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때 있었던 일이다. 그때 나는 한국 대표팀의 전력 분석 위원을 맡고 있었다. 일본과 대만은 우리가 가장 경계하는 아시아의 라이벌이었다. 그래서 두 팀 경기를 철저히 분석하고, 자료를 모아 선수단에게 전달해줬다. 그때 우리 대표팀에서 가장 적극적인 자세로 눈을 빛냈던 선수가 있었다. 이승엽이다.
2006년이었으니 이승엽은 이미 '국민 타자' 타이틀을 걸고 일본에서 활약 중인 '대스타'였다. 하지만 그런 이승엽은 우리 선수들 가운데서도 전력 분석팀에게 가장 많은 질문을 하고, 가장 많은 메모를 하는 선수였다. 참 인상깊었다. 언제, 어디서나 상대를 철저하게 분석하려하는 성실한 자세가 '아, 괜히 좋은 타자가 아니구나' 싶었다.
나 역시 고대하던 이승엽의 400번째 홈런이 드디어 터졌다. 포항구장 다이아몬드 위를 천천히 도는 이승엽의 모습을 TV 너머로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해태에서만 선수 생활을 했고, KIA 감독을 맡았기 때문에 줄곧 삼성에서 뛰었던 이승엽과 직접적인 인연을 쌓을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승엽은 내게 후배이기 이전에 한국프로야구사에 많은 공헌을 한 선수다. 그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승엽은 장타를 많이 치는 홈런 타자들 가운데서 약점이 적은 선수다. 보통 멀리 치는 선수들이 파워는 있어도 단점이 쉽게 노출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승엽은 그렇지 않다. 또 하나는 실투를 놓치지 않는 집중력이 어마어마하다. 투수가 이승엽에게 단 하나라도 실투를 던질 경우 거의 잘 맞은 타구가 나온다. 나는 늘 이승엽의 상대팀에 있는 사람으로서 이승엽의 예리함과 정교함, 그리고 집중력에 늘 감탄하곤 했다.
이승엽은 우리 프로야구 타자들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보여주는 '모범사례'와도 같다. 내가 사상 처음으로 시즌 30홈런(1988년)을 쳤고, 장종훈이 사상 첫 40홈런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이승엽이 56홈런으로 신기록을 달성했지 않았나. 이승엽이 걷는 길은 우리 프로야구의 발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대단한 기록이기도 하다.
일부에서는 삼성의 홈 구장인 대구구장이 작기 때문에 이승엽의 기록을 낮춰 보기도 한다. 하지만 펜스가 짧은 구장을 쓴다고 해서 모두가 홈런 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건 문제가 안 된다.
무엇보다 이승엽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은 이유는 '꾸준함'이다. 프로 20여 년 동안 오랜 세월 꾸준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완벽한 자기 관리와 겸손한 성품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후배들에게도 귀감이 되는 점이다. 홈런이라는 것은 결코 10년, 20년 꾸준히 치기가 쉽지 않다. 파워도 있어야 하지만 늘 다른 구단의 집중 견제를 받는다. 그래서 이승엽의 대기록은 더더욱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올해 우리 나이로 마흔 살. 사실 선수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다. 그래서 이승엽의 은퇴 시기를 두고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알고 있다. 내가 보기에도 이승엽이 예년에 비해 홈런 숫자가 줄었고, 스윙도 많이 무뎌져 있다. 선수는 선수일 때 가장 빛난다. 현역 생활을 오래하는 것은 복이다. 이승엽은 체력이 떨어진다거나 스스로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되면 충분히 박수칠 때 떠날 수 있는 현명한 판단력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승엽에게 400호 홈런을 맞은 구승민에게도 한마디.
앞으로 이승엽의 400호 홈런 이야기가 나올 때 마다 구승민의 이름도 많이 나올 것이다. 이제 신인이지 않나. 앞으로 선수 생활을 오래 해야 한다. 정정당당하게 승부해서 맞았고, 투수는 언제나 맞는다는 생각으로 오히려 이 기록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편안한 마음으로 더 많은 발전이 있길 진심으로 바란다.
[사진=이승엽 ⓒ 엑스포츠뉴스DB]
나유리 기자 NYR@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