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8.09.22 03:57 / 기사수정 2008.09.22 03:57
Monday Sports Essay - 한국 피겨의 새싹들은 이렇게 성장한다
[엑스포츠뉴스 = 조영준 기자] 아직도 무더운 가을 오후, 한국피겨스케이팅의 성지로 불리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경기도 과천시에 위치한 과천실내빙상링크는 한국피겨 계에 있어서 매우 뜻 깊은 장소입니다.
한국피겨사에 새로운 획을 긋고 최고의 인기 스포츠 스타로 각광받고 있는 '피겨 여왕' 김연아(18, 군포 수리고)가 이곳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오후 6시가 되자 어린 선수들은 빙판 밖에서 이루어지는 지상 훈련을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기본적인 스트레칭과 점프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스링크에 들어서기 전, 몸을 제대로 풀고 들어가야 부상의 위험을 피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링크장에서 연습 효과를 제대로 발휘하려면 빙판 밖에서 하는 훈련과정도 매우 중요합니다.
미래에 세계적인 피겨선수를 꿈꾸는 선수들은 모두 10대 초반에서 15세에 못 미치는 어린 선수들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어린 노비스에 속하는 선수 한 명이 눈에 띄었습니다. 바로 국내 노비스 대회에서 1위를 기록하며 차세대 유망주로 주목받고 있는 이호정(11, 서울 남성초)이었습니다.
유치원 시절, 우연히 이곳 과천실내빙상장에 놀라왔다가 이곳에서 유망주들을 지도하고 있던 김세열 코치의 눈에 이호정이 들어왔습니다. 김 코치로부터 선수로서의 길을 권유받은 이호정은 조그마한 스케이트를 신고 링크 장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본격적인 피겨선수의 길을 걸은 이호정은 2학년 때 참가한 꿈나무대회에서 4위에 올랐고 3학년부터 5학년인 지금까지 국내 대회 노비스 부분에서 우승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제 만 11세에 불과한 이호정이 빙판에 들어서서 움직이는 몸놀림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어린 선수치고 스케이트를 타는 속도가 상당히 빨랐으며 가뿐하게 뛰는 점프는 매우 상쾌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어린 선수들이 한 링크장에서 본격적인 스케이팅 훈련을 하는 모습을 많은 부모님들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올해 초에 슬로베니아에서 벌어진 트리글라프트로피 노비스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캐나다 토론토에서 김연아와 함께 전지훈련도 받고 돌아온 윤예지(14, 과천중)의 부모님도 계셨습니다.
어린 선수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본 윤예지의 아버지인 윤영로 씨는 "박세리가 골프로 세계를 제패한 후, 많은 박세리 키즈들이 미래의 LPGA 골프 선수를 꿈꾸며 몰려들었었다. 지금 성장한 그 선수들이 세계 골프 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듯, 김연아의 붐으로 인해 몰려든 저 피겨 꿈나무들도 세계적인 선수들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라며 소감을 밝혔습니다.
실제로 국내 노비스 선수들의 레벨은 상당히 높습니다. 김연아 이후로 10세 안팎의 어린 선수들이 더블 악셀을 구사했던 경우는 흔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재 노비스 선수들 가운데 더블 악셀을 구사하는 선수들이 많이 늘어났고 이제 트리플 점프에 도전하는 선수들이 속속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핀과 스파이럴에 있어서도 국내 노비스 선수들의 수준은 만만치 않습니다. 또한, 고무적인 현상은 이러한 재능을 가진 선수들이 한두 명으로 한정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노비스에서 경쟁하는 선수들의 층은 점점 탄탄해져 가고 있으며 이렇게 서로 경쟁하면서 크는 선수들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습니다.
김연아가 국내 최고의 스포츠 스타로 부각되면서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을 때, 그 파급 효과는 한국 피겨의 꿈나무들에게까지 미쳤습니다.
미래의 꿈나무들 중, 한명인 이호정은 이렇게 쟁쟁한 노비스 선수들의 경쟁에서 승리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호정의 어머니인 박용숙 씨는 현재 노비스 선수들의 기량은 모두 종이 한 장 차이이며 이호정이 1등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아서였을 뿐이라고 밝혔습니다.
김세열 코치는 이호정에 대해 "호정이는 피겨선수가 갖추어야 할 안무 동작과 스핀, 그리고 스파이럴 등이 모두 좋다. 그리고 가장 큰 장점은 표정 연기에 있다. 이러한 부분은 가리켜서 성장할 수 없는 부분이 큰데 호정이 자신만이 표할 할 수 있는 독창적인 표현력과 끼를 가졌다는 게 가장 큰 장점으로 꼽을 수 있다"라고 이호정을 평가했습니다.
피겨 팬들 사이에서 '노비스 계의 미소녀'로 불리고 있는 이호정은 피겨 외에 학교 수업도 모두 받고 있습니다. 이제 만으로 11세에 불과한 초등학교 5학년생인 이호정의 하루 일과는 매우 빠듯합니다.
매일 아침 6시 반에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이호정은 아침식사와 등교 준비를 마치고 8시까지 서울 남성초등학교로 향합니다. 보통 9시까지 등교하는 것이 맞지만 이호정은 컴퓨터를 배우기 위해 다른 친구들보다 1주일에 두 번 더 일찍 학교에 등교합니다. 오후시간에는 훈련 때문에 자신이 배우고 싶은 컴퓨터를 수업을 들을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학교수업은 오후 3시에 끝납니다. 수업이 파하면 영어를 배우고 난 뒤, 피겨를 타기 위해 과천아이스링크장에 오면 오후 6시부터 8시까지 지상훈련을 실시하고 8시부터 10시까지 본격적인 스케이팅 훈련을 받습니다.
이렇게 빠듯한 일정 속에서 고생하는 딸을 염려한 박 씨는 피겨 선수를 그만 두게 하고 평범한 학생으로 보내고 싶은 생각도 간절했었습니다.
실제로 이호정은 공부도 매우 잘해 지금까지 1, 2등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피겨도 잘하지만 공부하기도 좋아하고 영민한 이호정을 계속 피겨를 시킬지에 대해 고민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부모의 생각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사자인 아이의 선택입니다. 그런데 이호정 스스로가 진심으로 피겨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말을 어머니인 박 씨는 듣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공부를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할 테니 제발 피겨를 할 수 있게 해 달라”라고 어린 이호정은 간절하게 부탁했습니다. 부모의 선택으로 피겨를 그만 두게 할 수 없음을 느낀 박 씨는 본격적인 '피겨 맘'이 되었고 이호정은 그러한 기대에 부응하듯 출전하는 꿈나무대회와 전국체전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피겨도 잘하지만 똑똑하고 속도 깊었던 이호정은 모든 것을 갖춘 '미래의 피겨 요정'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호정을 크게 괴롭히는 악몽이 있었습니다. 바로 어린 선수에겐 너무나 심하게 다가온 부상이었습니다.
보통 피겨 선수들은 어린 시절에는 큰 부상 없이 넘어가지만 체격이 커지고 고난도의 점프와 기술들을 배우면서 중학교 시절부터 부상의 그림자가 찾아옵니다. 그러나 이호정은 너무나 어린 나이부터 부상의 망령에 시달렸습니다. 피겨선수들의 고질적인 부상인 골반부상으로 고생했었고 무릎 십자인대까지 파열 되는 큰 시련까지 닥쳐왔습니다.
이제 140cm를 넘긴 자그마한 어린 선수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큰 고통이었지만 이호정은 놀랍게도 이 부상들과 싸우면서 노비스 대회에 참가해 우승해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통을 내색하지 않는 이호정은 실전에 들어가 연기를 펼치고 나오면 더 심하게 아파하는 모습을 박 씨는 계속 지켜봐야 했습니다.
한번은 발목 부상 중에 경기를 펼치고 들어온 딸의 스케이트를 벗겼을 때, 박 씨는 너무나 가슴이 찧어질 듯이 아팠었습니다. 그 몹쓸 부상을 가지고도 혼신의 힘을 다하고 돌아온 딸의 발이 붉은 피로 흥건하게 적셔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아픈 곳이 없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호정은 환하게 웃으며 지금은 괜찮다고 대답했습니다. 머리에 열이 나거나 멍이 들었을 때도 크게 울어 젖히는 10살의 어린 나이에 이호정은 그 참기 힘든 고통 속에서도 피겨를 계속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피겨를 타는 게 마냥 재미있고 즐겁다는 이호정은 얼마 전, 5급 승급시험에 떨어지는 쓴맛을 봤었습니다. 전국 체전과 꿈나무대회에서 줄곧 이기던 경쟁자들은 모두 5급 승급시험에 합격했는데 정작 우승을 한 자신은 더블 악셀에서 실수를 보이며 안타깝게 떨어졌습니다.
그 때는 많이 속상했지만 더블 악셀을 좀더 완벽하게 익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 이호정은 다시 스케이트 끈을 단단히 매고 훈련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더블 악셀은 물론, 벌써부터 트리플 점프에도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호정은 현재 트리플 살코를 익히고 있으며 토룹도 트리플로 완성한 다음엔 다섯 가지 종류의 점프를 모두 트리플로 장착시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호정 역시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같은 큰 국제대회에 출전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이 자신의 꿈이라고 밝혔습니다. 시종일관 밝게 웃으며 질문에 또박또박 대답하는 이호정의 모습은 국내 노비스 선수들의 밝은 가능성을 볼 수 있는 '한줄기 빛'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제 겨우 열 살을 넘긴 아이가 무릎과 발목, 그리고 골반 등에 큰 부상을 당하면서도 피겨 선수를 계속하겠다는 의지는 결코 쉽게 나올 수 없습니다. 스케이트를 벗자 흥건히 적셔 나온 붉은 피도 빙판에서 연기를 펼치고자 하는 이호정의 꿈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꼭 1등을 안 해도 좋으니 아프지만 않게 자라만 달라고 부탁한 기자의 말에 이호정은 환한 미소로 화답했습니다. 재작년과 작년에 큰 부상으로 고생을 했지만 최근에는 아프지 않은 몸으로 피겨를 타는 게 너무도 즐겁다는 이호정의 모습은 훈련에서 고스란히 나타났습니다.
20명이 넘는 선수들이 빙판을 타고 있는 가운데서도 이호정의 모습은 유난히 빛났습니다. 어린 선수치고 매우 빠르게 빙판을 질주하고 있었으며 점프를 성공시키고 난 뒤, 특유의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만족하는 모습은 계속 반복됐습니다.
그리고 이호정을 비롯해 피겨를 매우 즐기는 모습으로 타고 있는 어린 선수들의 모습은 매우 훈훈했습니다. 어느덧 한국 피겨를 짊어지려는 미래의 줄기들은 이렇듯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두 시간 동안의 스케이팅 훈련을 마친 선수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호정을 비롯한 피겨의 유망주들이 끝까지 최선을 다해 하루를 마감하던 시각은 어느덧 11시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사진 = 이호정 (C) 조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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