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8.03.11 08:30 / 기사수정 2008.03.11 08:30
[엑스포츠뉴스=박형진 기자] 옛날 옛적에, 이상한 나라에 이상한 텔레비전이 있었습니다.
이 텔레비전은 누구나 볼 수 있게끔 기본 채널이 5개가 있습니다. 물론, 누구나는 아니고 약간의 시청료라는 것을 받지만요. 그러나 이 기본 채널로 스포츠 중계를 보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어려웠습니다. 왜냐고요? 주중에는 물론이고, 주말 오후에도 이 나라 사람들이 좋아라 하는 '드라마'를 계속 반복해서 틀어주기 때문이죠. 이 나라 사람들은 같은 드라마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는 것이 취미였나 봅니다. 물론, 옛날 옛적의 일이라 확인은 어렵지만요.
스포츠 중계에 목이 마른 사람은 무거운 '접시'라는 것을 달고, 한 달에 몇만 원에 달하는 돈을 내면서 '케이블'이라는 것을 설치해야 했습니다. 이 접시는 비록 무겁고 거추장스러우며 비싸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스포츠 중계를 보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모든 스포츠 중계를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이 나라 백성들의 불만은 사그라질 줄 몰랐습니다. 축구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축구가 야구에 밀려 중계를 안 한다고 불평했고,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섬나라 야구에 밀려 국내야구를 중계해주지 않는다고 불평했습니다. 중계를 해줄 때에도 대부분 인기가 많은 팀(주로 쓰리스타의 후원을 받는 팀들입니다)들의 경기를 중계해주는지라, 지방의 가난하고 인기없는 팀들의 경기를 텔레비전에서 보기란 그야말로 운하 속에서 진주 찾는 격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낭보가 들려왔습니다. E리그 개막 경기를 EBC 방송사에서 생방송으로 중계하기로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E리그는 이상한 나라의 축구 정규리그이며, EBC는 이상한 나라의 국영방송사입니다.)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보다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스포츠를 사랑하는 이 나라 백성들은 옹기종기 모여 경기를 지켜보았습니다. 이 날 경기는 지난 시즌 리그 우승팀 '철들었스'와 대표팀 감독을 배출한 컵대회 우승팀 '용써스'의 맞대결이었죠. 지난 시즌 컵대회에서 맞붙은 두 팀의 경기는 세계 정상급의 리그라는 평가를 듣는 먼 섬나라 '후라보노 리그'를 방불케 할 정도로 빠른 공수전환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경기였습니다. '철들었스'는 수비수 '샤이닝스톤(光石)'의 선제골로 앞서가는 듯했으나 '용써스' 역시 용병 공격수 '사이몬'의 개인기가 빛을 발하며 동점골을 넣었습니다. 1-1, 그야말로 팽팽한 긴장은 경기 막판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중계를 하던 캐스터가 움츠러든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정규방송 관계로 중계를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나라 스포츠팬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적수, '정규방송'이 등장한 것입니다. 중계를 하던 기술진은 얼른 중계진 이름을 담은 자막을 올려 보냈고, 경기가 후반 45분이 되지 않는대도 중계가 끝나버렸습니다. 텔레비전으로 중계를 지켜보던 이들에게 이 경기는 '열린 결말'을 가진, 미스테리한 경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실 이 경기는 경기 종료 직전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사우스궁도'의 결승골로 '철들었스'의 2-1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렇지만, 텔레비전으로 중계를 본 사람들에게 이 소식은 영원토록 전해지지 않았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방송사가 시청률을 신경 쓰는 것은 당연합니다. 더 많은 사람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것 역시 당연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같은' 프로그램을 '계속' 보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다양한 채널이 공존할 수 있는 이유이고, 지상파가 아닌 케이블 방송사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시청자들이 공영 방송사에 묵묵히 시청료를 내고, 그것도 모자라 케이블 방송을 보기 위해 월 몇만 원의 돈을 지불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방송사의 광고수입은 분명 소중한 재원이겠지만, 방송사가 엄청난 광고수입을 얻을 수 있는 이유는 그 광고를 보는 시청자가 있기 때문이고, 그 시청자가 광고를 보는 이유는 광고 뒤에 할 자신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시청료까지 낸 시청자가 광고수익이라는 논리에 밀려 자신이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볼 수 없다면, 시청자로서는 억울한 심정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일단 시작한 프로그램의 결말을 보여주지 않은 채 '정규방송'을 무기로 중계를 중단하는 것은 시청자를 우롱하는 짓입니다.
영화의 결말을 정규방송 관계로 방송하지 않는다면? 드라마의 마지막회를 방송사정으로 방송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충성심을 가지고 그 프로그램을 아끼고 시청하는 이들에 대한 배신입니다. 리그 연맹은 개막전 방송 중단을 '개막행사' 때문이라고 해명했지만, 개막행사로 미루어진 시간은 단 3분이었습니다. 또한,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정규방송'은 다름 아닌 별달리 새로운 소식이 없는 10분짜리 뉴스였습니다. 과연, 시청료를 내고 텔레비전을 보는 시청자의 입장을 한 번이라도 고려했다면 이와 같은 사태가 발생했을까요?
KBS1이 생중계한 K리그 개막전 외에도, 광주 MBC가 방송한 광주와 성남의 경기 역시 정규방송 관계로 중단되었습니다. 다행히 이 경기에는 남궁도의 결승골 같은 극적인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요. 광주와 성남의 경기 중계를 방해한 정규방송 역시 10분짜리 뉴스였습니다. 국가대표 경기라면 9시 뉴스도 한 시간씩 연기하면서, 새로운 소식도 없는 10분짜리 뉴스를 조정하지 못하는 방송사의 안이한 태도는 시청자의 비난을 받아 마땅합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개막전 경기가 지상파에서 중계한 유일한 K리그 경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물론, 챔피언결정전 정도는 다시 방송할 수도 있겠지만요. 평소에는 드라마 재방송에 밀려 케이블에서만 방송하고, 그나마 방송하는 빅매치는 정규방송 뉴스에 밀려 잘리는 이 안타까운 사연은 어디다 호소하면 될까요?
혹시, K리그를 사랑하면 경기장에 가서 보라는 방송사의 사려깊은 배려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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