싶지 않은 꿈과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때론 홀로, 때론 서로 두 가지 선택 가운데서 번민하고 괴로워한다.
그렇기에 김호곤 울산 현대 감독의 최근 발언에 대해선 동감을 느끼지만, 동시에 안타까움과 재고의 여지를 남기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챔피언스리그 포기?
최근 김 감독은 AFC 챔피언스리그(이하 ACL) 나고야 그램퍼스와의 조별예선 1차전에서 1-3 역전패를 당한 뒤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의 솔직한 심정과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현재 울산의 전력상 ACL과 K-리그를 둘 다 병행하기는 힘들며, 만약 그럴 경우 둘 다 결과 면에서 놓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곧 있을 뉴캐슬 제츠와의 경기에는 2군을 보낼 것이란 말을 했다.
비록 이후 "10일 동안 4경기를 치러야 하는 일정상 어쩔 수 없다."라고 밝히기는 했지만, 울산은 이제 ACL 1라운드를 치렀을 뿐이다. 하지만, 김 감독은 이미 ACL 자체를 포기한 듯한 뉘앙스마저 풍기고 있다. 그는 "ACL 우승팀은 K-리그에서 나올 것이다. 우리도 최선을 다하겠지만, 사실 FC서울에 기대를 건다."라는 말까지 했다. 울산의 팬들은 이 발언을 듣고 어떤 심정이었을까?
울산팬들은 지난가을 팀이 플레이오프를 거쳐 ACL 출전 티켓을 획득했을 때 아시아를 호령할 자신들의 팀을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스토브리그에서 이상호, 박동혁 등 주요 선수들이 팀을 이탈하긴 했으나 한 때 '아시아의 깡패'라는 거친 별명으로까지 불리며 유독 아시아클럽 간의 경기에서 강했던 울산이었기에 이번 대회에도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런 기대를 받는 팀의 수장이 인터뷰 몇 번으로 지지자들의 꿈과 가능성을 무참히 깨뜨린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리그에서 서울이나 수원이 보여준 힘을 울산이 이겨낼 수 있을까? 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김 감독의 최근 발언으로 최소한 ACL에서만큼은 팬들의 울산이 매 경기 최선을 다하고, 지더라도 모든 것을 쏟아내는 경기를 보여줄 것이란 기대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었다.
물론 유망주를 큰 경기에 투입해 경험을 쌓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경기를 포기한 가운데서 일어난다면 문제다. 그렇다면, 울산팬들은 울산 경기를 보러 갈 이유가 없다. 입장권 값어치에 미치지 못하는 5~60% 정도의 전력과 열정으로 경기하는 팀의 경기를 당신은 보러 가고 싶을까?
당신이 어떤 상품을 구입한다고 하자. 그런데 이 제품은 고르기에 따라 어떤 경우에는 100%의 성능일 수도 있지만, 어떨 때는 50%의 성능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신품 가격을 그대로 받는다. 당신이라면 이런 제품을 구입할 생각이, 아니 용기가 날 수 있을까? 프로축구라는 '상품' 역시도 같은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
김 감독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처했던 적이 있던 세뇰 귀네슈 FC서울 감독의 지난날과 최근의 인터뷰를 곱씹을 필요가 있다.
1년 전 서울의 컵대회 포기
귀네슈 감독은 불과 1년 전 같은 과오를 저질렀다. K-리그에서의 첫 시즌에 귀네슈 감독은 모든 대회의 타이틀을 노렸고, 라이벌 수원 삼성을 4-1로 대파하는 등 3월 한 달간 경이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윽고 다른 팀의 집중적인 견제와 선수들의 줄 부상이 이어졌다. 결국, 6강 플레이오프에도 떨어졌다.
그래서 귀네슈 감독 역시 이상보다 현실의 자리로 내려왔었다. 2008시즌을 맞이하면서 정규리그에만 집중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문제는 한 리그컵 홈경기에서 터졌다.
상대팀 제주 유나이티드가 베스트 멤버를 총출동시킨 데 반해 서울은 2군 선수들만으로 경기에 나선 것이다. 박주영, 김은중, 이청용, 기성용 같은 스타플레이어들을 보기 위해 추운 날씨와 주중임에도 불구하고 모인 만 여명을 순식간에 '바보'로 만드는 순간이었다. 분명 그 경기를 앞두고 서울 곳곳에는 서울의 스타플레이어들이 출전할 것이란 뉘앙스의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만약 귀네슈와 서울이 애초부터 리그컵 경기를 '포기'했다면 경기를 앞두고 홈페이지에 '오늘은 2군 선수들만 출전합니다.' 내지는 '리그컵 입장료를 50% 할인해드립니다.' 같은 문구가 있었어야 했다. 아니면 최소한의 언질이라도 있어야 했다. 프로축구 역시 자본주의 체제 속의 한 상품이라면 그게 원리에 맞는 일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일종의 사기극이 되는 것이다.
결국, 경기 후 팬들의 원성은 들끓었고, 이후 서울은 극단적인 2군 선수 출전을 자제했다. 세상 그 어느 축구팬도 똑같은 값을 내고, 똑같은 노력을 들여 홈팀의 성의없는 경기를 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건 프로로서의 자세가 아니다. 과연 울산은 올 시즌 향후 ACL의 티켓 값을 절반만 받을 생각이 있을까?
1년이 지난 뒤 귀네슈 감독은 얼마 전 한 인터뷰를 통해 '세계적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3~4일 간격으로 경기를 치르는 데 익숙해 져야 한다.'라고 달라진 태도를 보였다. 귀네슈 감독의 발언은 무슨 뜻일까.
표면적으로 본다면 짧은 휴식 기간 사이에서도 경기력을 유지할 수 있는 좋은 체력과 기량을 갖춰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더 깊게 들어간다면, 프로선수라면, 그리고 프로팀이라면, 팬들에게 언제나 100% 혹은 그 이상의 기량을 보여줄 마음가짐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왜 FIFA와 각국 프로축구연맹은 A매치와 프로축구리그의 일정을 겹치게 하지 않고, 차출 가능한 시간도 제한적으로 두는 것일까. 그건 바로 프로선수들이 프로리그에서 100%의 기량을 선보일 수 있는 최선의 여건을 만들어주기 위함이다.
A매치를 치른다고 프로리그 경기에 주전들이 다 빠져버리거나, 바로 그저께 A매치를 치르고 와 녹초가 되어 선수가 제대로 경기를 치를 수 없는 프로리그는 제 값어치를 할 수가 없다.
ACL은 엄연히 K-리그의 연장선상에 있는 리그다. 그렇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최선의 노력을 다해 최선의 결과를 얻어야 한다. 만약 선수층이 두텁지 못해 ACL을 제대로 치를 수 없다고 한다면, 아마도 AFC는 대회의 건전성을 위해서라도 내년부터 K-리그에 배정된 ACL 티켓을 2~3장으로 줄일지도 모르겠다. 당장 더블 스쿼드로 ACL을 치를 만한 팀은 K-리그에 서울 말고는 없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괴로워하다 선택한 답안이 김 감독의 발언이었다면, 그건 그렇게 경솔히 밝힐 문제도 아니었다. 현재의 K-리그 시스템은 3위를 하든 6위를 하든 동일선상에서 최종 우승에 도전할 수 있는 체계가 마련되어 있다.
울산으로서는 길어야 5월까지 이어질 ACL 조별예선에서 최선을 다하고, 설사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그 이후 일정부터 리그를 위해 집중해도 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아도 주요 선수의 대거 이탈로 전력이 약해진 울산이 이처럼 ACL에 대해 경솔히 여기고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태도를 보이는 점은 분명 아쉬운 부분이다.
글의 서두에서도 밝혔지만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언제나 힘든 문제다. 그러나 역사를 뒤돌아볼 때 가장 현명했던 이는 성급하지 않고 그 가운데의 중용을 좇았던 이들이었다. 소망한다. 울산이 강한 의지와 열정으로 모든 게임에 임하기를. 최고의 경기를 보여줄 준비가 된 팀으로 남기를.
울산의 팬들이 ACL 우승에 대한 이상과 기대를 저버리기엔 너무 이르다.
[전성호의 스카이박스] 대한민국 축구를 가장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랍니다.
[사진=울산 김호곤 감독(C)울산현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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