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9.01.20 09:47 / 기사수정 2009.01.20 09:47
[엑스포츠뉴스=유진 기자] 4번 타자라는 것은 단순히 9개 타선 가운데 한 자리가 아니다.
타선의 정 중앙에 서서 무게감을 더해 주어야 하는 자리다. 그래서 4번 타자가 갖는 심리적 압박감은 의외로 크다. 요미우리의 하라 감독이 재작년까지 다른 타자를 제치고 굳이 이승엽을 4번에 배치했던 것도 많은 선수가 ‘4번 타자’에 대해 부담감을 많이 갖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4번 타자는 '거포'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만수, 김봉연, 김우열 등 소위 '홈런타자'라 불렸던 선수들만이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 있어서 '거포'와는 다소 거리가 멀었지만, MBC 청룡 원년멤버로써 4번을 많이 쳤던 송영운 선수는 '타격 참 예쁘게 한다'는 평을 많이 받았던 선수였다.
30년간의 야구 인생을 접고 사회로 뛰어든 그였지만, 여전히 국내 프로야구를 사랑하고 해외로 진출한 후배 선수들에게 애정을 많이 갖고 있는 '야구계의 대선배'였다. 사회인 야구단 감독 겸 선수로써 여전히 야구를 즐기고 있는 그를 청담동 인근 그의 사업장에서 어렵잖게 만날 수 있었다.
Q :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까지 MBC청룡 원년 멤버 송영운 선수를 잊지 못하는 팬 여러분에게 인사 한 말씀 해 주십시오.
송영운(이하 ‘송’으로 표기) : 잠실구장에서 왕년의 MBC 4번 타자를 보고 느낀 것이 많으셨던 분들, 저를 이렇게 찾아주셨다는 것에 그저 고맙고 감사 드릴 뿐입니다. 몸은 비록 그라운드를 떠났지만, 나중에 찾아오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대접해 드리고 싶습니다.
현역시절의 추억
Q : 원년멤버로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참 많으실 것 같습니다. 특히, 1985년 해태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9회 말 상대팀의 와일드 피치로 끝날 수 있던 경기를 몸에 맞는 공으로 판정받는 바람에 끝내지 못했던 순간은 아직까지 화자가 되고 있습니다.
송 : 당시 투아웃 상황에서 김재박 선수가 3루에 있었어요. 공교롭게도 상대팀 투수는 선동렬이었고요. 그런데 선동렬 투수가 던진 공이 제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맞았습니다. 그런데 또 그 공이 제 발가락을 맞고 뒤로 빠졌어요. 그것을 본 김재박 선수는 홈인을 했고, 경기는 그대로 끝나는 듯싶었죠. 그런데 선동렬 선수라 하면 당대 1류 선수잖아요? 그러한 선수가 던진 공에, 다른 곳도 아닌 엄지발가락에 맞다 보니 그대로 쓰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심이 몸에 맞는 볼을 선언했고, 김재박 선수는 3루로 귀루를 했습니다. 너무 아파서 맞아도 안 맞은 척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심의 콜(Call)이 너무 늦었던 데에 있었어요. 제 발가락을 맞고 공이 뒤로 빠지는 것을 못 봤거든요. 제가 쓰러진 것을 인지한 후에야 주심이 몸에 맞는 공을 선언했죠. 결국, 다음날 언론사에서 난리가 났죠. ‘이길 수 있는 경기를 송영운이 때문에 놓쳤다’라고 기사가 났으니 저로서도 기가 막혔죠.
Q : 그런 뒷이야기가 있었군요. 그렇다면, 이 경기 외에도 현역 시절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으셨다면 그 추억에 대해 잠시 말씀해 주십시오.
송 : 역시 1987년도였죠. 당시 광주 원정경기를 떠났는데, 그때 해태에서 등판했던 선수가 신예였던 좌완투수 신동수였습니다. 그때 저는 스타팅 멤버에서 빠져있었는데, 아니 이 선수에게 우리 타선이 7회까지 노히트 노런을 당하고 있었어요. 스코어 0:1 상황에서 7회초 공격이 다가오자 제가 후배들을 향해 “우리가 하루 이틀 야구 경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매일 공을 보고 그 공을 치는데 저런 어린 선수에게 당하면 되겠냐? 몸 중심을 뒤쪽에 두고, 공을 끝까지 보고 한 구 종만 노려 쳐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김동엽 감독님께서 제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럴듯하다’라고 느끼셨나 봅니다. 7회초 투아웃 2루 상황에서 저를 대타로 쓰시더군요. 순간 저는 ‘말은 거창하게 했는데, 실제로 못 치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타석까지 가는 거리가 그렇게 멀게 느껴지더군요. 어쨌든 주심이 재촉해서 일단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제가 들어오고 나니 초구에 아웃코스로 꽉 찬 공이 들어왔는데, 그게 또 그렇게 멀게 느껴지더군요. 그대로 스트라이크 하나를 허용했습니다. 그런데 2구째는 이 친구가 몸쪽으로 슈트를 던졌는데, 볼이 높게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원스트라이크 원 볼이었죠. 다음 3구를 던졌는데, 이게 또 유인구였습니다. 다행히 저는 속지 않아서 볼카운트 1-2였죠. 4구째를 맞이하다 보니 ‘커브만 들어오면 내가 친다. 그러나 직구면 그대로 2-2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커브를 노렸는데, 이 친구가 커브를 던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방망이를 휘둘렀죠.
결과는 깨끗한 안타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외야수 김종모의 어깨가 상당히 좋았습니다. 그래서 2루 주자가 홈으로 파고들다 김종모의 외야 송구에 아웃됐죠. 그래도 제 덕분에 노히트 노런이 깨졌습니다. 공격을 마치고 덕아웃에 들어오니 동료 이길환(작고) 투수가 저에게 “형님같은 사람은 처음 봅니다. 밴치에서 조용히 조언만 하다가 타석에 들어서자마자 총알같은 안타를 기록했으니까요.”라고 말하며 감탄하더군요(웃음).
Q : OB베어스 박철순 투수와의 추억도 많은 화자가 됐습니다.
송 : 그랬습니다. 그때가 1983년 9월이었습니다. 주자가 나가 있는 상황에서 제가 박철순 투수와 맞대결을 했는데, 그때도 볼카운트 1-2에서 판가름이 났습니다. 당시 ‘직구를 던지면 투앤 투로 몰리겠지만, 커브가 들어오면 내가 친다’라는 생각을 갖고 타격에 임했는데, 박철순 선수도 저와 똑같은 노림수를 갖고 던졌나 봅니다. 커브가 들어와 배트 중심에 정확하게 맞혔는데, 그만 그 타구가 박철순 선수의 허리를 맞추고 말았던 것입니다. 안타가 되긴 했지만, 제 타구에 맞은 박철순 선수는 워밍업으로 공 한 개를 던지더니 바로 쓰러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결국, 들것에 실려 나가더군요. 고의는 아니었지만, 그때 정말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박철순 선수 찾아가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오히려 박철순 선수는 ‘피하지 못한 내 잘못’이라며 저를 위로했습니다. 하지만, 매스컴에서는 ‘박철순 은퇴하나?’라는 기사가 나와 한동안 마음 아프게 지내야 했습니다. 지금도 미안한 점이 많죠.
타격 교과서, 송영운
Q : 지금도 사회인 야구팀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요즘에는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코치해 주십니까?
송 : 사회인 야구 선수들에게도 많이 강조하는 부분이지만, 저는 후배 선수들에게 가장 많이 강조하는 것이 ‘수평 스윙’이라고도 하는 ‘레벨 스윙’입니다. 레벨 스윙이라는 것은 하체가 제 역할을 해야 가능합니다. 배트라는 것이 정말 예민하거든요. 좌타자는 왼쪽 하체와 오른쪽 하체의 비율을 7:3으로 맞춰야 하고, 우타자는 반대로 맞춰야 합니다. 하체의 비중을 뒤로 두고 쳐야 제대로 된 스윙이 나옵니다. 최근에는 이러한 수평 스윙을 하는 선수가 드물어서 다소 아쉬울 뿐입니다.
Q : 이승엽 선수가 부진했을 때 타격 폼이 앞으로 쏠렸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까?
송 : 그렇습니다. 이승엽, 이병규 두 선수가 못 치는 날에는 몸이 먼저 앞으로 빠지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몸이 빠지다 보면 발도 앞으로 빠지게 되는데, 개인적으로 저는 이러한 타격폼을 추천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중심을 앞으로 가져가다 보면 상체에 의지한 타격을 하게 되고, 또 그만큼 슬럼프가 길어지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어깨부상의 위험도 따르게 되어 있죠. 그래서 저는 몸의 중심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후배들에게 이런 저의 견해를 조언해 주고 싶은 것이 선배된 사람의 마음이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 타격 자세에 대해 송영운 선수는 직접 시범까지 보여주며 자세히 설명했다.
은퇴 이후의 삶
Q : 1988년도에 현역에서 물러나셨습니다. 그동안 많은 감독이 바뀌는 것도 지켜보셨고, 우여곡절도 많으셨고, 재미있는 일도 많으셨을 텐데 아쉬움은 없으셨습니까?
송 : (단호하게) 전혀 없었습니다. 현역시절에 4번을 많이 쳐봤고, 백인천 감독님에서부터 김동엽, 유백만, 배성서, 어우홍 감독님 모두 좋으신 분이셨고, 또 30년간 최선을 다하여 야구선수로써 생활했기 때문에 아쉬움은 없었습니다. 그만큼 방망이 중심에 공을 잘 맞춘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고, 이에 대한 자부심도 큽니다.
다만, 박찬호, 이승엽 등 한국야구의 대들보 같은 후배들이 한국야구계를 이끌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해외파 선수들이 조국으로 돌아와 지도자나 코치로써 우리나라 야구의 큰 밑거름이 되었으면 합니다.
Q : 은퇴 이후에 사회로 나오셨습니다. 그런데 야구밖에 모르던 송영운 선수에게 사회는 결코 만만치 않으셨을 텐데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송 : 맞습니다. 야구만 30년을 해 온 저에게 사회는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운동만 하다 사회에 나오다 보니 내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정말 많은 것을 해 보았습니다. 안양에서 식당도 운영해 보고, 강화도에서 숙박업을 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강남으로 와서 영업을 하게 됐는데, 인근 강남구청 직원들이 와서 사회인 야구를 지휘해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현재까지 6년째 이곳에서 뿌리내리고 호프집을 운영하게 됐습니다. 최근에는 경기가 좋지 않아 매출이 예전만 못하지만, 이 동네 자체가 좋고 단골손님들도 많이 찾아주셔서 참으로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런데 야구도 1회부터 9회까지 있고, 9회말 쓰리아웃이 되어야 경기가 끝나지 않습니까? 이처럼 끝까지 경기를 끝낸 끈기만 있다면 중간에 도태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각오로 열심히 살기만 하면 무엇을 하건 성공한다고 생각합니다. 은퇴하여 사회에 나오는 선수들에게 이 말을 꼭 해 주고 싶었습니다.
Q : 사회인 야구의 재미는 무엇에 있습니까?
송 : 시간이 문제가 되지 않는데다 져도 부담이 없고, 또 이기면 이기는 대로 색다른 재미가 있습니다. 선수들과의 융화가 돋보이고, 웃으면서 야구한다는 점에서 토, 일요일에 야구하면 1주일간의 피로가 그대로 날아갑니다. 이게 진짜 야구하는 맛이죠.
Q : 마지막으로 후배 선수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십시오.
송 :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나선 이상, 열심히 했으면 좋겠습니다. 숨은 노력이 그라운드에 반영되듯 모두 같이 하는 훈련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선수시절에 저 역시 11시에 경기를 끝내고 돌아오면 다음날 새벽 1시까지 개인훈련을 하다 2시 정도에 잠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자기관리를 하는 선수가 좋은 선수입니다.
이만수 선수도 개인 저녁훈련도 모자가 새벽 훈련까지 마다하지 않았기에 훌륭한 성적을 올렸던 것입니다. 남들과 똑같이 해서는 결코 성공하지 못합니다. 저 역시 열심히 했기에 미련없이 유니폼을 벗을 수 있었고, 후회 없이 물러났던 것입니다. 후배들도 마지막에 그런 선수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정리 = 엑스포츠뉴스 유진 기자]
※ 송영운은 누구?
1982년 MBC청룡 원년 맴버로써 1988년까지 쏠쏠한 활약을 펼쳤던 교타자다. 신언호 등과 더불어서 주로 외야수로 출장했으며, 많지 않은 홈런 숫자에 비해 공을 방망이 중심에 정확히 맞추는 재주가 뛰어나 4번 타자로도 많이 기용됐다. 프로 통산 타율은 0.262(214안타). 원년 팬들 사이에서는 일명 ‘몸에 맞는 볼’ 사건으로 인하여 더욱 화자가 되고 있는 선수이기도 하다.
은퇴 이후 그라운드에서 보여주었던 투지를 무기 삼아 각종 사업에 뛰어들 만큼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현재는 강남구청 인근에 있는 호프집에서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주말에는 강남구청 사회인 야구단 소속으로 돌아가 현역 시절에 터득한 타격 기술을 선수들에게 전수함과 동시에 본인도 선수로써 야구를 즐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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