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조영준 기자] 선수 생명력이 짧은 피겨 스케이팅의 특징을 생각할 때 선수들의 도달하는 최고 정점은 오래가지 않을 경우가 많다. 4년 만에 세계선수권대회 정상 자리를 탈환한 김연아(23)의 경우 지난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때 선보인 기량은 재현되기 힘들 것으로 여겨졌다.
지난 17일(이하 한국시간) 국제빙상경기연맹(ISU) 피겨 스케이팅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 출전한 김연아는 148.34점의 점수를 받았다. 가산점(GOE)만 16.51점이었다. 이 점수는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세운 역대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 세계 기록인 150.06점에 1.72점 부족한 점수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가산점이 100% 주어졌지만 이번 대회는 새 규정으로 인해 가산점이 80%만 매겨진다. 또한 프리스케이팅에서는 스파이럴 시퀀스(기초점수 3.40)가 빠졌기 때문에 기초 점수도 밴쿠버 때와 비교해 낮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김연아가 클린한 '레미제라블'을 밴쿠버 동계올림픽 당시의 채점 기준으로 매겼다면 155(스파이럴 시퀀스 3.40점 + 4점<가산점 20%>=7.40)점이 넘는 점수가 나온다. 점프의 비거리는 여전했고 표현력이 깊이도 물이 오른 상태였다.
이번 대회에서 김연아가 연기한 '레미제라블'을 두 번 정도 봤을 때는 밴쿠버 동계올림픽과 비교해 떨어지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세 번, 네 번 계속 반복해서 보자 생각이 달라졌다.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루프 콤비네이션 점프를 비롯한 모든 점프들을 예전보다 쉽게 뛰고 있었다. 또한 몇몇 점프의 높이와 비거리는 오히려 나아보였다.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갈 때는 열정과 동시에 '초조함'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목표를 이루고 난 뒤 김연아의 '여유'는 긍정적인 쪽으로 발전했다. 어느 순간에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았고 무서우리만치 냉철하게 연기를 소화하는 모습은 밴쿠버 때와 비교해 우월해 보였다. 김연아는 전성기 때와 비교해 녹슨 것이 아니라 여전히 진화하고 있었다. 정말 끝이 보이지 않는 스케이터였다.
점프를 비롯한 기술적인 부분
경기를 마친 김연아는 "연습 때 실수를 하지 않았고 경기에서도 실수를 하지 않았다. 점프가 오히려 편해졌다"고 말했다. 본인 스스로 밝혔듯이 어려운 점프를 너무도 쉽게 구사하고 있었다.
타 선수와 비교해 김연아가 뛰는 점프는 레벨이 다르다. 남자 선수에 버금가는 비거리와 높이도 그렇지만 그의 점프는 언제나 따로 놀지 않는다. 그의 점프는 항상 음악에 맞춰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안무와 스텝과 함께 이루어진다.
실제로 김연아는 이번 대회를 앞두고 서울 공릉동 태릉실내아이스링크에서 훈련을 할 때 '뱀파이어의 키스'와 '레미제라블'을 완벽하게 소화할 때가 많았다.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점프 구성과 나날이 발전하는 안무와 스텝을 프로그램에 적절하게 배치했기 때문이다.
프리스케이팅에서 김연아의 점프는 모두 높은 가산점을 받았다. 첫 점프인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루프와 다음 과제인 트리플 플립은 모두 1.90점의 높은 가산점(GOE)을 받았다. 단독 트리플 러츠는 1.80점을 받았고 단독 트리플 살코와 트리플 살코+더블 토루프는 각각 1.40점과 1.30점을 받았다.
이러한 가산점은 올해 초 국내에서 열린 '제67회 전국종합선수권대회'에서 받은 가산점보다 더욱 높았다. 당시 일본 언론을 비롯한 몇몇 매체는 '국내에서 열린 대회라 점수를 퍼 받았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연아는 이러한 비판을 최고의 무대인 세계선수권대회를 통해 말끔히 씻어버렸다. 이번 대회에 모든 초점을 맞춘 김연아는 전국종합선수권대회에서 '레미제라블'을 클린한 경험을 십분 활용했다.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루프 콤비네이션 점프와 트리플 플립 그리고 트리플 살코는 전국종합선수권대회 때보다 한결 가벼웠다. 대회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레미제라블'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 김연아는 3년 전보다 더욱 가볍게 점프를 구사했다. 이러한 증거는 2점에 가까운 가산점으로 증명됐다. 김연아가 프리스케이팅에서 가산점으로만 챙긴 점수는 무려 16.51점이다. 그가 아니면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점수였다. 그리고 예전과 비교해 쉽게 점프를 뛰었듯 실패율은 0%를 기록했다.
안무 소화를 비롯한 예술적인 부분
15일 열린 쇼트프로그램에서 김연아는 박한 프로그램 구성요소(PCS)점수를 받았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 국내는 물론 해외 언론은 일제히 의문을 제시했다.
김연아는 쇼트프로그램의 결과에 자칫 흔들릴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프리스케이팅에만 집중한 그는 쇼트프로그램의 서운함을 극복해냈다. 김연아가 '레미제라블' 연기를 펼치면서 받은 프로그램 구성요소 점수는 73.61점이다. 밴쿠버에서 자신이 세운 여자 싱글 역대 컴포넌트 점수 최고치인 71.76점을 가뿐하게 넘었다.
3명의 심판은 항목별 요소에서 만점인 10점을 매겼고 대부분 9점 이상의 점수를 받았다. 스케이팅 스킬과 트랜지션 그리고 안무 소화력과 이해도 등 모든 부분에서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0대 초반 기술적으로 모든 것을 완성한 김연아는 트리플 악셀 같은 고난도 기술 대신 컴포넌트 점수를 많이 받기 위해 집중했다.
사실 김연아가 예술 점수에서 이 정도의 경지에 오른 것은 많은 땀을 쏟았기 때문이다. 캐나다로 날아가 안무가인 데이비드 윌슨의 충고를 귀담아 들으면서 표현력에 눈을 떴다. 그리고 스케이팅과 프로그램 이해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교과서적인 점프를 이미 갖추고 있었던 그는 컴포넌트 점수까지 정복하면서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거듭났다.
피겨 스케이팅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중요하게 여긴 '마인드'가 오늘 날의 김연아를 완성시켰다. 특히 나이가 들면서 프로그램을 소화하는 노련미가 더욱 발전했다. 어려운 기술을 구사하면서 프로그램이 가진 장점을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는 훈련만으로는 부족하다. 김연아의 예술성과 표현력 그리고 스케이팅은 오랫동안 스케이트를 타면서 스스로 터득한 '경험'이 녹아있었다.
점프는 여전히 정확했고 비거리와 높이는 그대로였다. 이러한 감각을 유지한 김연아는 한결 가볍게 뛰는 방법까지 습득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스케이트를 타면서 축적한 노련함은 성숙한 표현력으로 승화됐다.
끝을 알 수 없는 김연아는 여전히 발전 중이다. 이러한 흐름은 내년 2월에 열리는 소치 동계올림픽까지 이어진다. 미국 공중파 방송인 NBCTV의 피겨 해설가인 트레이시 윌슨은 "완전히 새로운 수준이었다. 그녀(김연아)의 경쟁자는 언제나 그녀 자신이다. 소치동계올림픽에서 또 하나의 금메달을 획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윌슨의 말대로 이번 대회 우승을 통해 올림픽 2연패의 가능성을 한층 높였다. 지금의 상승 곡선이 내년 2월 러시아 소치까지 이어진다면 카타리나 비트(독일) 이후 26년 만에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할 가능성은 매우 크다.
20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한 김연아는 자신의 마지막 무대가 될 소치올림픽에 대한 견해를 털어놓았다. 김연아는 "다음 시즌은 선수로서 마지막 시즌이니 매 대회마다 최선을 다하겠다. 경기 끝나고 점수 나올 때 까지 아무도 결과는 알 수 없다. 소치에선 행복하게 마무리 하고 싶다"고 밝혔다.
지난해 7월 현역 복귀를 선언한 김연아는 자신의 은퇴 무대는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세계선수권대회가 끝난 현재 김연아는 벌써부터 차기 시즌 준비에 들어갔다. 캐나다에서 안무가인 데이비드 윌슨과 올림픽 시즌에 사용할 곡을 선정하기 위해 의논을 했다.
김연아의 새로운 프로그램은 2013~2014 시니어 시즌이 시작되기 전인 올 여름에 발표될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선수권대회를 마친 김연아는 짧은 휴식을 취한 뒤 오는 5~6월 달에 열리는 아이스쇼 준비를 할 예정이다. 그리고 올 여름부터는 본격적으로 올림픽 시즌을 위한 달금질에 들어간다.
[사진 = 김연아 (C) 엑스포츠뉴스DB]
조영준 기자 spacewalker@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