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농구가 자리를 잡아가던 2000년 즈음해서, 토종 빅맨들에게는 새로운 전기가 찾아옵니다.
앞서도 얘기했듯이 프로 초기의 외국인 선수 기용은 기본이 센터 한 명에, 다른 한 명은 팀에 따라 가드를 기용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이 때 가드를 기용했던 팀들의 4번 자리는 당연히도 토종 빅맨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정재근, 강병수, 이은호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러나 당시 몇 시즌간 압도적인 활약을 펼치던 맥도웰을 본 다른 팀들은 너도 나도 제 2의 맥도웰 찾기에 바빴고 이 결과 2000년대 들어서는 파워포워드 - 센터의 외국인 선수 조합이 대세를 차지했습니다. 이런 성공을 겪은 감독들은 계속 이러한 조합을 선호했고, 몇 번인가 외국인 선수 타입의 선호도는 조금씩 변했지만 기본적으로 '외국인 선수 = 빅맨' 의 공식이 성립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토종 빅맨들의 입지 축소로 이어졌습니다. 극소수의 스타급 빅맨을 제외한 대부분의 경우는 선택에 직면했습니다. 실력 부족을 인정하고 백업 역할로 돌아갈 것인가, 혹은 다른 포지션으로의 변경을 꾀하여 살아남을 것인가. 그리고 기존에 있던 많은 선수들이 전자를 선택하여 백업 선수로 입지가 줄어들었고 조용히 사라져 간 선수들도 많았습니다.
그 즈음에 대학을 졸업하고 프로로 뛰어든 선수들은 조금 달랐죠. 좀 더 적극적으로 선택이 가능했습니다. 포지션 변화를 꾀할만한 시간이 충분했고, 아직도 조금씩 농구를 더 배워가는 단계였기 때문에 후자의 선택도 충분히 가능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여러 선수들이 3번으로의 포지션 변경을 단행했고, 이는 때로는 실패, 때로는 성공을 거뒀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한동안, 그리고 지금도 어린 장신 유망주들에게 주어진 선택의 기로에 대해서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실패, 혹은 성공
송영진 (부산 KTF, 198cm / 92kg)
통산 7시즌 301경기 <8.01득점, 2.27리바운드, 1.14어시스트, 0.72스틸, 0.30블록>
송영진은 중대 재학 당시 김주성과 함께 막강한 더블 포스트를 구축하며 중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선수입니다. 당시 대학 무대에서는 군계일학의 운동 능력과 좋은 수비 센스를 겸비한, 소위 대성할 재목이었죠.
중대 졸업 후 뛰어든 2001년 드래프트에서 창원 LG에 1순위로 지명되었지만 프로에서는 사정이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앞선 글에서 언급한 전희철과 유사한 문제점을 겪었다고 볼 수 있는데, 송영진 역시 운동 능력에 많은 부분 의존하던 선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외국인 선수 혹은 주전급 국내 빅맨들과 힘으로 경쟁하기에는 너무 밀렸고, 그렇다고 운동 능력에서도 상대를 압도할 수는 없는 그런 상황이 온 것입니다. 더구나 대학 무대에서 장기였던 수비력은 프로에서는 힘과 체격에서 한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빛을 잃었습니다.
더구나 제대로 출장 시간을 보장받지 못하며 벤치 워머로 전락해가는 듯 하다가 결국 부산 KTF로 트레이드 되기에 이릅니다. 이는 약이 되었던 것 같네요. 이적 이후 비교적 많은 출장 시간을 보장받고 3점슛도 어느 정도 연마한 송영진은 차츰 가능성을 보여주고, 2006-2007시즌에는 최초로 두 자릿수 득점을 올리기에 이릅니다.
지난 시즌은 부상으로 고전하며 다시 부진의 늪에 빠졌습니다. 이 부진이 부상으로 인한 것인지, 혹은 역시 기량의 부족 때문인지는 아직 섣불리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송영진이 부진했던 지난 세월, 그리고 송영진에게 원래 기대되었던 모습과 현실과의 괴리를 생각해보면 그가 내린 선택이 옳은 것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듯 합니다.
이규섭 (서울 삼성, 198cm / 100kg)
통산 6시즌 291경기 <11.62득점, 3.03리바운드, 1.38어시스트, 0.53스틸, 0.40블록>
이규섭은 지금은 거의 슈터로 굳어져 버렸지만 데뷔 초기에는 확실히 파워포워드에 가까운 플레이를 해주는 선수였습니다. 데뷔 시즌에는 4.67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냈고, 포스트업과 골밑 공격을 위주로 하며 수비에서도 비교적 가능성이 엿보였습니다.
하지만 군입대 후 상무에서 그는 꾸준히 3점슛을 연마했고, 제대 후에 그것을 더 갈고 닦아 올 시즌엔 명실공히 슈터로서 거듭나는데 성공했습니다. 올 시즌 그의 경기당 3점슛 성공 개수는 2.43개에 이릅니다.
골밑 자원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조금은 씁쓸하지만, 이규섭의 경우는 본인이 원한 선택을 한 것이고 그것이 당당히 성공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조금 앞서 울산 모비스의 김동우가 3번으로 가능성을 보여줬다면, 이규섭의 경우는 그 가능성을 완전히 현실로 만들었다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골밑 플레이를 갈고 닦았더라면 훌륭한 빅맨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조금은 남습니다. 수비도 되고 파워도 밀리지 않으면서 어느 정도 포스트 플레이의 마인드를 갖춘 선수였으니까요.
선택의 기로에 놓이다
지난 시즌부터 2, 3쿼터에는 외국인 선수 한 명만을 기용하게 되었고 조만간 아예 외국인 선수 기용이 한 명으로 줄어들 것입니다. 벌써 지난 시즌에만도 이로 인해 토종 빅맨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꽤나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함지훈, 이동준, 김일두, 송창무 등은 이전과 같은 제도 하에서라면 지난 시즌과 같은 활약을 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전히 선택의 문제는 존재합니다. 가장 눈에 띄는 선수는 바로 김민수입니다.
김민수는 훌륭한 체격 조건을 지녔고 운동 능력 역시 좋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꽤 위력적인 공격력을 보여주는 선수입니다. 하지만 줄곧 지적되어 왔던 수비력과 리바운드 문제는 별로 고쳐지지 않은 듯 하고, 지난 올림픽 예선 때에는 외곽으로 겉도는 모습을 보여주더군요.
경희대 재학 당시 최부영 감독의 요구로 웨이트도 늘리고 수비와 리바운드에 많이 매진했다고 하는데, 그렇게 큰 성과가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몸싸움을 별로 좋아하는 타입도 아닌 듯 합니다.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키와 운동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며 공격 시에는 4번이 되고, 수비 시에도 키와 운동 능력의 우위를 이용해 3번을 수비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외곽 슈터가 되기에는 슛 셀렉션에 약간 문제가 있어 보이고 그의 출중한 운동 능력을 썩히는 결과가 될 것 같네요.
비단 김민수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대학 때 4번 자리에서 플레이했던 윤호영은 프로에서는 3번으로 뛸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이고 앞으로 등장할 빠르고 운동 능력이 좋지만 힘에서 밀리는 장신 유망주들은 누구나 이런 고민을 한 번쯤은 할 것입니다.
모든 포지션의 장신화는 좋습니다. 하지만 토종 빅맨의 저변 자체가 넓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골밑은 점점 약해질 것입니다. 전략적으로 장신 유망주를 발굴하고, 빅맨 자원을 육성하는 모습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골밑은 어차피 안되니까’ 라는 마인드로는 절대 세계 무대에서 경쟁할 수 없습니다.
최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