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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맨' 염종석, 그에게 훈장을……

기사입력 2009.04.05 22:33 / 기사수정 2009.04.05 22:33

유진 기자

[엑스포츠뉴스=유진 기자] 또 다른 부산야구의 영웅, 염종석(36)이 은퇴를 선언했다. 부산야구의 영원한 에이스로 기억되었던 그가 프로 입단 17년 만에 마운드를 떠난 것이다. 롯데 자이언츠 시절, 한국시리즈 우승 등 영광스러웠던 모든 순간들을 경험했던 그였다. 그랬기에 염종석은 적어도 부산 야구팬들에게는 든든한 맏형이었다.

롯데 자이언츠 전성기의 '정점'에 서다

대체로 롯데 자이언츠의 전성기는 1980년대와 90년대로 나뉘어 볼 수 있다. 1984년 한국시리즈 우승 시기를 롯데 자이언츠 '제1의 전성기'로 본다면, 1992년 포스트 시즌에서 삼성, 해태, 빙그레 등을 차례로 격파하고 한국시리즈 타이틀을 차지했던 시기를 '제2의 전성기'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염종석은 그러한 롯데 자이언츠의 '제2의 전성기'를 두루 경험했던 투수이기도 하다.

당시 염종석은 부산고교 졸업 이후 바로 프로무대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시즌 내내 나머지 일곱 팀을 차례로 초토화하며 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 정점에 서 있었던 염종석은 신인왕과 투수부문 골든글러브를 싹쓸이하며, 1992년을 완전히 자신의 해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해를 마지막으로 롯데 자이언츠는 한국시리즈 우승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그랬기에 당시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염종석을 ‘최고의 투수’로 기억하는 부산 야구팬들이 적지 않았다.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롯데는 1995년에 다시 한 번 한국시리즈 타이틀에 도전했다. 상대는 김상호, 김민호, 김경원 등이 버티고 있는 OB 베어스였다. 이에 맞서는 롯데는 당시 염종석을 필두로 윤학길, 박동희, 마해영 등을 앞세웠다. 그만큼 백중세였던 양 팀은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다. 그리고 당시 염종석은 1차전 선발로 나서며 승리 투수가 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당시 OB베어스 4승 3패로 우승).

1995년 이후 포스트시즌 진출과는 거리가 멀었던 롯데는 최하위를 두 번이나 기록하는 등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 염종석만큼은 선발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며(도표 참조) 꾸준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다만, 방어율에 비해 패배 숫자가 많았던 것은 당시 최하위에 두 번이나 빠졌던 팀 전력 때문이었다. 그만큼 승운이 따르지 않았다.

그랬던 롯데에게 다시 한 번 한국시리즈 타이틀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은 바로 1999년이었다. 당시 드림/매직리그의 ‘양대리그’에서 드림리그 2위를 차지한 롯데의 기세는 대단했다. 매직리그 1위 삼성에 4승 3패로 한국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은 롯데는 두산에 4연승으로 가볍게 승리한 한화를 만났다. 그리고 1차전 선발 투수는 어김없이 염종석의 몫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늘은 롯데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정민철, 송진우, 구대성 등 최강 투수진을 보유한 한화는 절대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 롯데는 한국시리즈 다섯 경기를 모두 접전으로 이끌었다. 1승 4패로 물러나기는 했지만, 다섯 경기 중 무려 네 경기가 한점 차 승부였다. 그리고 이 해를 마지막으로 롯데는 2008년에 이르기까지 두 번 다시 가을잔치에 진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롯데의 암흑기와 함께 염종석 또한 단 한 번도 10승을 기록하지 못했다. 물방망이 타선을 안고 마운드에서 던지고 또 던졌지만, 지독히도 승운이 없었다.

묵묵히 '롯데맨'으로 그 자리를 지켜

그랬던 염종석에게 위기가 찾아 온 것은 자유계약신분을 얻은 직후였다. 롯데로부터 이렇다 할 재계약 통보를 받지 못했던 염종석은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스스로 시장에 나왔다. 그러나 1994년 이후 단 한 번도 두자릿수 승수와 거리가 멀었던 당시 스물아홉의 투수에게 관심을 갖는 구단은 없었다. 또한, 염종석을 영입할 경우 소모될 유망주 카드와 계약금 등도 무시하지 못했다. 결국, 염종석은 2002년 11월, 4년간 총액 14억 1000만 원에 계약하며, 다시 한 번 롯데 유니폼을 선택했다.

계약 첫 해, 선발투수로 100이닝을 돌파했으나, 생애 첫 5점대 방어율을 기록한 것이 ‘옥에 티’였다. 하지만, 당시 롯데 사정은 최악이었다. 이듬해까지 4년 연속 최하위를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롯데가 최하위를 기록하는 4년 동안(2001~2004) 염종석은 단 24승에 그치며 ‘홀로서기’를 해야 했다.

불운했던 승운은 작년까지 계속되어야 했다. 2005년 이후에도 단 13승에 그쳤던 염종석은 부상으로 한때 마운드를 비우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 그는 17시즌 중 11시즌을 100이닝 이상을 기록하며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롯데의 정점과 나락을 동시에 맛보며, 항상 선발마운드를 지켰던 염종석. 불균형한 구단 전력 때문에 100승의 꿈을 접어야 했던 ‘비운의 에이스’이기도 한 염종석. 그를 두고 많은 야구팬은 추후 어떠한 평가를 내리게 될까? 일부 팬들이 주장하는 ‘영구 결번’까지는 다소 무리더라도 어느 정도는 ‘왕년의 영웅’ 대우를 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고 본다.

부산야구의 영원한 에이스이기를 바라는 염종석. 그의 야구인생이 코치로서 또 한 번 빛을 발하기를 기원한다.

[사진 = 염종석 (C) 엑스포츠뉴스 DB 박찬기 기자]



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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