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9.10.09 10:48 / 기사수정 2009.10.09 10:48
한국 리듬체조의 암흑기, 왜 올림픽 무대에 명함을 내밀지 못했나?
[엑스포츠뉴스=조영준 기자] 80년대와 90년대 초반 리듬체조 무대를 주름잡은 최강국은 불가리아였다. 전통적으로 리듬체조는 동유럽 국가들이 강세를 보였지만 그 중에서도 불가리아 리듬체조는 '예술성'이 돋보였다.
당시 불가리아에서 배출된 선수들 중, 가장 유명했던 선수는 비앙카 파노바였다. 80년대 나타난 '리듬체조 천재'였던 파노바는 87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전인미답의 전 종목 만점의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88년 서울올림픽에서는 곤봉을 놓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해 4위에 머물고 말았다.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다시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다른 선수에게 올림픽 출전권을 내주고 은퇴의 길을 걸었다.
세계정상권의 선수는 모두 구 소비에트 연방 국가에 몰려있었다. 불가리아를 제외하면 소련 국가대표가 사실상 국제대회 1위를 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구소련이 10개가 넘는 국가들로 나뉘게 되면서 북미와 아시아 국가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현재 리듬체조에서 10위권을 다투는 국가들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시, 아제르바이잔, 그리고 카자흐스탄 등이다. 이들 선수들이 한정된 올림픽 티켓을 가지고 경쟁을 펼치면서 국내 선수들의 기회는 더욱 협소해졌다.
독립국가연합이 완전히 해체된 1996년 애틀랜타와 2000년 시드니, 그리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는 국내 리듬체조 선수들이 출전하지 못했다. 구 소비에트의 해체로 인한 국제무대의 벽이 더욱 높아졌기 때문이다. 10여 개가 넘는 구소련 국가에서 출전한 선수들은 모두 상위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여기에 서유럽 선수들까지 가세해 한국 선수들의 파고들어갈 틈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한국 리듬체조의 '작은 기적' 신수지의 출연
아마추어 종목이 대중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가장 좋은 무대는 올림픽이다. 전 국민이 관심을 가지고 집중하는 대회에서 좋은 성과를 올리면 뜨거운 관심을 받기 때문이다. 때로는 인기 스포츠로 급부상하는 종목도 있지만 대부분은 '반짝 관심'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서울과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연속 출전하면서 대중들에게 다가선 리듬체조는 더더욱 멀어져갔다. 그러나 2007년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한 신수지(18, 세종대)는 개인종합 17위에 오르며 2008년 베이징 올림픽출전권을 획득했다. 92년 이후, 16년 만에 올림픽에 진출하는 쾌거였다.
2007년은 놀랍게도 신수지가 시니어 무대에 데뷔한 해였다. 서혜정 리듬체조 경기 부위원장과 김지영 기술 위원장은 신수지가 성장하는 모습을 어릴 적부터 지켜봐 왔다.
"(신)수지가 올림픽에 진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매우 기뻤습니다. 선수 본인도 노력을 많이 했지만 어머님의 헌신도 큰 몫을 해냈어요. 수지는 분명히 재능이 있는 아이였어요. 유연성이 좋았고 '끼'도 풍부했었죠"
- 김지영 기술 위원장
"(신)수지만큼, 좋은 유연성과 끼를 가진 선수는 드물었어요. 그래서 수지의 지도자인 김지희 코치는 이 재능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에 전지훈련을 데리고 갔을 때, 그곳에 계신 리듬체조 기술위원장인 알렉산드리아 비노르가 극찬을 아끼지 않았어요"
- 서혜정 경기 부위원장
비노르는 '러시아 리듬체조의 대모'로 불리는 관계자다. 모든 선수들을 직접적으로 지도하지는 않지만 그녀의 손을 거치지 않은 선수가 없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을 발굴하고 지도해온 비노르는 신수지가 가진 재능을 보고 가능성을 점쳤다.
비노르의 초청으로 신수지는 러시아 선수들과 함께 전지훈련을 받게 됐다. 부푼 꿈을 안고 출전한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신수지는 선전을 펼쳤다. 비록 10위권 진입은 실패했지만 세계적인 수준을 고려한다면 신수지의 12위의 결과는 값진 성과였다.
신수지는 메달 권에 들지 못했지만 그가 펼치는 연기는 전국에 생중계로 방송됐다. 이러한 파급효과로 인해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한국 리듬체조는 다시 기지개를 켜고 대중들 앞에 다가서기 시작했다.
신수지는 올해도 한국리듬체조의 '에이스'로 활약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9월 초, 일본 미에 시에서 벌어진 '2009 세계리듬체조선수권대회'에서 신수지는 결선 진출에 실패했다. 연이은 강행군으로 인한 허리부상이 신수지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한국 리듬체조의 1세대인 두 전문가는 신수지의 문제점에 대해 '부상 회복'이 급선무라고 밝혔다. 또한, 아직 성장하는 선수이니 만큼, 좀 더 지켜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덧붙었다.
보는 이들의 마음마저 흔들어놓는 최고의 유망주, 손연재
오랫동안 비인기 종목의 그늘에 있었던 리듬체조를 따뜻한 햇볕으로 인도한 이는 신수지였다. 이러한 리듬체조를 보다 대중들에게 알리고 큰 기폭제 역할을 한 선수는 바로 손연재(15, 광장중)였다. '리듬체조 얼짱 소녀'로 큰 인기를 모은 손연재는 '피겨 여왕'인 김연아(19, 고려대)와 맞먹을 정도의 미니 홈피 방문자 수를 기록했었다.
그러나 손연재는 그저 '얼굴만 예쁜 선수'가 아니었다. 신수지와 함께 가장 특별한 재능을 가진 선수로 평가받고 있는 손연재는 한국 리듬체조의 '축복'이자 '미래'로 평가받고 있다.
"러시아의 리듬체조 대모인 알렉산드라 비노르는 (손)연재의 재능도 눈여겨봤어요. 연재가 중학교 1학년 때 출전한 2007 FIG(국제체조연맹) 리듬체조 주니어 월드컵 슬로베니아 대회를 참관한 비노르는 연재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연재의 경기는 모든 종목을 꼼꼼히 챙겨가며 보셨어요. 나중에는 여건만 되면 러시아에서 함께 훈련하고 싶다고 제의도 했었죠. 또한, 비행기 문제로 연재는 대회 당일 새벽에 현지에 도착했어요. 눈을 잠깐 붙이고 바로 경기에 임해 매우 피곤한 상태였죠. 하지만, 그 상황에서 놀라울 정도로 좋은 연기를 선보였어요. 정말 강단이 있는 아이라는 게 한눈에 보였습니다"
- 김지영 기술 위원장
손연재는 이 대회에서 개인종합 5위를 기록했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처음 참가한 국제대회에서 손연재는 좋은 성과를 남겼다. 이듬해인 2008년 가을, 말레이시아에서 벌어진 '에인절스 컵'에서는 국제대회 첫 우승을 차지했다.
아직 주니어 선수인 손연재는 배워야 할 점이 많고 풍부한 경험도 필요하다. 앞으로 꾸준하게 성장해야 할 손연재에 대해 두 대선배는 공통적인 평가를 내렸다.
"(손)연재가 연기하는 것을 보면 심판석에 앉아있는 저마저 흥이 날 정도에요. 그만큼, 리듬체조를 정말 즐기면서 하는 모습이 물씬 풍겨 나와요. 연습 때 잘해도 실전에 나서면 벌벌 떨면서 실력을 발휘 못 하는 선수들도 많은데 연재는 전혀 다른 경우죠. 실전 자체를 매우 즐기면서 하는 점은 리듬체조 선수에게 큰 장점입니다. 앞으로 연재에게 바라는 점은 지금처럼만 꾸준하게 성장해줬으면 좋겠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부상 없이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하는 점이죠. 또한, 시간이 지나도 지금처럼 재미있게 리듬체조를 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 서혜정 경기 부위원장
"연재는 기술도 좋고 리듬체조 선수가 갖춰야 할 재능을 모두 고루 갖췄습니다. 여기에 똑똑하고 강단까지 있으니 아쉬울 게 없죠(웃음) 저도 더도 덜도 말고 지금처럼만 성장해 줬으면 좋겠어요"
- 김지영 기술 위원장
1983년, 김지영 위원장은 처음으로 태극 마크를 달고 국제대회에 출전했다. 그리고 다음해인 84년도에 제1회 회장기 전국리듬체조대회가 국내에서 개최됐고 기계 체조 출신이 아닌, 순수 리듬체조 선수였던 윤병희와 김유경은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티켓을 따냈다.
올림픽에 출전 못 한 16년의 침묵을 깨고 백 일루션(한쪽 다리를 머리로 올린 뒤, 수직으로 원을 그리는 기술) 9회를 시도하는 신수지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참가했다. 그리고 각종 주니어 대회를 휩쓸며 리듬체조 인기몰이에 한 몫을 하고 있는 손연재가 등장했다.
김지영부터 손연재까지 이어진 한국리듬체조의 역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30년이란 짧은 역사 동안, 안 좋은 일도 많고 험난한 과정도 있었지만 열정으로 똘똘 뭉친 체조 인들의 노력으로 여기까지 걸어왔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보다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더 많은 리듬체조의 역사는 여전히 출발점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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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신수지 (C) 엑스포츠뉴스 김세훈 기자, 서혜정, 손연재 (C) 엑스포츠뉴스 조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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