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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토종 빅맨에 대한 단상(1) - 황금 시대의 주역들

기사입력 2008.09.09 17:44 / 기사수정 2008.09.09 17:44

최영준 기자
'리바운드를 제압하는 자가 경기를 제압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골밑을 지키는 빅맨, 즉 센터와 파워포워드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 아닌가 합니다. 굳이 이런 격언이 아니라도, 농구를 조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골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러한 목소리를 수도 없이 들어봤을 것입니다.

물론 경향이 많이 바뀌면서 가드진의 압박을 중심으로 경기를 풀어가거나, 혹은 공격력이 좋은 선수를 대거 기용해서 압도적인 공격의 힘으로 훌륭한 성적을 내는 팀도 종종 보입니다. 또 '센터는 감독을 즐겁게 하고, 가드는 팬을 즐겁게 한다'는 유명한 말처럼 많은 농구 팬들은 가드진이 중심이 된 속도감 있는 농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프로 농구는 빅맨이 성장하기 참 힘든 구조입니다. 이런 이유에는 농구 저변이 좁기 때문에 그만큼 좋은 선수가 덜 나온다는 태생적인 한계도 분명 존재하지만 역시 가장 큰 원인은 외국인 선수 제도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 더해서, 많은 농구인들이 부르짖는 '전 포지션의 장신화' 역시 한 몫 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네요. 이제는 많은 장신 유망주들이 골밑에 편향되기 보다는 미래의 장신 가드, 혹은 장신 포워드가 되기 위해 이 시간에도 구슬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아주 예전부터, 그리고 프로 출범 이후에도 줄곧 우리 농구계에 주요한 명제가 되어 왔던 '토종 빅맨'이라는 조금은 민감한 주제에 대해서 다뤄보고자 합니다.

황금 시대의 주역들

지난 12시즌 동안 센터 혹은 파워포워드 자리에서 뛴 토종 선수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특히 프로 초창기에는 외국인 선수를 무조건 빅맨으로만 뽑지 않고 가드 요원을 뽑는 경우도 꽤나 보였기 때문에 4번 자리에서 주전으로 뛴 선수도 꽤 있었습니다. 프로 초기의 정재근, 강병수, 이은호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반면 같은 자리에서 장기간 주전으로 활약한 선수를 생각해 본다면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외국인 선수 제도의 탓이 가장 큽니다. 특히나 맥도웰의 성공 이후, 모든 팀들이 너도 나도 파워포워드와 센터를 한 명씩 지명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이는 더 심해졌습니다. 물론 몇몇 예외가 있었습니다만, 이는 장기간 KBL의 주도적인 경향이었습니다. 

이 시절의 대표적인 토종 빅맨들을 떠올리자면 가장 대표적인 선수들은 역시 농구 대잔치 세대, 즉 우리 농구의 '황금 시대'를 이끌었던 주역들이 아닌가 합니다. 




서장훈 (전주 KCC, 207cm / 115kg)
통산 10시즌 453경기 <21.86득점, 8.95리바운드, 1.77어시스트, 0.62스틸, 0.85블록>

역시 토종 빅맨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선수는 서장훈입니다. 일단 국내 수준에서 서장훈은 압도적인 체격 조건을 갖추고 있고 정확한 중거리슛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공격력에 리바운드 능력 역시 확실합니다. 98-99시즌 국내 선수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리바운드 1위(13.97개)를 차지한 것은 아마 앞으로도(외국인 선수 제도가 폐지되기 전까지는) 마지막일듯 합니다. 그 이후로도 두자릿 수 리바운드를 3번 더 기록했고, 현재까지도 두자릿 수 리바운드를 기록해본 적이 있는 유일한 국내 선수입니다. 

또 하나 높이 평가하고 싶은 것은 서장훈이 몸싸움을 즐기는 선수는 분명 아닌데, 몸싸움을 해야할 때는 해준다는 점입니다. 자신이 포스트업으로 골밑을 공략해야 할 때는 확실하게 시도해주고, 수비할 때에도 크게 밀리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것은 체격 조건이 좋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인드가 좋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수비력이 별로 좋지는 않다는겁니다. 물론 체격이 있기 때문에 쉽게 밀리지는 않지만 수비력 자체는 그저 그렇고, 스피드와 운동 능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편이라 키에 비해 블록슛이 적고 골밑에서 상대에게 위압감을 줄 수 있는 선수는 아닙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최고의 장점이었던 정확한 중거리슛이 다소 무뎌지는 느낌인데, 이게 일시적인 것인지 아니면 기량이 떨어진 것인지는 더 두고봐야 알 듯 합니다.

그러나 이런 단점은 차치하고라도 서장훈은 적어도 현재까진 역대 최고의 토종 빅맨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재 기량은 최고라고 할 수 있는 김주성과의 비교가 종종 이루어집니다만, 일반적인 기준의 '빅맨 본연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김주성보다는 서장훈이 더 근접해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현주엽 (창원 LG, 195cm / 103kg)
통산 8시즌 353경기 <14.08득점, 4.37리바운드, 5.44어시스트, 1.06스틸, 0.17블록>

대학 시절부터 서장훈의 최고 라이벌이었다고 할 수 있는 현주엽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현주엽이 제대로 파워포워드로서 플레이한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습니다. 프로 입단 후 청주 SK에서 골드뱅크(현 KTF의 전신)로 트레이드된 현주엽은 처음 한두 해 눈에 띄는 활약을 했습니다만 소위 `포인트 포워드'라는 것에 눈을 뜨게 되고 패스에 맛을 들이면서 점점 탑에서 플레이하는 시간이 늘어나게 됩니다. 그 이후에 현주엽이 골밑에서 플레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꽤나 드문 일이 되었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평가가 갈릴 수 있는 문제이지만, 저는 이런 현주엽의 변화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생각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현주엽이 포인트 포워드라고 실제 포인트 가드만큼의 리딩을 해주었느냐 하면 그렇다고 하기엔 좀 어려워 보입니다. 그가 패싱 센스가 썩 좋은 포워드였음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 효율성이 어떠하였는지는 팀 성적과, 어시스트가 높았던 시즌엔 유독 높았던 그의 턴오버 수치가 말해줍니다. 

실제 경기에서 보기에도 그만큼 그가 공격을 원활하게 해줬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패싱에 맛을 들이고 탑에서 플레이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이와 반비례하여 골밑에 머무는 시간과 공격을 시도하는 빈도는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현주엽이 적어도 대학 시절과 프로 초년병 시기까지는 정말 득점력과 뛰어난 패싱력까지 겸비한 최고의 파워포워드 였음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프로에서의 8시즌을 종합해 보면 주객이 전도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파워포워드로서 현주엽의 능력은 출중한 수준이었지만 플레이 스타일 변화에 대한 그의 선택은 조금 아쉬움이 남습니다.




전희철 (서울 SK 2군 감독, 198cm / 98kg)
통산 11시즌 472경기 <11.87득점, 3.96리바운드, 1.96어시스트, 0.61스틸, 0.33블록>

전희철은 스피드와 운동 능력에 상당 부분 의존하는 파워포워드였습니다. 대학 시절에는 3, 4, 5번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플레이가 가능한 선수였고 정말 가히 시대를 앞서가는 빅맨이라고 할 만했죠. 프로 출범 이후 원년부터 뛰던 당시의 전희철은 외국인 선수와 1:1로 겨룰 수 있는 몇 안되는 토종 빅맨이기도 했습니다. 힘에서는 밀리지만 탁월한 스피드와 운동 능력을 바탕으로 동 포지션의 선수를 상대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진 선수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군복무를 마치고 프로에 돌아온 이후엔 사정이 조금 달랐습니다. 외국인 선수 선발도 점차 체계화되면서 위력적인 센터와 파워포워드 용병들이 늘었고 전희철은 점차 힘에서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이 때와 맞물려 팀 내 김승현의 입단과 마르커스 힉스라는 특급 용병의 등장으로 전희철은 팀의 중심에서 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롤플레이어가 되어버린 그에게 이어진 KCC로의 트레이드는 치명타를 가한 격이었고 결국 전희철은 스팟업 슈터로 전락해버리고 맙니다.

그나마 이후 SK로의 트레이드는 조금 나아질 수 있었던 기회였고 실제로 첫 두 시즌 정도는 나쁘지 않았지만 스몰포워드 자리의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기용되었죠. 그것도 방성윤과 문경은이 들어오면서 입지가 좁아지게 되었고 지난 세 시즌의 몰락과 이어 은퇴로까지 내몰리고 말았습니다.

2군 감독으로서 새로운 진로를 개척하게 된 전희철이지만, 동년배 선수들이 아직도 선수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기 스타에 실력 있는 선구자인 그였지만 조금은 때를 잘못 만난 불운한 케이스가 아닌가 합니다. 

분명 운동 능력에 의존하는 플레이 스타일과 그다지 좋지 않은 수비력을 가진 전희철은 태생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고, 외국인 선수를 상대하기에 힘에서는 밀리고 그렇다고 운동 능력에서도 딱히 앞서지는 못하는 애매한 상태였습니다. 프로 초기에는 그런 플레이가 통했으나 외국인 선수의 기량이 점점 나아진 이후에는 우위를 점하기가 어려웠죠. 그렇다고 완전히 포지션 변경을 꾀하지도 못한 그는 결국 스몰포워드도, 파워포워드도 제대로 될 수 없는 트위너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물어 가는 '황금 세대'

가장 화려하고 많은 인기를 누렸던 농구대잔치 세대는 지금은 세월의 벽을 이기지 못하고 조금씩 저물어 가는 모습입니다. 이 글에서는 빅맨들만을 한정하여 다루게 되겠지만 이는 모든 포지션에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많은 좋은 선수들이 사라져가는 것은 아쉬움이 큽니다만 그들에 대해서 추억해보고 얘기해보는 것도 나름대로 즐거운 일이 아닐까 합니다.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어쨌거나 과거도 알아야만 하니까요.

물론 농구대잔치 세대가 현재에도 대부분 은퇴한 것이 아니라 단지 팀 내에서의 역할이 전보다 조금 줄어들거나, 체력적인 문제로 많은 시간을 출장하지 못하는 정도이기에 다음 시즌, 그리고 그 이후에도 충분히 활약을 기대해 볼 여지가 있기에 과거라는 단정은 조금 른 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훌륭한 활약을 할 수 있는 기량을 가진, 살아있는 전설입니다.



최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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