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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무퇴' 구원왕을 향하여!

기사입력 2006.05.14 01:58 / 기사수정 2006.05.14 01:58

윤욱재 기자

[프로야구 25년 특별기획 - 나의 몬스터시즌 18] 1999년 임창용 & 진필중

'임진무퇴'의 판이한 출발

1998 한국시리즈에서도 물끄러미 남의 잔치를 지켜봐야 했던 삼성. 게다가 재계 1,2위를 놓고 다투는 현대가 우승을 차지했으니 속이 쓰릴 만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판단한 삼성은 본격적인 선수 모으기 작업에 들어갔다. 마치 현대가 그랬던 것처럼.

삼성의 약점은 마운드였다. 특히 마무리투수는 삼성의 최대 고민거리. 지난 시즌엔 용병 드래프트로 영입한 호세 파라를 마무리로 기용했지만 만족스런 결과를 낳진 못했다. 따라서 삼성은 마무리투수 영입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기로 하고 트레이드 시장에 나섰다. 때마침 레이더망에 걸린 선수는 해태의 임창용이었다.

임창용만큼 매력적인 카드는 없었다. 꿈틀거리는 강속구, 연투 능력, 두둑한 배짱까지 마무리투수가 갖춰야 할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는 그였다. 이 때 삼성은 '프랜차이즈 스타' 양준혁을 맞트레이드 카드로 내놓았고 오랜 기간동안 펼쳐진 협상 끝에 카드 조합에 성공, 3대1 트레이드(양준혁+곽채진+황두성↔임창용)를 성사했음을 발표했다.


표면상으론 선수 간 트레이드이지만 '뒷돈'이 포함됐을 것이란 추측이 무성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해태가 모기업의 부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그렇지 않았더라면 굳이 임창용을 트레이드 시장에 내놓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삼성은 역시 자금난을 겪고 있는 쌍방울에 '러브콜'을 보내며 현금 20억 원으로 간판선수들을 트레이드(양용모+이계성+20억원↔김기태+김현욱)로 영입했고 OB의 에이스 김상진을 6억 5천만 원에 현금트레이드해왔다. 또 '톱타자' 최익성을 매물로 내세워 한화의 노장진을 데려왔다. '투수왕국' 현대도 부럽지 않은 초호화 마운드가 완성된 것이다. 이들 중 가장 큰 기대를 모은 선수는 단연 임창용. 삼성의 고질병을 말끔하게 치료해줄 확실한 처방전이었다.

한편 OB에서 팀명을 바꾼 두산은 지난 시즌 3년 만에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는 등 세대교체에 성공했음을 확인했고 최훈재, 강혁, 차명주 등을 영입해 왼손 부재를 해결, 상위권 전력으로 꼽히고 있었다.

김인식 감독은 김민호를 톱타자로, 김경원을 마무리투수로 기용할 것을 시사했다. 그러나 이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날다람쥐' 정수근의 기세에 김민호는 9번으로 밀렸고, 불안한 모습을 보인 김경원 대신 진필중을 새로운 마무리로 낙점하면서 시즌 전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진필중은 지난 시즌 중반부터 마무리로 활동한 경험이 있어 마무리가 결코 낯선 보직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직구는 묵직함이 더해졌고 날카로운 슬라이더가 무게를 실었다. 그리고 마무리로서 윽박지르는 투구보단 안정된 컨트롤을 앞세운 것도 신선했다.

99시즌 구원왕 경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분명 과정은 달랐지만 이제 목표는 같은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불이 붙기 시작한 것이다.

한 치 양보 없는 구원왕 경쟁

임창용과 진필중 모두 승리를 위한 필승카드였다. 세이브 상황에 투입되는 것은 당연했고 승리의 조짐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여지없이 투입됐다. 비록 적이지만 처지는 같았던 셈이다.

시즌이 진행될수록 이들의 경쟁심도 불타오르고 있었다. 언론에서도 임창용과 진필중의 구원전쟁을 빗대 '임진무퇴'라 표현했고 팬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물론 이승엽의 홈런 신기록만큼 주목을 받진 못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치 양보 없는 이들의 구원 경쟁은 그야말로 점입가경.

선수를 친 건 임창용이었다. 아무도 도달하지 못한 48세이브포인트(이하 SP, 현재는 세이브 개수로 구원왕을 가린다)에 올라서며 종전기록인 이상훈(주니치 드래곤즈)의 47SP를 넘어선 것이다. 50SP 고지에도 먼저 올라서며 기세를 올리던 임창용이었다.

 
하지만 진필중의 추격도 만만치 않았다. 어느새 47SP에 올라선 진필중은 남은 경기 수가 임창용보다 많아 유리했다. 결국 50SP를 기록하며 공동 선두를 이뤄낸 진필중은 여세를 몰아 역전에 성공하고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2이닝 무실점으로 구원승을 따내 52SP로 구원 1위에 등극했다.

이승엽의 홈런 신기록은 흥미로웠지만 스릴은 없었다. 경쟁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원왕 레이스는 임창용과 진필중이 끝까지 각축을 벌이며 치열한 경쟁을 펼쳤고 결국 하나 차이로 운명이 엇갈리는 한 편의 드라마를 완성시켰다.

하지만 아픈 추억도 있다

양대리그제로 개편된 99시즌은 진필중의 두산과 임창용의 삼성이 각각 드림리그와 매직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상태였다.

두산은 한화를 맞아 잠실에서 1차전을 가졌다. 경기 전 비가 와 그라운드가 축축했지만 경기 진행을 강행했다. 경기 막판까지 치열한 접전을 펼친 한화와 두산은 각각 필승카드인 구대성과 진필중을 내세웠다. 그러나 진필중은 8회 동점 상황에서 점수를 허용하더니 9회엔 데이비스와 로마이어에 연속 타자 홈런을 맞고 주저앉고 말았다. 이날 패한 두산은 나머지 경기를 내리 내주고 4연패로 시즌을 마감했다.

경쟁자는 닮아간다더니 임창용도 시련의 가을을 맞은 건 마찬가지였다. 롯데와의 플레이오프에서 1차전부터 불안한 모습을 보이더니 승부의 분수령이 된 5차전에서 9회 호세에게 역전 끝내기 3점홈런을 맞았다. 마지막 7차전에선 9회 임수혁에게 동점 2점 홈런을 허용하고 연장 11회 임재철에 좌전안타를 맞아 결승점을 내줘 삼성의 한국시리즈 진출을 무산시켰다.

임창용의 별명은 99시즌부터 '애니콜'로 불렸다. 별명처럼 언제나 등판이 가능할 정도로 혹사를 당한 까닭에서다. 마무리투수가 규정이닝에 들었을 정도라면 혹사의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방어율 1위는 상처뿐인 영광인 셈. 진필중도 많이 던졌지만 임창용만큼은 아니었다.

임창용이 혹사로 울었다면 진필중은 차별대우에 눈물을 흘렸다. 삼성은 임창용이 신기록을 향해 달려갈 때 화끈한 경품 이벤트를 진행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물론 두산도 막판에 부랴부랴 이벤트를 준비했지만 규모에서 한참 밀렸다. 이듬해 연봉싸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삼성이 임창용의 요구액인 2억 원에 흔쾌히 도장을 찍어준 반면 진필중은 옵션 포함한 1억 7천만원(순수 연봉 1억 3천만 원)에 그친 것. 섭섭했지만 양보하기로 했다.

임창용은 다음해 김용희 감독의 관리로 혹사에서 벗어났고 2001시즌엔 선발로 변신, 2002년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진필중은 줄곧 마무리투수로 활약하다 2001 한국시리즈에서 포수 홍성흔과 뜨거운 포옹을 나누며 팀의 우승을 이뤄냈다. 국내에서 이뤄낼 것은 다 이뤄낸 이들은 해외진출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던 아픔도 가지고 있다.

분명 다르지만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는 임창용과 진필중이 동시대 최고의 마무리투수로 활약을 펼친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진필중 (1999) → 16승 6패 36세이브 방어율 2.37
임창용 (1999) → 13승 4패 38세이브 방어율 2.14

 



윤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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