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5.04.12 07:43 / 기사수정 2005.04.12 07:43
임선동-조성민-정민철-박찬호-염종석
이들의 공통점을 혹시 아는가? 그렇다. 첫 번째는 투수라는 점, 두 번째는 '92학번'이라는 것이다.
올 시즌 박찬호는 개막전에서 시애틀을 상대로 5.2 이닝 3실점으로 호투를 했고 염종석은 삼성과의 개막전에서의 호투와 더불어 LG와의 홈 경기에서도 6이닝을 1실점으로 틀어막았다. 이들이 재기의 칼날을 갈고 있는 이 때, 다섯 명의 거취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1. 시작은 미미했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박찬호!
사실 공주고-한양대 시절의 박찬호는 말 그래도 '볼 만 빠른 투수'였다. 직구는 150km를 상외했지만, 제구가 안되는 덜 다듬어진 투수였다. 그러던 그는 LA 스카우터의 눈에 띄고 LA 입단으로 이어지면서 인생에서의 변화가 시작 되었다.
96년 4월 어느 날. 선발이던 라몬 마르티네스가 급작스런 부상으로 강판 당하고 구원으로 올라온 그는 5회까지 18명의 타자를 상대했다. 7삼진을 잡으며 호투, 3안타 4볼넷을 허용했지만 무실점 호투를 선보였다. 그는 대한민국 1호 MLB 승리투수가 되어 '코리안 특급'으로서의 위상을 발휘하게 된다.
비록 LA라는 팀 입장에선 하향세가 시작될 시기였지만 반대로 그는 팀의 선발투수로 완전히 자리잡으며, 97년부터 14-15-13-18-15승을 5년 연속 거두며 명실상부한 팀의 에이스로 우뚝섰다.
그에 대한 반대 급부로 텍사스와 5년 간 7100만달러의 대박 계약을 터트리며, '최고 투수의 반열' 에 오르는 듯 했다.
하지만, 신화는 거기서 일단멈춤이 되었다. 2002년 허벅지 부상으로 주로 후반기에만 출장하며 9승에 그친 그는 2003년 1승, 2004년 4승에 거치며 드라이포트와 함께 보라스가 만든 '최고 먹튀'라는 오명을 고스란히 짊어졌다.
인간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계약 4년 째인 올 시즌 첫 경기에서 비록 3실점하긴 했으나, 5.2이닝을 소화하며 올 시즌 활약을 예고한 그다.
박찬호 중계와 여타 코리안 MLB리거의 중계 시청률이 거의 반반일 만큼 그의 상징성은 단순한 '투수 한 명'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마 IMF라는 어려운 시기에 우리보다도 훨씬 큰 덩치의 외국인을 삼진으로 솎아내던 그의 모습에서 우리 국민들은 희열을 느꼈는지 모른다.
박찬호의 활동 여부가 MLB 붐과 직결되는 만큼 그의 부활 여부에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하다.
2, 최고의 유망주에서 추락, 다시 재기를 노리는 선수 - 임선동!
2005년 4월 9일 대구구장. 무거운 몸을 이끌고 현대 유니폼을 입은 채 던지는 눈에 익은 선수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바로 임선동.
임선동은 다이에 호크스와의 '스카우트 파동' 등으로 근 2년 여의 법정 분쟁 끝에 91년 그를 지명했던 '애증의 팀' LG에 97년 입단했다. 그 해 11승으로 팀의 준우승을 이끄는 듯 했으나 이듬해 고작 1승에 그치며, 현대 안병원과 맞트레이드 된다.
현대에서 99년 한해를 쉬다시피 한 그는 이듬해인 2000년, 18승으로 김수경-정민태와 함께 공동 다승왕에 오르며 현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게 된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2001년 14승, 2002년 8승에 그친 그는 2003-2004년 무승에 그치며 은퇴의 기로에 섰다.
하지만 올 시즌 병풍등으로 인한 투수 기근현상으로 5선발 '마지막 기회'를 부여받은 그는 첫 경기에서 1이닝 동안 4실점하며 재기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과연 그가 '활짝 꽃 피지 못한 유망주'라는 오명 끝에 은퇴를 할지 아니면, 은퇴한 LG 정삼흠 투수 같이 '대기만성'의 전형이 될지 두고 볼 일이다.
3. 일본 진출이 독이 된 선수 - 정민철
사실 빙그레 시절부터 정민철은 말 그대로 '대한민국 대표 에이스'였다. 구위도 구위였지만 다이나믹하고 군더더기 없는 투구폼에서 나오는 공은 타자들이 치기 까다로운 볼이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일본 요리우리 입단으로 인해 다른 선수들의 희망이자 꿈인 해외진출이 도리어 정민철에게는 독이 되고 말았다.
선동렬-이종범-구대성-정민철-정민태 등이 진출했던 일본 야구는 결국 선동렬-구대성 정도만이 적응에 성공하고, 나머지 선수는 일본의 텃새와 실력차라는 벽에 부딪히며 돌아온 경우가 허다했다.
정민철 역시 99시즌 한화를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며 일본에 진출. 데뷔 두 번째 경기서 완봉을 거두는 등 성공에 한결 접근했으나 결국 '텃새' 때문에 실패했다.
일차적으로 본인의 잘못이겠지만 완봉승을 거둔 투수를 2군에 내려보내는 등 이해 못할 처사와 들쭉날쭉한 등판일정 등으로 옥죈 그는 결국 국내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국내로 돌아온 그는 예전의 '8년 연속 10승 투수'가 아니었다. 복귀 직후인 2002년 7승 그리고 2003년 11승을 거두며 부진했던 그는 결국 작년엔 승없이 6패에 7.67이란 방어율로 하락했다.
올 시즌 역시 두산을 상대로 출전 5.2이닝동안 4실점하며, 부진의 늪에서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의 부진에 관해 여러가지 억측이 나오고 있으나 결국 구속의 저하와 자신감 상실이 가장 큰 문제인 것임엔 틀림없다.
그가 부활해야만 40에 가까운 나이에도 제 1선발의 중책을 맡고 있는 송진우의 부담을 덜면서 한화가 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는 지름길로 갈 수 있다. 그의 부활은 한화팬들만의 바람이 아닌 프로야구 팬 전체의 바람일 듯 하다.
4. 엘리트 코스와 나락으로의 추락 - 조성민
신일고-고려대로 대표되는 엘리트 코스. 이후 국내 프로야구를 거치지 않고 바로 일본으로 입단한 '특별한 케이스'인 조성민은 95년 당시 1만 5천엔의 계약금과 1200만엔을 받고 입단했다.
그는 1년 반여의 2군 생활 끝에 이듬해 7월 첫 등판을 시작으로 그 해 1승 2패 11세이브를 거두며 선동렬에 이은 일본에의 성공시대를 열것 같았다.
하지만,이듬해 98년 7월. 남들에겐 영광의 무대인 '올스타전' 에서 뜻하지 않은 부상을 당한 것이 그에겐 악재였다.
팔꿈치 인대이식 수술로 재활에 매진하던 그는 2001년 다시금 웃자란 팔꿈치 뼈 제거수술을 끝으로 2002년 10월 쓸쓸히 귀국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스포츠 스타와 탤런트 커플로 화제를 모았던 최진실과의 결혼 생활에도 실패,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지칠대로 지친 모습이었다. 와중에 '최진실 폭행사건'까지 겹치며, 한참 운동선수로서 전성기라 할 수 있는 30대 초반에 운동을 그만두게 됐다.
국내팀 입단 테스트에서도 탈락한 그에게 '제 2의 삶'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바로 '야구 해설'이었다.
MBC-ESPN과 계약한 그는 처음으로 방송하는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깔끔한 말투와 명쾌한 해설로 청취자들의 호평을 들었고, 성공시대를 예감하고 있다.
이 다섯 명의 선수 중 유일하게 현역을 떠난 조성민이 여러가지 아픔을 뒤로 하고 더욱 성숙해진 모습을 보여주었음 한다.
5. 오랫동안 부상과의 싸움. 하지만 포기 않는 선수 - 염종석
92년 롯데의 한국시리즈 우승의 일등공신 염종석. 당시 윤학길 등과 더불어 롯데 마운드를 이끌며 17승에 방어율 2.33으로 신인왕에 오르며 전성기를 예고한 염종석.
하지만, '투수 혹사 전문가'인 강병철 감독의 무리한 등판지시를 묵묵히 이행한 업보였을까? 이듬해 예리하던 '슬라이더'의 각이 무뎌지며, 10승 10패를 기록하곤 이 후 10년간 한 자릿 승수에 머물며 부진을 면치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95년 오른쪽 팔꿈치 관절제거 수술, 97년 오른쪽 어깨 피부이식수술, 99년 또다시 오른쪽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 등을 거치며 은퇴의 갈림길에 섰던 염종석. 그가 팀 선배 '악바리 박정태'를 보고 배운 것일까? 그 역시 오뚝이처럼 살아 났다.
그는 올 시즌 삼성과 LG경기에 등판에서 10.1이닝동안 3실점의 짠물 투구를 보이며 재기에 칼날을 갈고 있다.
더 이상 광속구는 없지만 한 타자에게 두 가지 이상의 구질을 던지지 않을 정도로 초 슬로커브-싱커-포크-반포크 등 말 그대로 '팔색갈매기'라는 별명을 붙여줘도 될 만큼 변화무쌍한 투구로 롯데 마운드를 이끌고 있다. 그의 부활만이 4년 연속 꼴지의 치욕에 몸서리 치고 있는 롯데의 부활을 알리는 서곡이 될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다섯 명의 선수는 투수라는 공통점 이외엔 주 무기도, 인생역정도 각각 다른 선수들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92년 당시 매겨졌던 '순위'와 지금 그들의 순위는 분명 다르다는 것이다.
15년여의 세월이 지난 지금 그들에게 매겨지는 순위는 결코 마지막이 아닐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지난 뒤 바라본 이 다섯 명의 처지는 어떻게 바뀌어져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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