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조희찬 기자] 1978년 5월 26일, 경기 양주에 위치한 로열컨트리클럽에 까무잡잡한 피부의 소녀들이 골프채를 들고 나타났다.
전국에서 모인 8명의 선수로 두 조를 꾸렸다. 남자 프로들이 모두 라운드에 나선 후 선발전이 열렸고, 2라운드 70대 타수를 유지하면 프로선수 자격이 주어졌다.
그리고 약 40년이 지난 2015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는 29개(LPGA 하나·외환 챔피언십, 국가대항전 제외) 대회, 총상금 184억원으로 명실상부 세계적인 투어로 자리매김했다. 한국 선수들은 해외에 나가 상금을 쓸어 담고 있다. 대부분 KLPGA의 육성 시스템을 거쳐 간 이들이다.
이 중심에는 1978년, 앳된 모습으로 프로 선발전에 나섰던 강춘자 現 KLPGA 부회장이 있다. 강춘자 부회장은 우리나라 1호 여자프로골퍼다.
-1970년대에 골프 여자 프로 1호다. 당시 어떻게 골프를 접했나.
"요새 아이들과는 조금 다르게 배웠다. 언니가 골프장에서 일했다. 원래 중학교 때 배구선수를 했고, 운동하는 걸 좋아했다. 배구공은 큰 공인데, 골프는 작은 그리고 죽어있는 공을 살리는 운동이다 보니 흥미로웠다. 스윙해서 공이 날아가는 쾌감도 짜릿했다.
-환경이 열악했을텐데.
"그렇다. 어려웠던 건 수없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용품이 정말 만만치 않았다. 당시에는 클럽을 구하기도 힘들었고, 골프샵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내가 연습할 때는 뚝섬 경마장 안에 있는 9홀 연습장에서 대여해주는 9개짜리 하프세트를 대여해 연습했다."
-프로선수 모집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나.
"그때는 정식으로 여자협회가 있어서 테스트한 게 아니다. 남자는 이미 대회가 있었고, 여자선수도 육성한다고 모집을 했다. 약 2년간 골프채를 잡았었는데, 어느 정도 실력이 쌓였을 때쯤, 골프장 프로님의 추천으로 대회에 나갔다."
-구체적인 진행 방식은.
"여자 선발전을 따로 치를 수 있는 환경이 안됐다. 그래서 남자 프로대회를 진행하는 곳에서 마지막 2조를 편성해 남자대회와 함께 진행했다. 선발 인원수가 정해진 것은 아니었고, 2개의 라운드를 거쳐 70대 타수를 유지하면 됐다. 그래서 내가 155타로 1등을 했고 여자프로번호 1번을 부여받았다. 한명희 프로와 구옥희 프로가 156타로 동률을 이뤘는데, 한명희 프로가 '백카운트(스코어가 같을 경우 후반 9홀 성적으로 순위를 매기는 방법)'에서 앞서 2등, 구옥희 프로가 3등, 안종현 프로가 4등이 됐다."
-그 후 프로생활은.
"국내대회에서 10승 정도 했다. 그리고 당시 구옥희 프로가 소속돼 있던 남서울CC에 일본 교포들이 많이 왔었다. 한창 일본여자투어가 활성화되고 있었는데, 구옥희 프로가 잘 치니까 교포 중 한 분이 성공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소개를 통해 초청선수 자격으로 일본무대에 진출했다. 당시 일본 선수들의 텃세가 있었지만, 이후 정식적으로 프로테스트를 통해 실력을 인정받고 1989년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1992년 일본 협회 탈퇴 이후 본격적으로 행정가 길을 걷기 시작했다."
-행정가로서의 시작도 순탄치 않았을텐데.
"1978년부터 1988년까지 남자 협회에서 여자부로 있었다. 이후 (19)88년에 사단법인으로 따로 분리됐다. 김성희 회장이 여자 프로들을 이끌고 협회를 차렸는데, 당시 남자 대회 끝 조로 경기를 치를 정도로 상황이 열악했다. 남자대회 상금을 쪼개서 나눠 가지기도 했다. 본격적인 성장은 남자 협회에서 세관 살이 비를 얻어 국제 대회를 개최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조희찬 기자 etwoods@xportsnews.com
[사진=강춘자 부회장 ⓒ 권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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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찬 기자 etwoods@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