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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준의 리듬체조 일루션 특집] 첫 국가대표 김지영에서 손연재까지 - 상

기사입력 2009.10.08 17:14 / 기사수정 2009.10.08 17:14

조영준 기자



[엑스포츠뉴스=조영준 기자] 1984년, 국내에서 활약한 몇몇 기계 체조 선수들은 각종 도구를 가지고 나와 새로운 연기를 선보였다. 매트와 평균대, 그리고 도마와 이단 평행봉이 아닌, 매트 위에서 펼쳐지는 향연은 매우 독특했다.

리본과 곤봉, 그리고 볼과 후프 등을 들고 나온 선수들은 기구를 이용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리듬체조'라 불린 이 종목의 국내대회가 처음 개최된 연도가 1984년도였다. 70년대 후반부터 국내에 도입된 리듬체조는 꾸준하게 발표회를 열면서 대중들에게 다가갔다.

리듬체조라는 존재를 막 알려가던 무렵인 초창기 시절, 수구(리듬체조에서 쓰이는 각종 기구)를 들고 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모두 기계 체조 출신들이었다. 리듬체조 지도자들은 매트와 이단 평행봉, 그리고 평균대 위에서 아슬아슬한 연기를 펼친 선수들 중, 리듬체조에 적합한 선수들을 골라 리듬체조 선수로 탈바꿈시켰다. 또한, 리듬체조의 매력에 빠져 종목을 바꾼 선수들도 많았다.

국내 리듬체조 '1세대' 선수였던 서혜정(47, 대한체조협회 리듬체조 경기위원회 부위원장, 국제심판)과 김지영(45, 전 국가대표, 대한체조협회 리듬체조 기술위원회 위원장, 국제심판)은 모두 기계 체조 선수 출신이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전통적인 기계 체조에 전념했던 이들은 리듬체조를 처음 접한 뒤,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초창기에는 처음부터 리듬체조로 시작한 선수가 존재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기계 체조 선수들 중, 리듬체조와 적합한 선수를 발굴해 키우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었죠. 저 같은 경우는 모든 운동의 근본을 이루는 체조를 하다 보니 처음에는 리듬체조가 쉬웠어요. 수구만 잘 다루면 만사가 해결되는 것처럼 보였죠. 하지만, 깊게 들어가니 리듬체조도 결코 쉬운 종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리듬체조의 시작은 기계 체조의 역사에서 태동했습니다"

- 서혜정 부위원장

"저는 고등학교 때까지 기계 체조 선수였어요.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기계 체조를 할 줄 알았는데 리듬체조를 접하고 마음이 변했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세종대학교 선배들이 리듬체조 발표회를 하는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했죠. 매트 위에서 수구를 가지고 펼치는 연기가 너무 멋있게 보여서 리듬체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결국, 리듬체조를 하는 세종대로 진학하게 됐고 오늘까지 오게 됐습니다"

- 김지영 위원장

수구를 들고 매트 위에서 다양한 몸짓으로 표현해내는 리듬체조는 매우 신선했다. 기계 체조도 좋았지만 '맞춤옷'같이 몸에 맞았던 리듬체조에 푹 빠져 살았다고 이들은 회고했다.

특히, 리듬체조 선수들의 큰 체형이 눈에 들어왔다. 키가 자라지 않는 기계 체조에 비해, 리듬체조 선수들은 모두 긴 체형을 지니고 있었다. 몸을 활짝 펴고 크게 움직이는 리듬체조는 큰 체형을 만드는데 적합한 운동이었다.

대학 내내, 리듬체조에 푹 빠져 살았던 김지영 위원장은 대회에도 출전하게 됐다. 미국에서 건너온 촉망받는 리듬체조 선수였던 홍성희와 함께 1984년 LA 올림픽 프레올림픽 대회에 참가하게 됐다.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참가했어요. 한국 리듬체조 자체가 겨우 걸음마를 하는 단계였으니까 성적은 하위권에 머물렀죠. 하지만, 국내에서 처음으로 국제대회에 참가한 경험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었습니다"

- 김지영 위원장



1983년, 미국 LA에서 열린 프레올림픽에 참가한 홍성희와 박정숙, 그리고 김지영은 한국 최초의 리듬체조 국가대표였다. 이 선수들을 조련시키고 한국에 리듬체조를 처음으로 도입해 대중화시킨 선구자는 이덕분(세종대 체육학과) 교수였다.

"한국 리듬체조가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가장 헌신하신 분이 이덕분 교수님이셨어요. 유럽을 돌아다니시면서 리듬체조를 접하신 교수님은 이 종목을 국내에 들여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죠. 제가 선수로 뛸 때, 작품을 다 짜주시고 선수들을 관리해 주신 분도 이 교수님이셨습니다"

- 김지영 위원장

리듬체조 세계선수권대회는 196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1회 대회가 시작됐다. 세계선수권대회는 일찍부터 시작됐지만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 것은 훨씬 뒤였다. 1984년 LA 올림픽부터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리듬체조는 비로소 올림픽 무대에 공개됐다.

하지만, 구 소비에트연방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와 공산국가들이 대거 불참했던 LA 올림픽은 '반쪽 대회'였다. 리듬체조의 진정한 경쟁의 장은 1988년 서울올림픽부터 시작됐다.

당시 한국 리듬체조의 '1인자'였던 홍성희를 비롯한 국가대표는 올림픽 예선을 통과하며 처음으로 올림픽 티켓을 따냈다. 자국에서 벌어지는 올림픽이었지만 예선전을 거쳐 올림픽 티켓을 땄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었다.

"86년에 졸업을 하면서 은퇴를 하고 곧바로 코치로 일했어요. 88년도에는 대표팀 코치로 활약했죠. 서울올림픽은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올림픽이었지만 주최국이라고 해서 출전할 수 있는 건 아니었어요. 서울올림픽 출전은 본격적인 리듬체조 역사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이룬 쾌거였습니다"

- 김지영 위원장

김지영 위원장은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도 대표팀 코치로 선수들을 이끌었다. 당시 국가대표 선수였던 김유경과 윤병희는 91년도에 벌어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올림픽 출전을 확정지었다.

김유경과 윤병희는 여러모로 한국리듬체조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선수들이었다. 이들은 기계 체조 출신이 아닌, 순수 리듬체조 선수들이었다.

"88년 서울올림픽에 참가한 홍성희 선수와 김인화 선수는 모두 기계 체조 출신 선수였습니다. 그러나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참가한 김유경과 윤병희 선수는 순수한 리듬체조 선수였죠. 어릴 때부터 리듬체조를 배운 1세대 선수들이 바로 이들이었어요"

- 서혜정 부위원장

그러나 바르셀로나 올림픽 이후, 한국 리듬체조는 기나긴 침체기에 빠진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 신수지(18, 세종대)가 출전하고 손연재(15, 광장중)라는 최고의 유망주가 등장하기까지 무려 16년의 시간이 소요됐다.

- 한국리듬체조가 걸어온 길 - 김지영에서 손연재까지 (하)편이 계속 이어집니다.




[사진 = 김지영, 서혜정, 이경화 (C) 엑스포츠뉴스 조영준 기자]



조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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