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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축구스타 - 3편] ’김병수’

기사입력 2005.09.20 09:42 / 기사수정 2005.09.20 09:42

손병하 기자
'축구 천재' 김병수, 그를 기억하십니까?

1992년 1월. 한국 축구는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 본선 진출과 관련한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으로 시끄러웠다.

지난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개최국 자동진출권으로 본선에 참가하긴 했었지만 자력 진출은 1964년 도쿄 올림픽 이후 28년 만에 도전이었고, 처음 출전했던 1948년 런던 올림픽을 포함한 네 번째 본선행 도전이었다.

지금은 월드컵 6회 연속 진출과 각종 세계 유명 클럽과의 친선전과 인터넷과 미디어의 발달로 세계 정상권에 있는 각종 축구 쇼를 볼 기회가 많아, 올림픽에서의 축구를 그다지 큰 이벤트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지만, 10 여년 전만 해도 세계 축구를 경험할 수 있는 올림픽은 선수들에게나 우리 축구팬들에게나 매력적인 대회였다.

지금에야 한국 축구를 포함한 일본, 이란, 사우디 등 아시아 주요 국가들의 축구 수준이 세계 정상급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서브 정도의 수준에는 도달했지만, 당시엔 아시아 한국과 일본을 포함하더라도 세계 축구의 수준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또, 당시 출범한 일본의 J-리그를 비롯 우리네 K-리그도 미미한 수준에 그쳐 유럽 및 남미의 명문팀과의 대결조차 성립되기 어려웠었다. 막강한 오일 달러로 리그를 운영하던 중동에도 역사와 전통이 짧아 '큰 물'맛을 보긴 힘들었다. 그러한 우리에게 올림픽 축구 대회란, 세계무대에 명함을 내밀고 그들과 실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좋은 기회였던 것이었다.

92년 1월, 김병수의 화려한 비상

92년 1월에도 그러한 올림픽 최종예선으로 한국은 뜨겁게 달아 올라있었고, 28년 만에 자력 진출과 2회 연속 본선 진출 외에도 '김병수'라는 이름 석 자의 등장에 축구팬들은 흥분과 기대를 감출 수 없었다.

최종예선 3차전까지,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에 각각 1무 1승 1패를 거두며 승점 4점을 획득한 한국은 4차전에서 복병 일본과 만나게 되었다. 비겨도 본선 진출이 좌절될 뿐 아니라, 국민 정서를 비추어 봤을 때도 일본 전에서의 패배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꼭 승점 3점이 필요한 상황 이였다.

당시 한국과 일본 축구의 기량 차이는 거의 5~6년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92년 출범한 J-리그를 기반으로 100년 대계를 실행해 나가던 일본 축구가 급속도로 성장하긴 했지만, 1990년대 초만 하더라도 한국과 일본의 수준차는 확연했고 분명했다.

하지만, 예선 3차전에서 한국이 1-0으로 힘겹게 이긴 바레인을 대파한 일본이 한국을 골 득-실 차로 앞서게 되었다. 일본은 비기기만 해도 본선 진출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한국으로서는 반드시 이겨야 할 경기였다.

운명의 4차전. 조진호, 김병수, 서정원, 김도근, 나승화 등이 주축이 된 한국 올림픽 대표팀은 일본 문전을 향해 쉴 새 없는 공격을 퍼부었지만, 애초부터 비기기 작전을 들고 나온 일본의 밀집수비는 좀처럼 뚫어내기 어려웠다.

사실 앞서 열렸던 바레인과의 경기에서 일본이 바레인에 모종의 로비를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일본은 바레인과의 경기로 인해 한국에 골 득-실 차에 앞설 수 있었고, 한국을 이기는 무리수를 두느니 비기기 작전이라도 써서 올림픽 본선행을 이룰 작정이었다.

경기 종료 시각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고, 28년 만의 올림픽 자력 진출의 꿈은 무산되는 듯했다. 하나 둘 경기를 포기할 때쯤 왼쪽 측면에서 조진호의 날카로운 크로싱이 올라왔고, 문전을 파고들던 김병수가 쓰러지듯 왼발로 정확히 공을 맞추며 굳게 잡겨있던 일본의 골문을 열어 제쳤다. 본선 진출의 불씨를 살리는 기적 같은 결승골이었다.

'비운의 천재'로 아직도 많은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김병수 선수의 기억이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는 경기 중 하나이다.

공격수 황선홍, 수비수 홍명보와 함께 향후 한국 축구의 10년을 이끌 미드필더로 손꼽히며 '천재' 소리를 달고 살았던 김병수는 성적위주의 학원 축구 시스템이 낳은 최대의 피해자이자,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큰 손실 중 하나였다.

한국 축구가 만든 '비운의 천재'

▲ 김병수 코치
ⓒ2005 포항 스틸러스
김병수의 천재성은 대단했다. 단순히 골을 많이 넣고, 좋은 패스를 선보이고 팀을 승리로 이끄는 그러한 천재가 아니었다. 김병수의 플레이는 스페인의 축구 영웅인 알프레도 디 스테파뇨나, 네덜란드 토털사커의 창시자인 요한 크루이프를 연상케 할 정도로 경기 내에서 시의 적절하게 구사되었다.

패스와 슈팅의 타이밍이 귀신같이 정확했을 뿐 아니라, 순간순간 바뀌는 경기의 전체적인 흐름을 금세 소화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능력은 물론이고, 그러한 흐름을 자신과 팀쪽으로 돌려내는 능력까지 갖춘 실로 대단한 플레이어였다. 바로, '축구를 가장 잘 알고 공을 차는 선수'라는 느낌을 가져다준 선수가 김병수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던 김병수는 축구 명문인 경신 중-고교를 거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축구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1988년 청소년대표팀으로 발탁되면서 더욱 많은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는데, 이때부터 이미 '경기의 흐름을 자신에게 맞추는 대단한 선수'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승승장구하였다.

이회택, 차범근, 최순호 등 훌륭한 공격수들을 배출하긴 했지만, 그동안 중원을 장악하고 경기를 풀어갈 게임메이커에 목말랐던 한국 축구로서는 보물 같은 존재였고, 한국 축구의 미래였던 것이었다.

그의 경기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던 이회택, 크라머(올림픽대표 총감독) 같은 당시 국가대표 감독들도, 김병수의 플레이를 단 한 번만 보고 반해버렸다고 하니, 그의 능력이 얼마만큼 이었는지 대강 짐작되고도 남는다. 특히, 크라머 전 감독은 '축구 인생 50년 만에 만난 천재다.'라며 김병수의 경기력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천재성은 한국의 학원 축구 시스템에 휘말려 한없이 희생되어 갔고, 김병수를 키우고 아끼기 위한 노력 없이 그의 재능과 능력을 빌리려는 무책임한 행위로 김병수를 망가뜨렸다. 결국, 이러한 한국 축구가 그를 비운의 선수로 전락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김병수는 무리한 경기 출장으로 고교 2학년 때 처음 부상을 당했었다. 하지만, 부상을 치료할 겨를도 없이 그는 '중요한 경기'라는 미명 아래 무리한 출장에 출장을 거듭했었고, 오른발을 쓸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서도 등을 떠밀려 경기장에 나서야 했다.

고등학교 때 치료하지 않은 부상은 그가 고려대에 진학한 뒤에도 줄 곳 그의 뒤를 따라 다니며 괴롭혔고, 그나마 부상으로 신음하던 대학 시절에도 김병수가 소화했던 4경기 중 3경기가 고,연-연,고 정기전이었으니, 그가 얼마만큼 혹사당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부상 치료와 재활에 걸리는 시간이 1년가량 예상 되었었는데, 김병수가 속했던 학교들은 천재에게 그러한 여유를 주는 것을 외면한 채, 당장 눈앞에 떨어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아낌없이(?) 휘둘렀던 것이었다. 0.6cm면 중상 이라는 발목 인대가 오른쪽 1.0cm 왼쪽 0.9cm가 늘어난 김병수의 발목은 더 이상 축구 선수로서의 모든 생명이 끝나버렸다.

1990년 전 포항 스틸러스의 감독을 역임했었던 최순호 감독의 배려로 경찰병원에서 수술을 했지만, 한 번 망가진 발목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그 뒤에도 김병수는 재활이 완료되기도 전에 경기에 나서고 또 부상을 치료하고, 다시 그라운드에 서고...그렇게 우리는 김병수를 혹사 시켰고, 김병수는 우리에게서 멀어져 갔다.

단 한 번만이라도 완벽한 몸 상태로 경기에 임하고 싶었다는 김병수. 숱한 원망과 고통의 시간을 보냈기에 누구라도 원망하며 망가졌어야 할 축구 천재는 현재, 포항 스틸러스에서 코치직을 수행하며 선수로서 펼치지 못했던 날개를 지도자로서 펼치려 준비하고 있다.

그토록 외롭고 긴 싸움을 해야 했고 결국 희생양이 되었지만, 김병수는 여전히 한국 축구를 위해 자신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김병수가 남겼던 마지막 말을 끝으로 그가 불행했던 선수 시절을 잊고 화려하게 비상하길 기원해 본다.

"선수로서 나는 불행했습니다. 하지만, 내 인생이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축구는 여전히 제 꿈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마음이 흔들리고 나태해질 땐 이 말을 되새기며 의지를 다집니다. [나는 한국 축구를 위해 큰일을 해야 한다.]라고.."


손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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