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10-05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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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오른손을 보고 말았습니다

기사입력 2005.04.02 10:23 / 기사수정 2005.04.02 10:23

윤욱재 기자

어제 한국야구 100주년 기념식에 갔었습니다.

감격스러웠습니다. 이런 감격은 두 번째입니다. 첫 번째는 제가 살아있을 때 보스턴 레드삭스의 우승 장면을 봤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제가 한국야구 100주년이 되는 해에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현장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하던 저는 사진촬영을 위해 앞으로 다가섰고 다른 사진기자 분들과 겹치지 않기 위해 저만의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저의 앞엔 이날 참석한 내외빈 여러분이 일열로 서 있었습니다. 시상이 끝나고 이어지는 떡커팅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박용오 KBO 총재도 보였고 이날 공로상을 받으러 온 필립 질레트 선교사의 외손자 허바드 씨, 왕년의 홈런왕이자 인천 야구의 대부인 박현식 씨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노년의 신사 한 분은 그 대열에서 빠져나와 뒤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두 손은 뒷짐을 지고 말입니다.

저는 '설마'했다가 행사가 시작되자 무대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간단한 소개와 영상물 상영을 마치고 박용오 총재가 올라와 시상을 시작하자 박수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때, 뒷짐지고 계시던 그 분이 박수를 칠 때였습니다. 우리가 치는 박수와는 달랐습니다. 뭔가 어색하고 불편해보였습니다.

저는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그 분이 일본야구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장훈 씨였다는 사실을.

말로만 듣던 그의 오른손을 보고야 만 것입니다.

처음 그의 오른손을 본 순간, 가슴이 아파오면서 마음 한 켠으론 제가 괜히 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죄송스러웠습니다.

이날 총재 특별보좌관 자격으로 참석한 장훈 씨는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네 살 때 입은 화상으로 왼손잡이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오른손에 글러브를 차야했던 장훈 씨. 그것이 불멸의 3,000안타를 향한 첫 출발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프로야구 선수가 된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한국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그의 가장 큰 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장훈 씨는 고집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귀화를 권하는 주위의 설득과 야구장 밖에서의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그는 살아남기 위해 한번이라도 더 배트를 휘둘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갖고있는 신체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했고 수많은 땀방울을 흘렸습니다. 어쩌면 그의 부단한 노력을 말로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건방진 일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실력으로 모든 것을 인정받은 장훈 씨는 일본프로야구 통산 최다안타 기록 보유자이자 수위타자 7회, MVP와 신인왕까지 휩쓸고 1990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습니다.



조국에 대한 사랑과 야구에 대한 열정으로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최고의 선수로 우뚝 선 장훈 씨.

그가 왜 최고의 선수였고 존경받는 야구인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던 하루였습니다. 장훈 씨는 무한경쟁시대에 살고있는 우리 사회에 영원한 교과서가 돼 줄 것입니다.

엑스포츠뉴스 윤욱재기자
사진 / 윤욱재




윤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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