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한일전. 더군다나 점수는 3-2, 한 점차. 과연 어떤 선수가 이러한 상황에서 마무리투수로 1이닝을 지키기 위해 올라와 떨리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모든 선수들이 다 떨리겠지만 이를 얼마나 잘 극복하느냐가 훌륭한 선수와 그렇지 않은 선수의 차이일 것이다. 그런면에서 박찬호(샌디에이고 파드레스)는 아직도 건재함을 충분히 보여줬다.
5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제 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한국과 일본의 A조 예선 1위를 결정짓는 한 판 승부. 1-2로 뒤지고 있던 한국이 8회초 이승엽의 2점홈런으로 역전에 성공했다. 7회부터 등판한 구대성(한화 이글스)이 7,8회를 깔끔하게 막고 내려왔다. 마무리투수는 일반적인 예상을 깨고 박찬호가 등판했다.
첫 타자는 대타로 나온 긴조 다스히코. 박찬호는 볼카운트 1-1상황에서 긴조를 1루수 뜬공으로 간단히 처리하며 1아웃을 잡아냈다. 첫 타자부터 구속이 143km/h이 나오는 등 지난 경기와 같이 빠른 구속을 보여줬다. 두번째 타자는 이 날 경기에서 한국의 선발투수 김선우로부터 솔로홈런을 뽑아냈던 가와사키 무네노리.
가와사키는 자신의 장기인 발을 살려 기습번트를 대봤지만 박찬호의 좋은 수비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박찬호의 수비에서 약간의 군더더기 동작이 있었더라면 세이프 타이밍이었지만 박찬호가 가와사키의 기습번트를 맨손으로 잡은 직후 빠르게 1루로 송구하며 간발의 차이로 아웃을 잡아낼 수 있었다.
원수는 외다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한국의 승리를 위해서 필요한 1아웃을 남겨놓고 등장한 타자는 '한국이 30년동안 일본을 이길 생각을 못하도록 하겠다'고 했던 스즈키 이치로. 박찬호와 이치로는 이미 메이저리그에서도 많은 승부를 펼쳐왔다. 비록 지난해에는 박찬호가 이치로에게 한 경기에 3안타를 내주기도 했지만 비교적 잘 막아왔다.
초구는 꽉 차는 스트라이크. 두 번째 공은 스트라이크를 줘도 무방한 볼이었다. 볼 카운트는 1-1. 이치로는 박찬호의 3구를 때렸지만 공은 힘없이 높게 뜨고 말았다. 이 공을 한국팀 유격수 박진만이 잡아내며 상황 종료. 한국팀의 승리와 함께 박찬호의 건재함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박찬호는 대만전에서도 7회부터 나와 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으며 세이브를 올린데 이어 일본전에서도 세이브를 기록하며 메이저리그에서 단 한 번도 기록하지 못했던 세이브를 이번 대회에서만 2번을 기록하게 되었다. 박찬호의 이러한 활약이 이번 예선을 넘어 미국 등과 맞붙는 2라운드(8강전)에서도 펼쳐지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