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신명철 칼럼니스트] 에가와 스구루 VS 유대성. 야구 올드 팬 가운데 기억력이 좋은 이라면 이 조합에서 곧바로 떠올릴 말이 ‘괴물 투수’다. 한국 고교 선발팀의 유대성(중앙고)은 1973년 9월 1일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일본 고교 선발팀과 경기에서 1-1로 맞선 5회 말 에가와를 상대로 오른쪽 담장을 넘기는 결승 솔로 홈런을 터뜨려 일본 야구 관계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했다.
유대성이 왼손 타자였으니까 제대로 잡아당긴 타구였다. 한국 교교 선발팀은 1차전 2-1 승리에 이어 2차전에서는 2-2로 비겼고 3차전에서는 1-0으로 이겼다. 한국보다 한 수 위라고 자부하던 일본으로서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한국 교교 선발팀 배터리인 하기룡(배재고), 박상열(동대문상고), 권영호(대건고 이상 투수), 신언호(배재고), 양종수(군산상고 이상 포수)는 일본 고교 선발팀 타선을 완벽하게 틀어막았다. 뒷날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특급 투수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에가와는 그해 열린 제55회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여름철 고시엔대회) 도치키현 예선에서 5경기에 등판해 44이닝 동안 2안타 75탈삼진이라는 믿기 어려운 투구를 하는 등 ‘괴물’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한 구위를 자랑했다.
에가와가 1987년 32살의 이른 나이에 느닷없이 은퇴를 선언했을 때 적지 않은 국내 팬이 놀란 까닭은 그의 괴력이 한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오른쪽 어깨 통증이 은퇴의 원인이었지만 프로 10시즌만 뛰고 유니폼을 벗기에는 아쉬움이 남을 법했다.
오사카 인근 효고현 니시노미야시에 있는 고시엔구장은 해마다 8월이면 고교 야구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른다. 2006년 8월에 열린 제88회 여름철 고시엔대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연인원 80만 명이 넘는 관중이 열광하는 가운데 서도쿄 대표인 와세다실업고가 재경기 끝에 남홋카이도 대표인 고마다이토마코마이고를 4-3으로 물리치고 우승했다.
담쟁이덩굴이 경기장 외벽을 감싸고 있고 2014년이면 지은 지 90년이 되는 고색창연한 이 경기장에서 잊어버릴 만하면 나타나는 이른바 ‘괴물’이 다시 등장했다. 우승교의 기둥 투수인 사이토 유키가 주인공이었다. 사이토는 결승전 재경기에서 6안타 13탈삼진 무사사구 완투승을 거뒀다. 투구 수는 118개였다. 사이토는 전날 1-1로 비긴 결승전에서 7안타 16탈삼진 6사사구로 15이닝을 버텼다. 58타자를 상대한 투구 수는 178개였다. 이틀 동안 24이닝에 296개의 공을 던졌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사이토는 대회 사상 처음으로 7경기 연속 선발로 나서 69이닝을 던지며 948개의 투구 수를 기록했다. 투구 수가 100개를 넘어가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투구 수를 헤아리는 게 일반화된 국내 프로 야구 실정에서 보면 사이토의 투구 기록은 살인적이라고 할 만하다.
사이토는 7월 30일 일본대학 제3고와 치른 서도쿄대회 결승에서도 11이닝 동안 221개의 공을 던졌다. 서도쿄대회를 마치고 일주일 뒤인 8월 6일 고시엔대회 첫 경기인 오이타현 대표 쓰루사키공업고전에서는 9이닝 동안 126개의 투구 수를 기록했다.
사이토는 와세다대학에 입학한 뒤에도 눈부신 투구를 이어 갔다. 사이토는 2007년 4월 열린 도쿄 6대학 봄철 리그 개막전 도쿄대학과 경기에 선발 등판해 승리 투수가 됐다. 1학년선수가 도쿄 6대학 봄철 리그 개막전 승리 투수가 된 건 1927년 게이오기주쿠대학의 미야타케 사부로 이후 80년 만의 일이었다고 한다. 봄철 리그 성적은 4승(리그 1위) 무패, 평균자책점 1.65(리그 3위)였다. 와세다대학 4년 동안 도쿄 6대학 대회 사상 여섯 번째인 통산 30승-300탈삼진(31승-323탈삼진)을 거뒀으니 프로 구단들이 군침을 흘릴 만했다.
갖가지 화제 속에 니혼햄 파이터스에 입단한 사이토는 데뷔 시즌인 2011년 6승6패의 평범한 성적을 거두더니 지난해에는 5승8패에 그쳤다. 올해는 2군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몰락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괴물’의 위상은 크게 떨어졌다.
그런데 올해 또 고시엔구장에 ‘괴물’이 나타났다. 지난 3일 끝난 제85회 선발고교야구대회(봄철 고시엔 대회) 준우승교인 에히메현 대표 사이비고의 에이스 안라쿠 도모히로다. 안라쿠는 사이타마현 대표 우라와학원과 벌인 결승전에 선발 등판해 6이닝 동안 안타 12개를 맞고 9실점하며 패전 투수가 됐지만 이전에 치른 경기 내용을 보면 고시엔구장의 ‘괴물’ 계보를 이을 만하다.
안라쿠는 1회전부터 준결승까지 8일 동안 4경기 연속 완투했다. 40이닝 동안 663개의 공을 던졌다. 결승전까지 더하면 안라쿠는 이번 대회에서 5경기에 등판해 46이닝 동안 772개의 투구 수를 기록했다. 경기당 평균 154개의 투구를 했으니 16살 고교 2학년인 안라쿠의 어깨와 팔꿈치가 어떤 상태인지는 대회 기간 구속에서 대충 짐작할 수 있다. 1회전에서 직구 최고 시속이 152㎞였으나 준결승전에서는 146㎞로 떨어졌고 결승전에서는 142㎞로 더 내려갔다.
대회를 마친 사이비고 선수들은 5일 현청 소재지인 마쓰야마 시청을 방문해 준우승 인사를 했다. 이 자리에서 사이비고 선수들은 “여름철 대회에서 다시 우승에 도전하겠다”고 다짐했고 이튿날 곧바로 훈련을 시작했다.
도도부현(都道府縣)을 대표하는 여름철 고시엔대회 49개 출전교에 드는 것만 해도 매우 힘든 일이어서 사이비고 선수들이 올 여름 고시엔구장에 다시 서게 될지는 미지수이지만 에히메현 예선을 통과한다면 안라쿠의 ‘괴물투’는 여전할 것이다.
투수의 어깨 수명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한계 투구 수론’이다. 구식 텔레비전은 ‘로터리 스위치’로 채널을 맞췄다. 그런데 ‘로터리 스위치’는 제품이 생산될 때 일정 횟수를 돌리면 수명을 다하게 돼 있다고 했다. 투수의 어깨도 그렇다는 얘기다. 투수는 타고난 투구 수가 있기 때문에 성장기에 많이 던진 투수의 선수 생명은 결코 길지 못하다는 것이다.
안라쿠가 고교 졸업 후 어떤 길을 걸을지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고시엔 구장의 ‘괴물’ 선배인 에가와, 사이토 등이 어느 정도 예고하고 있다.
신명철 칼럼니스트 sports@xportsnews.com
[사진=다각도의 고시엔 구장 ⓒ 한신 타이거즈]
김덕중 기자 djkim@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