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5.02.15 10:26 / 기사수정 2005.02.15 10:26
같은 날, 같은 장소, 같은 팀, 거기에 똑같은 선발투수 두 명이 정확히 1년 만에 재대결을 펼친다면? 믿기지 않겠지만 2001년 프로야구 개막전 두산 vs 해태의 경기는 정확히 그랬다. 다만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경기 내용은 더욱 극적이었다는 것이다.
경기 전 미국에 입양된 장애아 애덤 킹이 시구를 던졌고 선동렬 KBO 홍보위원(현 삼성 감독)이 헛스윙으로 화답했다.
경기는 시작됐고 두산은 1회말 만루 찬스를 맞이하지만 심재학이 파울플라이로 물러나면서 득점 찬스는 무산됐다. 이 때 두산팬들의 심재학을 향한 원성은 지난해 심정수를 트레이드한 불만을 표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5회까지 무득점에 그친 양 팀. 클리닝타임동안 전력을 충전한 호랑이들은 팀배팅으로 한 점을 선취하고 대타 정영규의 우전 2루타로 두 점을 추가, 3대 0으로 앞서나갔다. 조계현은 5회까지 잘 던지다 6회에 와르르 무너지며 체력적 한계가 도달했음을 여실히 보여줬다.
조계현의 상대선발 최상덕은 실로 오랜만에 타선지원을 받으며 6회까지 잘 던지지만 7회 두산 특유의 연타로 동점을 내주고 말았다. 두산은 적재적소에 최훈재를 대타로 기용하고 정수근, 장원진 등 좌타자들이 연발탄을 터뜨리며 경기를 흥미롭게 풀어나갔다.
9회초 마운드에 오른 진필중은 첫 타자이자 전 타석에서 2타점 2루타를 터뜨린 정영규에게 같은 코스로 2루타를 맞고 말았다. 다음타자 타바레스를 삼진으로 한숨 돌리는 듯 했으나 김태룡의 내야안타가 나오자 장성호를 고의4구로 걸러 만루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여기서 나온 4번타자 산토스. 해결사 기질이 다분한 산토스는 한국 데뷔 첫 안타를 가장 중요할 때 만들어내면서 주자 2명을 불러들여 스코어는 5대3으로 해태가 다시 승기를 잡았다.
9회말 두산 공격. 선두타자 홍성흔이 삼진으로 물러났고 그만큼 해태마무리 오봉옥의 공에는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하위타선.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던 것일까? 8번타자 홍원기에게 솔로홈런을 맞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한방으로 팬들을 즐겁게 할 줄 아는 홍원기는 훗날 큰 경기에서 잭팟을 터뜨리기도 했다.
물론 한 점을 쫓아갔지만 동점을 이루려면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두산은 마지막 희망으로 대타 이도형을 내세우고 일단 볼넷으로 출루하자 대주자로 전상렬을 기용, 마지막 반전을 노렸다. 분위기를 되살린 건 장원진의 동점타가 터지기 전 전상렬이 2루를 훔치면서부터였다. 스코어링 포지션에 나가자 안타 하나면 동점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고 반면 해태 벤치는 초조함에 물들어갔다.
결국 과감히 마운드 교체를 단행한 해태. 좌투수 최영완이 정수근을 좌익수 플라이로 잡으며 투아웃을 만들자 이번엔 이병석을 투입한다. 우타자로서의 장원진보단 좌타자로서의 장원진이 낫다는 순간적 판단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이건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깨끗한 우전 2루타! 동점이었다. 장원진은 정확히 1년 전 결승타의 주인공이었다. 양팔을 들어올려 손가락으로 팬들에게 포효하는 모습도 1년 전과 판박이였다.
다음타자는 끝내기와는 유난히 인연이 없던 우즈였다. 우즈는 안타 하나면 된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당겼고 타구는 좌익선상을 가르면서 경기는 끝났다.
필자는 이날 경기를 역대 개막전 중 가장 스펙터클한 경기로 기억하고 있다.
19. 심재학, 끝내기사단 가입 완료!
그는 아무 죄도 없었지만 팬들로부터 원망의 목소리를 들어야했다.
선수협 사태와 관련된 심정수와 맞트레이드되어 반달곰 유니폼을 입은 심재학. 전 해 심정수가 선사한 감동홈런을 잊지 못한 두산팬들은 구단의 부당한 처사에 비난의 화살을 쏘았고 그런 상황을 지켜보던 심재학이 느낀 부담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심재학은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심적 부담감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집념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성공 비결은 밀어치기. 집요한 밀어치기로 바깥쪽 볼 공략에 성공하자 왼손투수가 나와도 끄떡없었다. LG 시절 가장 약한 4번타자란 혹평을 받았던 심재학이 비로소 진정한 4번타자가 되어 있었다.
심재학이 유난히 더 큰 박수소리와 함성을 들을 수 있었던 이유는 찬스에 무척 강했기 때문이다. 6번타자로 출발했던 심재학은 니일의 방출과 김동주의 부상도 겹친 면도 있었지만 찬스에 강한 면모가 4번으로 전격 배치될 수 있었다. 그것은 득점권 타율 1위로 이어졌고 ‘해결사’란 애칭도 얻을 수 있었다.
시즌 초부터 거침없던 그의 타격은 결국 끝내기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줬다.
삼성과의 시즌 2차전. 사연 많은 조계현과 이강철의 선발대결. 이강철은 1회 3실점하며 먼저 무너졌고 조계현도 간간이 버티다 7회 동점타를 맞으면서 4대4 동점을 내줬다. 이 스코어는 연장전으로 이어졌고 야수를 다 써버린 삼성에 비해 아직 대타요원이 남아있던 두산이 11회말 대타작전으로 만든 찬스를 심재학이 풀카운트 승부 끝에 리베라의 몸쪽 직구를 중전안타로 연결, 3시간 48분에 걸친 접전에 마침표를 찍었다.
다른 유니폼을 입고 2년연속 우승의 주역이 될 조짐을 유감없이 보여준 한판승부였다.
서울라이벌 대결은 항상 그랬듯 왠지 명승부가 펼쳐질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실제로도 그렇듯 진정한 라이벌의 모습을 보여준 양 팀은 이날 명승부의 완결판을 만들 뻔했지만 시간제한에 가로 막히고 말았다.
화창한 일요일. 가볍게 점심식사를 즐기고 이젠 게임을 즐길 시간. 이 때만 하더라도 저녁식사를 넘어 야참 타임까지 넘어올 줄 그 누가 알았으랴.
1회말 두산 공격.
두산은 우즈의 선제 솔로홈런으로 기분 좋게 스타트를 끊었다.
하지만 4회초 권용관의 적시 2루타와 5회초 투수 실책으로 역전을 허용한 두산은 6회말 우즈가 또 한번 백스크린을 통타하는 시원한 투런으로 역전에 성공했다.
불펜 싸움으로 전개된 경기는 8회초 위기 상황에 갑작스레 등판한 진필중이 권용관에게 희생플라이를 내주면서 동점을 허용했다. 스코어는 3대3. 팬들은 재밌어진 경기에 더욱 빠져들었다.
그런데 이게 마지막 점수가 될 줄이야. 이후 양 팀은 연장 15회까지 한 점도 얻지 못한 채 경기를 마무리 짓게 된다.
물론 기회는 많았다. 하지만 잘 나가다 홈플레이트 승부에서 가로막혀 균형 깨트리기에 실패했다. 홈 한번 제대로 밟기가 이렇게 어려운줄 처음 느꼈을 것이다.
9회말 두산은 하위타선의 연속 출루로 만든 찬스를 장원진이 좌전안타로 2루주자 홍원기가 홈까지 쇄도했으나 김재현의 멋진 송구에 제대로 걸려들었고 10회말 대주자로 기용된 전상렬이 이병규의 총알 송구에 막혀 득점에 실패했다. 결국 그 이후로 힘이 다 빠진 선수들은 집중력을 잃었고 별다른 찬스없이 시간만 세월아 네월아 하며 흐르고 있었다.
일요일 낮 드라마 재방송 시간에 시작된 경기는 어느덧 주말드라마 정규타임에 다다르고 있었다.
15회말 정수근이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나기까지 장장 5시간 45분에 걸친 라이벌전은 '정말 지독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경기를 하는 사람, 또 경기를 지켜보는 사람들 모두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된다. 왜 이들이 진정한 라이벌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던 지독한 한판이었다.
스캔 / 윤욱재
윤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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