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 김유진 기자] 꾸밈없는 모습 속에서도, 보는 이들을 사로잡는 강렬함이 존재한다. 배우 장혁의 새로운 얼굴이 영화 '보통사람'(감독 김봉한)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보통사람' 개봉을 앞두고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장혁을 마주했다. 인터뷰 전날은 '보통사람'의 VIP 시사회가 있었던 날. 절친한 이들이 장혁을 응원하기 위해 총출동했고, 장혁 역시 자정을 넘어 새벽 3시에 이르기까지, 함께 한 이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며 담소를 나눴다. 전날 늦게까지 이어진 일정 속 화장기 없는 수수한 민낯 차림이었지만, 가죽 재킷 하나만 걸쳐도 카리스마는 여전했다.
"사우나를 마치고 막 온 것 같다"고 말을 건네는 취재진에게 장혁은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최근 빠져 있는 복싱을 하며 얼굴에 끼는 저산소 마스크 때문에 자국이 났다는 이야기를 함께 털어놓았다. 복싱과 함께 하는, 또 세 아이를 둔 평범한 가장이자 남편으로 지내는 일상. 힘들어도 욕심이 나고, 자꾸만 끌리는 촬영 현장의 이야기까지, 농담을 던져 놓고 "재밌죠?"라고 스스럼없이 옆에 앉은 취재진을 쿡 찌르며 반응을 살피는 모습이 '보통사람'에서 보여준 냉혈한 최규남과는 180도 다르다.
인간미 넘치는 실제의 장혁, '보통사람' 속 최규남 모두 장혁이 가지고 있는, 또 그가 보여주고 있고 보여줄 얼굴들의 한 부분이다.
'보통사람'에서 장혁은 뼛속까지 냉혈한인 안기부 실장 규남 역으로 악역 도전에 나섰다. 영화가 공개된 후 "배역은 미워하되 배우는 미워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강조했던 그다.
그만큼 영화 속에서의 장혁에게는 감정을 찾아보기 어렵다. 장혁은 "감정을 가지고 갔던 부분은 두 신 밖에 없었어요. 나머지는 감정을 빼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죠. 해야 되는 말들에 대해서만 툭툭 던지는 느낌으로 갔어요"라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보통사람'이 장혁의 관심을 끌어당겼던 이유는 주인공과 대립하는 인물인 안타고니스트로 활약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장혁은 "색깔이 바래져 있고, 어긋나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인물로 표현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영화 '의뢰인'과 '순수의 시대'에서 안타고니스트를 해봤지만, '보통사람'은 전혀 해 보지 않았던, 또 다른 느낌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배우로서 만들어가는 것도 흥미 있겠다 싶었죠"라며 최규남으로 지냈던 당시를 떠올렸다.
손현주와 함께 호흡을 맞출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장혁은 "(드라마 '타짜' 이후에) 손현주 형님과 같이 또 작품을 할 수 있다는 것에 큰 매력이 있었죠. 저희는 사석에서는 술도 많이 마시고 굉장히 친한데, 연기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없더라고요. '같이 영화를 해서 시간을 갖고 얘기한다면 즐겁지 않을까' 조율해보다가 함께 하게 됐어요. 최규남이라는 인물은 건조하게 툭툭, 느릿느릿 던진다고 생각했고 전체적인 스토리텔링과 대사들에서 나오는 울림들이 있잖아요. '그 안의 한 명으로 들어가서 같이 한다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라고 말을 이었다.
영화 속에는 듣는 이들의 마음을 울리는 촌철살인의 대사들이 등장한다. 규남과 대학 선후배 사이이자, 규남에게 고문을 받으면서 "좀 세련되게 해주지"라고 말하는 자유일보 기자 추재진 역의 김상호가 내뱉은 말을 가장 인상 깊은 대사로 꼽은 장혁은 "사실 나오면 안 되는 대사들 아닌가요. 안쓰러웠던 대사 중 하나는 '가만히 있으면 빨리 끝나' 이것도 그랬고요. 실제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입장이다 보니까, 혼자였을 때와 가족을 계속해서 보호하면서 가야 될 입장에서는 상황이 다르잖아요"라고 털어놓았다.
영화가 1987년의 시대를 얘기하고 있는 만큼,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들과 함께 언급되기도 하지만, 장혁은 "그 시대에 느꼈을 것 같은 감정을 영화로서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다"며 담담하게 마음을 토로했다.
시선은 다시 현실에서 연기를 하는 배우 장혁, 또 인간 정용준으로 돌아왔다. 장혁은 "제가 지금까지 맡았던 캐릭터들은 일상으로 시작해서 일상에서 탈피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내용들이었거든요. '고맙습니다'나 '타짜', '추노'도 그랬고요. 그렇지만 그 일상을 지킨다는 게, 쉬운 것 같지만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고, 평생 할 것 같은 것들이 멈추는 순간들이 올 것이고요"라고 담담하게 토로하며 복싱을 통해 연기 이야기를 함께 전했다.
"자꾸 복싱 이야기를 꺼내게 되네요"라고 웃어 보인 장혁은 "복싱을 하면 정말 너무 힘들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일상이 됐어요. 촬영하다가 며칠 못 하고 다시 와서 또 (몸을) 만들려고 하면 정말 힘들어요. 누군가의 일상이 다 똑같은 일상은 아닌 것 같아요. 그걸 지키기 위해서는 각자가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죠"라고 전했다.
평소에 거의 'FM'대로 생활한다고 전한 장혁은 "운동도 그런 면에서는 저는 중독인 것 같아요. 촬영장에도 운동 기구를 갖고 가니까요. 그건 배우하기 전부터 했던 것이거든요.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제 하나의 틀이죠"라고 말을 이었다.
"제 하루 일과가 집에 있다가 촬영이 없을 때는 10시 반이나 11시쯤에 (소속사) 사무실에 와요. 그럼 신문 사설을 보고 소리 내서 읽어보죠. 사설은 저마다 쓰는 사람이 다르고, 그 사람이 생각하는 기승전결도 다르잖아요. 대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거든요. '어떤 대사를 어떻게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가'가 배우가 해야 될 일이다 보니까, 독백 같은 느낌으로 연습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고 있어요. 그리고 운동을 가는 거죠.(웃음)"
취미로 시작한 복싱이지만, 그것을 통해 사람, 또 연기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고 얘기했다.
"복싱을 하다 보면 그 사람이 갖고 있는 큰 에너지가 보여요.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다 보면 반성하게 되거든요. 3분이라는 시간동안 라운드를 채우는데, 자기와의 싸움을 하는 거죠. 그렇게 스스로 계속 다듬어지는 거예요. 그런 느낌이 분명 있더라고요. 그렇게 연습해서 시합 날짜까지 가는 친구들을 보면 정말 존경스럽죠. 옆에서 보면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훈수를 두거든요. 근데 그 주먹을 앞에서 본다고 하면 잘 안 보여요. 사람들의 리액션도 보는 거죠. 그 안에 전략, 템포, 리듬이 다 있어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있을 것' 같은 것의 차이, 그걸 배울 수 있죠."
"연기로 봐도 마찬가지죠. 저 배우는 저 대사를 어떤 리듬감으로 하고 있을까. 어떤 감정을 갖고 있을까에 대한 것들을 생각하게 되면서, 그런 심리적인 것들이 연기적인 것에도 도움이 되고, 집중력과 끈기를 기르는데도 최고 인 것 같아요"라고 복싱에 이어진 연기 이야기를 덧붙인 장혁은 "그게 끝나면 사무실에 와서 작품도 읽고, 그러다가 집에 가면 애기들 좀 보다가 재우고, 저녁 시간에 맥주 한 두 캔 마시고 영화 보고. 그게 제 일상입니다"라며 환히 웃어보였다.
2001년 영화 '화산고'(감독 김태균)를 했던 기억을 떠올린 장혁은 "제가 그 때 배우들에게 주는 의자에 '열정·개척 장혁'이라고 써놨거든요"라고 호탕하게 웃으며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겠지' 해석을 크게 했는데, 확실히 시간과 경험, 체험이라는 것은 한 번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더라고요"라고 과거의 열정 가득했던 자신의 모습을 얘기했다.
시간이 흘렀고, 어느덧 장혁도 20년의 시간을 배우라는 이름으로 살아왔다.
"촬영 현장에 가서 다시 집에 가고 싶은 이유를 백가지 대라면 백가지 다 만들 수 있어요.(웃음) 하지만 캐릭터와 대사, 이런 것들에서 '내가 왜 이 현장에 있는지' 그것 하나를 찾는 다면 그걸로 버티는 것이거든요. 그게 설득력이 없어지면 내일 또 다른 것을 찾아나가는 것이고요. 그러다 보니 '내가 왜 현장에 가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더 많아졌어요. 또 촬영 현장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잖아요. 누굴 만날지 모르는 그런 상황 속에서 나름대로의 자기 색깔이 생기게 되죠. 복싱장을 가는 이유 중 하나도 그런 활력이 생긴다는 게 좋다는 것이거든요. 현장에서도, 그러다 보니 마인드도 자연스럽게 긍정적으로 변했죠."
"시간이 지나면서 아픔도 있을 것이고, 즐거움도 있을 거예요. 앞으로 남아있는 시간이 많으니까, 그렇게 다듬어지면서 배워가야죠"라고 말하는 장혁은 여전히 '배우가 돼 가는 과정'에 서 있는, 20년 전 열정 가득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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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진 기자 slowlife@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