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8.07.11 15:11 / 기사수정 2008.07.11 15:11
잘 생긴 외모처럼 그는 중앙수비수임에도 깔끔한 경기를 펼친다. 9년간 150경기를 뛰면서 경고는 겨우 12장밖에 받지 않았고 퇴장은 한 번도 당하지 않았다. 헤딩력이 좋아 수비수임에도 불구하고 득점도 10골이나 있을 만큼 세트 플레이 상황에서의 공격 가담 능력도 좋다. 수비형 미드필더를 본 적이 있을 만큼 패싱력도 가지고 있다.
사실 박용호는 FC서울 팬들이나 2004 아테네 올림픽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낯익은 얼굴이다. 8년 전, 안양LG 시절부터 중앙수비수로 활약했던 박용호는 20살의 나이에 팀내 주전급으로 발돋움하며 각급 대표팀에서도 맹활약했다. 그러나 이후 부침을 겪으며 군입대를 선택했고 2년간 광주 상무에서 뛰었다.
그러나 친정 서울로 돌아왔을 때 포백으로 바뀐 수비진의 중앙에는 김치곤과 곽태휘가 버티고 있었다. 이후 곽태휘가 떠났지만 대신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표팀 수비수로 명성과 경험을 쌓아가던 김진규가 오면서 박용호는 이래저래 늘 무대 뒤편에 밀려나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올 시즌 김진규의 잦은 출장 정지와 김치곤의 난조로 박용호는 주전으로 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고 조재진(전북현대), 에두, 신영록, 서동현(이상 수원삼성), 남궁도(포항) 등 K-리그 정상급 스트라이커들을 상대로 좋은 경기력을 선보이며 서울의 세뇰 귀네슈 감독은 물론 팬과 전문가의 눈에 다시 들기 시작했다. 주전 수비수를 뜻하는 등번호 4번이 무색하지 않게 된 것이다.
‘리틀 홍명보’로 각광받던 유망주
박용호는 부평고 3학년이던 99년, 이천수(페예노르트), 최태욱(전북)과 함께 부평고를 전국대회 3관왕에 올려놓으며 일찌감치 대형 수비수 재목감으로 주목받았다. 고교 졸업 후 곧바로 안양LG에 입단했지만 이상헌-김성일-한상구로 구성돼 당시 K-리그에서 가장 안정적인 방어력을 선보이던 안양의 스리백에 박용호의 자리는 없었다. 패스와 경기를 읽는 감각이 홍명보를 닮아 '리틀 홍명보'라 불릴 정도로 주목을 받았으나 아직은 경험이 부족한 데다 스피드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2년차이던 2001년 아디다스컵 조별리그 라이벌 수원과의 경기에서 박용호는 프로 데뷔골이자 결승골을 성공시키며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 대회를 기점으로 팀 내 주전급 수비수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하던 박용호는 김호곤 올림픽대표팀 감독의 눈에 들어 중앙수비수로 기용되며 성실한 플레이로 눈에 띄지는 않지만 실력 있는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안양의 조광래 감독도 박용호가 대표팀에 차출될 때마다 수비진이 허술해 진다고 볼멘소리를 할 정도로 박용호는 K-리그에서 수준급 선수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박용호는 가능성을 지켜보는 차원에서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 최종 엔트리에 전격 발탁되며 '히딩크 사단'의 최연소 멤버로 화려하게 등장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2000년 아시아 청소년 대표와 2002년 아시안게임 대표에 이어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대표팀까지, 각급 대표팀과 안양의 주전 중앙수비수로 활약하게 된다. 아테네올림픽 축구 2차 예선 홍콩과의 경기에서는 간판 골잡이들을 제치고 득점포를 가동하며 깜짝 스타로 떠오르는 등, ‘리틀 홍명보’라는 별명에 걸맞은 활약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당시 박용호는 올림픽대표팀의 부주장을 맡아 유상철, 김치곤, 조병국 등과 함께 스리백을 구성해 사상 최초의 올림픽 8강 진출이란 쾌거를 이룩해냈다. 그러나 8강 파라과이전에서 세 골이나 내주며 3-2로 패배하며 결국 올림픽 첫 메달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유증이었을까. 대표팀에서 승승장구하던 박용호는 슬럼프를 겪으며 소속팀 안양에서는 주전경쟁에서조차 밀려나는 아픔을 맛봤다. 2004년 박용호의 출전 경기 수는 불과 5경기. 2003년에 21경기에 출전하여 안정적인 수비력을 뽐내던 것과 대조되는 활약상이었다. 당시 쏘우자, 김치곤, 박정석에 밀려나더니 급기야 신인 이정열이 주전과 후보를 오가며 인상깊은 활약을 펼치자 그의 팀 내 입지는 더욱 위축되었다. 결국, 박용호는 2004년 11월 광주 상무 입대를 결정하게 된다.
새로운 출발선 상에 서다
상무입대 후, 대표팀 수비자원을 얘기할 때 가끔 거론되곤 했지만, 박용호는 더 이상 홍명보의 뒤를 이을 대형수비수로 주목받지 못했다. 2004년 6월 터키와의 경기가 그의 유일한 A매치 경력. 그가 부침을 겪는 동안 국가대표 수비수로는 조병국, 박재홍 등이 떠올랐고 이후 김진규, 김치곤, 강민수 등이 성장하면서 대표팀에서 박용호의 자리는 없었다.
광주에서 절치부심하며 기량을 닦은 박용호는 2007년 상무에서 제대하여 서울에 합류한 뒤 의욕적으로 훈련에 임했지만 그만 훈련 도중에 광대뼈 골절 부상을 입으며 전반기 내내 재활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올 시즌에도 5월 인천 유나이티드전에서 부상을 당하며 두 달가량 경기에 나설 수 없었다.
부상에서 복귀해 지난주 두 경기에서 모두 선발 출장한 박용호는 강팀 수원과 포항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며 팀의 3연승을 이끌어냈다. 최근 김치곤의 컨디션 난조와 김진규의 출장정지에도 불구하고 서울이 견고한 수비를 보여줄 수 있었던 데는 박용호의 공이 컸다.
박용호는 수원과의 컵대회 7라운드에서는 김진규와 짝을 이뤄 수원의 매서운 공격을 막아냈고 리그 13라운드 포항과의 경기에서는 김치곤과 함께 상대 공격진을 잘 차단했다. 때론 중앙수비로 자리를 옮기는 아디와 김한윤과도 좋은 조합을 보이며 서울의 그 어떤 중앙수비수와도 좋은 호흡을 과시했다.
박용호는 더 이상 서울의 백업 수비수가 아니다. 국가대표급 선수들과 당당하게 주전 자리를 놓고 경쟁하고 있는 위치에 올랐다. 서울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던 또 다른 꽃미남 수비수 곽태휘는 서울을 떠나서야 그 기량에 걸맞은 인기와 대우를 누리며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되었지만, 박용호는 서울을 떠나지 않고도 곽태휘와 같이 될 수 있기를 서울 팬들은 바라고 있다.
올 시즌 서울의 경기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던 허정무 감독도 박용호가 부상 중이던 지난 5월 말 한 인터뷰에서 그가 지켜보는 중앙수비수 리스트 중에 박용호가 있다는 것을 밝혔다. 이제 부상에서 회복해 부활의 날갯짓을 시작하고 있는 박용호.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던 아테네올림픽 세대 중의 한 명이었던 박용호가 과연 예전에 받았던 기대에 부응하며 한국 축구의 중추적인 수비수로 떠오를 수 있을지, 조용한 응원과 함께 기대해본다.
[사진(C) 엑스포츠뉴스 남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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