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09-20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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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 야구 해설의 달인, 김소식을 만나다 ①

기사입력 2009.01.21 21:21 / 기사수정 2009.01.21 21:21

유진 기자

[엑스포츠뉴스=유진 기자] 해설위원은 결코 만만한 자리가 아니다. 안방에서 중계방송으로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야구팬들에게 현장의 소식을 그 누구보다도 객관성 있게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해설위원이 ‘완벽한 해설은 없다. 다만, 완벽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해야 할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어려운 자리에 많은 전문가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허구연(MBC ESPN), 하일성(前 KBS), 백인천, 이광권(이상 SBS SPORTS) 해설위원 등 아마야구 및 프로야구에서 스타플레이어로 이름났던 해설위원들이 각자 나름의 개성을 살렸고, 이로 인하여 야구팬들로부터 적지 않은 호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해설위원의 ‘맏형’은 1983년부터 야구해설을 시작한 김소식 現 대한야구협회 부회장이다. ‘김소식’ 이름 석 자를 이야기하면 많은 야구팬은 1980~90년대 브라운관을 사로잡았던 ‘걸걸한 목소리’를 많이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야구해설 일선에서 물러났던 그는 또 다른 야인으로써, 한편으로는 야구 행정을 책임지는 대한야구협회 임원으로써 제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많은 이들은 김소식 해설위원을 가리켜 ‘야구 원로’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러나 그의 야구에 대한 열정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임을 깨닫게 해 주는 것에 불과했다. 일흔을 앞둔 그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고, 걸걸한 목소리에서 묻어져 나오는 그의 노련함은 해설위원으로써 브라운관에 나타났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야구발전을 위한 이야기라면 언제든지 환영한다”고 말하는 김소식 해설위원을 엑스포츠뉴스 사무실에서 만날 수 있었다.

Q : 바쁜 시간 엑스포츠뉴스 사무실까지 직접 찾아와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먼저 김소식 위원님을 그리워하는 야구팬들에게 인사 말씀 해 주십시오.

김소식(이하 ‘김’으로 표기) :엑스포츠뉴스 외에도 다른 곳에서도 인터뷰 제의가 들어왔지만 제가 일선에서 물러난 사람이기에 고사했습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최고의 스포츠 콘텐츠 회사인 엑스포츠뉴스에서 불러주셨으니 정말 감사할 뿐입니다. 최근 야구계를 포함하여 모든 사항이 어려운 시기입니다. 하지만, 야구에도 9회말 투 아웃에 역전 홈런이 터질 수 있듯이 인생에서도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지금 상당히 어려운 시기이기는 하지만, 참고 견디다 보면 야구팬 여러분께서도 9회말 투 아웃에 역전 만루홈런을 경험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고교야구 시절의 김소식을 말하다

Q : 고교시절, 당시까지만 해도 '무명'이었던 부산고등학교에 전국대회 우승을 안겼던 주역이셨습니다.

김 : 당시 3대 고교야구 전국대회가 청룡기, 황금사자기, 부산 국제대회였습니다. 3개 대회 중에서 청룡기, 부산 국제대회에서는 우승을 차지했고, 황금사자기 고교선수권 대회에서는 경동고등학교에 준결승전에서 0:1로 패했습니다. 즉, 3개 대회 중에서 2개 대회 우승을 차지했죠. 그런데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야구 하는 것을 결사반대하셨던 부모님께서 야구장에 찾아오셨습니다. 그게 결승전이었죠. 그런데 관중석에서는 ‘야! 김소식이 잘한다!’라는 소리가 들려왔는데도 불구하고 양친께서는 제가 어디 있었는지도 모르셨답니다(웃음). 외야에 누가 있는지, 마운드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우승하는 광경을 보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청룡기 우승과 관련하여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말씀하셨다시피 부산고교는 이전까지 전국대회에 잘 못 올라오던 학교였습니다. 그런데 예선전을 통과해서 청룡기 결승에서 대구상고와 패자부활전을 통하여 기사회생하여 우승하였습니다. 어쨌든 부산고교 우승했다고 하니까 부산시에서도 거리 퍼레이드를 계획했습니다. 이러한 소식이 알려지자 선수들 모두가 설레는 마음을 가지게 됐죠.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때에 화폐개혁이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카 퍼레이드를 한다고 일정이 잡혀 있었던 때에 ‘화폐개혁’이 일제히 발표됐죠. 결국, 퍼레이드는 취소됐고, 우승하면서도 화려하지 못해 상당히 아쉬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추억으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때 저를 포함한 선수들은 맥이 빠질 수밖에 없었죠(웃음).

Q : 당시 김소식 부회장님의 투구폼은 '교과서 뺨치는 정석'이라는 평이 가득했는데, 그렇게 교과서적인 투구폼을 갖게 되신 비결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김 : 많은 지도자분이 저에게 " 정통파 투수로는 전형적인, 교과서적인 투구동작 "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야구를 지도하셨던 분들이 투수전문가는 아니었습니다. 저만의 투구폼을 갖게 된 계기는 부산에서 중계가 된 일본프로야구를 보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중계를 보면서 제 스스로 서동준 선배(前 인천고교)를 닮고 싶어했고 특히, 손희준 선배(前 연세대 감독. 작고)는 "너의 투구폼은 그야말로 정석이다. 절대 투구 동작을 고치지 말아라" 라고 조언을 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동네야구를 투수로 시작했는데, 선수 끝날 때까지 투수로 남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점이 한 몫 했던 것 같습니다.

실업야구 시절의 김소식

Q : 부산고교 졸업 이후 실업팀 상업은행으로 가셨습니다. 당시 실업야구 실태(야구여건, 환경)는 어떠했습니까?

김 : 제가 상업은행에 입사하기 전까지만 해도 실업야구 팀이 농협, 육군, 대한통운, 한국전력 등 전국에 4개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도 대부분은 서울에 있었지요. 그러다가 1963년에 13개 팀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즉, 팀은 많은데 선수는 한정되어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제가 상업은행이 아닌 제일은행으로 가고자 고교시절 동료인 박명렬 선수와 도망을 갔습니다(웃음). 이것이 바로 현재까지도 ‘마금산 온천 사건’으로 화자되고 있지요. 그래서 한 달 간을 도망가 있었는데, 당시 상업은행 초대 감독님이신 장태영 감독님께서 저를 찾아다니셨습니다. 수소문 끝에 결국 감독님께서 저를 다시 데려오셨고, 이 때부터 상업은행 일원으로 뛸 수 있었습니다.

Q : 해병대를 전역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군 복무 시절 이야기를 해 주십시오.

김 : 해병대 야구팀이 원래는 해군 헌병 소속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추후 해병대 야구단으로 발전하게 되었죠. 그런데 군 입대 했던 이 시기가 제 실업야구 시절의 전성기였습니다. 이때 당시 대전고교 출신 함귀영 대위가 주장이었는데, 야구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 해병대 야구단은 해병대 부사관들의 봉급 1%를 모아 운영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만큼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전성기였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제 역할은 단 하나였습니다. ‘육군 킬러’였죠(웃음). 다른 팀에게는 다 져도 육군 팀에는 지지 말자는 각오가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등판하여 육군 팀에게 이기면 외박이나 외출을 나가기도 했었죠. 그렇게 외박/외출이 허용되면 술 한 잔 하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또 홈런을 치면 크라운 맥주에서 스폰서 차원에서 부상으로 맥주 한 박스를 수여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홈런 티켓’이었는데, 이 티켓을 가지고 명동 바에서 술 한 박스로 바꾸어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장 더 주면 안주를 바꿔먹을 수 있었죠. 하지만 저는 투수라서 술을 입에 대는 일이 크게 없었습니다.

군 생활과 관련한 또 다른 추억은 제일은행과의 경기였습니다. 당시 (3루 주자였던) 상대팀 한동화 선수(現 중국 베이징 타이거스 감독)가 폭투로 3루에서 홈으로 들어오는데, 슬라이딩 하면서 베이스를 커버하던 제 팔뚝을 스파이크로 찢어놓은 겁니다. ‘김소식이가 잘 던져서 일부러 그러는 것 아니냐’는 생각에 한동화 선수의 머리를 향해 공을 던지려 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을 읽었는지 한동화 선수가 머리를 싸매고 덕아웃으로 들어가더군요. 그래서 그 뒤통수를 맞혔습니다(웃음).

Q : 비교적 일찍 은퇴하셨습니다(당시 27세). 현역 시절에 대한 미련은 없지 않으셨습니까?

김 : 당시 문교부(現 교육과학기술부)에서 국가고시가 실시되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부산고교 선배께서 교육계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상업은행 야구 창설멤버 16명 전원이 국가고시 시험을 봤는데, 저만 합격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법관이 되고 싶다는 나름대로의 꿈이 있었습니다. 야구는 하나의 방법이자 수단일 뿐이었죠. 또한 시험에서 합격해야 ‘은행 지점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프로’에 대한 인식이 크게 없었던 시기였고, 저 역시 평범한 운동선수 출신이기는 싫었습니다. 따라서 제가 일찍 은퇴는 했지만, 그에 따른 미련은 전혀 없었습니다.

[정리 = 엑스포츠뉴스 유진 기자]

- 2부(은퇴 이후의 김소식)에서 계속 -



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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