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조영준 기자] 피겨 스케이터의 공통적인 최종 목표는 올림픽 금메달이다.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여러 번 우승을 차지하는 것보다 올림픽에서 정상에 오르는 것이 훨씬 명예롭기 때문이다.
'피겨의 전설'로 남은 대부분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을 풍미한 미셸 콴(31, 미국)은 올림픽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세계선수권대회 5번, 전미 선수권 9회 우승의 업적을 이루었지만 올림픽에서는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서지 못했다.
하지만, 콴은 마침내 미국 피겨 스케이팅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됐다. 미국 AP통신은 16일(한국시각) 콴이 2012년 미국 피겨 스케이팅 명예의 전당에 오를 유일한 가입자가 됐다고 보도했다.
콴은 카타리나 비트(46, 독일, 1984년 사라예보, 19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후, 최고의 인기 스타로 군림했다. 8살 때부터 선수생활을 시작한 그는 평생 동안 43번의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미국의 언론사인 '산호세 머큐리 뉴스'는 콴이" 커다란 원을 그려온 느낌이다. 처음 전미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할 때부터 명예의 전당에 오를 때까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고 전했다.
90년대 중반, 콴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금메달은 ‘무서운 신예’ 타라 리핀스키(29, 미국)에 돌아갔다.
한번 겪은 실수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 콴은 4년 뒤 두 번째 올림픽에 도전했다. 강력한 경쟁자인 이리나 슬루츠카야(32, 러시아)와 맞붙은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는 피겨 역사상 최고의 이변이 일어났다.
콴과 슬루츠카야에 밀려 빛을 보지 못했던 16세 소녀 사라 휴즈(미국, 26)가 올림픽 금메달을 가져갔다.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 이전까지 휴즈는 전미 주니어 선수권 우승 1회와 비엔나컵, 그리고 올림픽을 앞두고 열린 '스케이트 캐나다'에서 정상에 우승을 차지한 것이 전부였다.
콴이 전미선수권과 세계선수권을 휩쓸 때, 휴즈는 겨우 국제대회에서 3번 우승한 신예에 불과했다. 그러나 솔트레이크시티 동메달에 그친 콴은 '올림픽 노골드'가 평생의 한으로 남게 됐다.
콴은 은퇴 뒤, 콜로라도주 덴버대학에서 학업에 전념했다. 지난 5년 동안 미국 정부의 친선 대사로 세계 각국을 방문한 경험도 있다.
비록, 콴은 올림픽 금메달은 놓쳤지만 명예를 얻었다. 최고의 목표는 놓쳤지만 사람들의 뇌리에 오래도록 남는 명연기를 펼쳤기 때문이다.
지난해 휴즈는 콴보다 한 발 앞서 미국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휴즈가 자국에서 열린 올림픽 챔피언임을 감안할 때,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콴은 여전히 대중들의 뇌리에 오랫동안 남아있다. 은퇴 이후에도 스케이터로서 모범적인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또한, 스포츠 외교관으로 변신하면서 피겨 유망주들에게 희망을 안겨줬다. 올림픽 때 반짝하고 조용하게 사라진 휴즈와 비교해 대조적인 모습이다.
[사진 = 미셸 콴 (C) 엑스포츠뉴스DB]
조영준 기자 spacewalker@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