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윤인섭 기자] 지난 9월 27일 오전(이하 한국시각), 칠레 산티아고 국립경기장에서 우니베르시닷 데 칠레(이하 데 칠레)와 CD 팔레스티노(이하 팔레스티노)간의 칠레 1부리그 25라운드 경기가 열렸다.
데 칠레는 콜로콜로, 우니베르시닷 카톨리카와 칠레 3대 명문을 형성하는 팀으로 올해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남미 최고 권위의 클럽 선수권) 4강에 진출한 강호이다. 우루과이 대표팀 수비수로 남아공 월드컵 한국전에 출전했던 마우리씨오 빅토리노, 칠레 대표 미겔 핀토, 마누엘 이투라 등 칠레에서 가장 화려한 스쿼드를 구축했고 현재 콜로콜로에 이어 칠레 리그 2위를 달리고 있다.
경기가 데 칠레의 홈에서 열린 탓에, 많은 이들이 의심의 여지없이 데 칠레의 낙승을 예견했다. 그러나 경기는 예상과 반대로 흘러갔다. 팔레스티노는 무서운 공세로 데 칠레를 공략했고 전반에만 두 골을 득점하며 데 칠레에 2-1로 승리했다. 리그 12위 팀이 ‘3강’의 홈에서 거둔 대이변이었다.
비록, 지금은 팔레스티노의 승리가 ‘대이변’이란 단어로 장식되고 있지만, 과거 어느 한때에는 팔레스티노에도 이런 승리가 당연한 시절이 있었다. 그들 역시 칠레 축구에서 1부리그를 두 번 우승한 경력(1955, 1978)이 있고 지난 2008년 후기리그에서는 콜로콜로에 이어 아쉽게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칠레의 유럽파를 대표하는 루이스 히메네스(현 체세나, 전 인테르 밀란, 웨스트 햄 등), 하이메 발데스(현 스포르팅 CP, 전 레체, 바리 등), 2007년 울산 현대에서 ‘호세’란 이름으로 활약했던 호세 루이스 비야누에바(현 톈진 테다)등이 선수 생활을 팔레스티노에서 시작했고, 1990년대 칠레의 대표적 미드필더 클라렌스 아쿠냐 등 다수의 칠레 대표 선수들이 팔레스티노를 거쳐 갔다.
그런데 특이할 만한 사실은 바로 '팔레스티노'라는 클럽의 이름이 있다. 스페인 어에서 '팔레스티노'는 다름 아닌 '팔레스타인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왜 하필, 라틴 아메리카와 어울리지 않는 '중동적'인 단어를 클럽 이름에 차용했을까?
1. 칠레의 팔레스타인 이민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라틴 아메리카와 중동은 그렇게 연관성이 없는 지역이 아니다. 멕시코의 대표적인 여배우 셀마 하이엑과 콜롬비아의 여가수 샤키라는 레바논 이민자의 후손이고 아르헨티나 전 대통령 카를로스 메넴은 시리아 혈통이다.
축구적인 면만 봐도 브라질의 전설적 감독 마리우 자갈루(레바논계), 아르헨티나 대표로 한일 월드컵에 참가한 클라우디오 우사인(레바논-시리아)등 적지 않은 아랍 혈통의 선수들이 라틴 아메리카의 그라운드에서 활약했다.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 걸쳐 약 750만 명이 아랍 혈통의 후예로 추산되는 가운데, 이들 아랍 이민의 가장 대표적인 사회 기구가 바로 칠레의 축구 구단, 클럽 데포르티보 팔레스티노이다. ‘팔레스티노’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클럽은 팔레스타인의 이민자들에 의해 창립되었고 칠레의 50만 팔레스타인 계(칠레 인구의 3%)를 하나로 결집하는 데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
다른 라틴 아메리카의 아랍계 이민처럼, 팔레스타인의 칠레 이민도 대부분 20세기 초에 진행되었다. 특히 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던 1910년대를 전후에서 그 흐름이 집중됐다. 그것은 이들 팔레스타인 이민자들이 중동에서는 소수에 속하던 기독교들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오스만튀르크 제국 치하에 있던 팔레스타인에서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기독교들에 대한 탄압이 심해졌다. 이들이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연합국 측에 서서 오스만 제국을 배신할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했기 때문이다.
결국, 오스만 제국의 경제적, 사회적 압박에 굴복한 이들은 삶의 지속을 위해 조상 대대로 살던 자신들의 터전을 버려야만 했다. 그러나 당시 유럽 지역이 전쟁의 포화로 얼룩진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은 대서양을 횡단하는 것뿐이었다. 팔레스타인을 비롯해 레바논, 시리아 등지에서 수많은 이민의 물결이 라틴 아메리카를 향했고 이들은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칠레 등 아메리카 대륙 전역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그 중 팔레스타인 지역의 사람들이 주로 당도한 공간은 칠레였다. 칠레의 남부가 아닌 이상, 칠레의 환경은 팔레스타인의 건조한 기후와 상당히 유사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주로 산티아고의 상업 지구에 터전을 마련하고 이후 빠른 속도로 칠레의 중산층으로 성장해갔다.
2. 칠레의 팔레스타인, CD 팔레스티노
CD 팔레스티노는 1920년, 칠레 남부의 오소르노라는 소도시에서 팔레스타인 이민자들에 의해 창립되었다. 당시 오소르노는 칠레의 팔레스타인 이민 사회 주류에서 벗어나 있었는데 오히려 이점이 오소르노의 팔레스타인 이민자들에 결속력의 강화를 불러 일으켰다.
초창기, 팔레스타인 이민자들의 친목회 성격으로 출발한 팔레스티노는 팔레스타인 이민자들이 경제적으로 성장해나감에 따라 1952년, 프로팀으로 전환해 칠레 2부리그에 발을 들어놓았다. 또한, 프로팀으로 전환함과 동시에 非아랍 혈통의 선수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그러나 이해부터 팔레스타인의 국기를 형상화한 녹색, 흰색, 붉은색 줄무늬의 상의에 검은색 하의로 된 유니폼을 사용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팔레스타인의 정체성을 강화시키기도 했다.
칠레 축구계에서 팔레스티노의 출발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리그 참여 첫 해에 2부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곧장 1부 리그에 진출했고, 그것도 모자라 1부 리그 데뷔를 준우승으로 장식하며 칠레 축구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팔레스티노는 1955년 칠레 1부리그를 우승하며 1부리그 승격 3년, 리그 참여 4년 만에 칠레 축구의 최정상에 오르는 놀라운 성과를 거둔다.
그러나 팔레스티노는 칠레 정상권에서 오랜 기간 머물지 못했다. 1957년 시즌을 3위로 마무리 한 이후, 팔레스티노는 리그 중하위권 팀으로 전력이 떨어졌고 1960년대 들어선 여러 차례 강등 위기를 맞는 1부 리그의 하위권 팀으로 전락했다. 결국, 1970년, 플레이오프까지 겪는 사투 끝에 팔레스티노는 2부 리그로의 강등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팔레스티노는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다. 1972년, 2부 리그 우승을 검어지며 2년 만에 1부리그의 복귀를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일어난 팔레스티노는 곧바로 클럽의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1974년, 승격 2년 만에 1부리그 준우승을 차지한 팔레스티노는 다시금 강자의 면모를 되찾았다. 1975년과 76년, 연달아 리그 5위를 차지했고 1978년에는 3위에 오르며 꾸준히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다. 그리고 1978년, 팔레스티노는 23년 만의 칠레 정상 복귀에 성공하며 극적인 부활에 마침표를 찍는다. 그뿐만 아니라 이듬해 참가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1979 대회에서 6위에 오르며 자신들의 존재를 남미 전역에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팔레스티노는 1980년대에 다시 암흑기를 맞이한다. 지난 성공에 맞들려 유망주를 발굴하는 데 소홀했고, 콜로콜로, 카톨리카 같은 명문팀들이 팀을 재정비하며 더는 팔레스티노가 1부리그 정상권에 발 디딜 틈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후 팔레스티노는 1986년, 1부 리그 준우승을 거둔 이후 1989년에는 2부리그로 강등되는 아픔을 겪는다. 그러나 자신들이 2부리그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듯, 1시즌 만에 1부리그 복귀를 이뤘고 이후, 20여 년간 칠레 1부리그에 잔류하며 칠레 축구의 대표적인 중견클럽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지난 2008년 후기리그에서는 여러 강팀을 물리치고 준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3. 팔레스티노, 칠레와 팔레스타인을 잇다.
팔레스티노는 루이스 히메네스, 엘리아스 피게로아(1960-70년대 칠레 대표로 3차례 월드컵에 참가), 하이메 발데스, 호세 루이스 비야누에바 등 다수의 칠레 대표를 배출해냈다. 그러나 팔레스티노는 단지, 칠레의 대표 선수만 발굴한 것이 아니다.
지난 2002년, 팔레스타인 감독으로 팔레스타인계 칠레인 니콜라 쇼완이 부임했고 쇼완은 당시 팔레스티노에서 뛰던 세 명의 팔레스타인계 선수를 팔레스타인 대표로 소집했다. 수비수 로베르토 비샤라, 미드필더 로베르토 케틀룬, 에드가르도 압달라가 그들이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대표팀에 합류하자마자 팀의 주축으로 거듭났고, 이들의 활약으로 팔레스타인은 아랍 네이션스컵에서 요르단, 쿠웨이트 등과 비기는 선전을 거듭했다. 비록, 팔레스타인의 전력 탓에 아시아의 메이저 대회에 발을 들여놓진 못했지만, 팔레스타인은 AFC 가입 10년도 안 되어 아시아 축구의 중진국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비샤라는 여전히 팔레스티노에서 활약하고 있고 팔레스타인 대표로 25경기를 출전 중이다. 케틀룬은 이후, 그리스 무대를 거쳐 이탈리아 하부리그 산테지디에세에서 활약 중이다. 팔레스타인 대표로 20경기에 나서 3골을 기록했다. 압달라는 현재, 칠레 1부리그 우아치파토에서 활약하고 있고, 팔레스타인 대표로 19경기에 나서 1골을 기록했다.
팔레스타인 대표팀에는 이들 이외에도 파블로 압달라, 알레한드로 나이프(이상 아르헨티나 출신), 에르난 마드리드(칠레 출신) 등이 활약한 바 있다.
또한, 팔레스타인계로서 칠레 대표팀에서 활약한 선수로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했던 루이스 무스리, 1991년생으로 칠레 대표팀의 미래로 손꼽히는 야시르 핀토, 전 콜로콜로 공격수 다우드 가살레 등이 있다.
[사진:데 칠레를 꺾은 팔레스티노, 팔레스티노 엠블럼, 로베르토 비샤라(C) 칠레 축구협회 홈페이지, 풋볼 팔레스타인.com]
윤인섭 기자 press@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