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7.07.05 01:18 / 기사수정 2007.07.05 01:18
[엑스포츠뉴스=김경주 기자] 그 누구도 그가 이만큼 성장하리라고 예상치 못했다. 모두가 그에게 ‘물음표’를 그려 보였다. 그만큼 길고 지독했던 성장통. 그 성장통을 깨쳐 ‘느낌표’를 만들어 냈고 대한민국 대표팀 미드필더 진에 우뚝 섰다. 손대호, 스물일곱의 청년이 빛나기 시작했다.
처음 그가 프로생활을 시작한 곳은 수원이었다. 2002년 수원에 입단한 그는 예의 그 거친 플레이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백태클이 들어가는 그의 거칠고 투박한 플레이에 상대팀 선수는 물론 팬들마저 그를 겁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는 ‘손대호’ 자신의 이름 세 글자를 K 리그에 알렸다.
그러나 그가 빛을 보게 된 것은 그로부터 4년 뒤인 2006년, 그것도 시즌 막바지에 이르러서다. 수원에서 전남으로 이적한 뒤 다시 성남으로 이적한 그는 이적 초반에는 성남 팬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손대호가 수원에서 전남으로 이적한 뒤 눈에 띄는 플레이를 보이지 못했고, 성남으로 이적한 뒤에도 2군 리그에서조차 두각을 보이지 못할 정도로 나락에 떨어진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수원 시절 보여주던 둔탁하지만 호쾌한 플레이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손대호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
그러나 주저앉을 손대호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손가락질과 비난이 가해져도 그는 조용히 그러나 날카롭게 칼을 갈았다. 결코, 자신의 본모습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때를 기다리던 그가 날아오른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다.
06' 시즌 PO 전, FC 서울과의 경기. 오랜만에 출전 기회를 잡은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수원시절보다 훨씬 더 날카로워진 패스와 태클은 빛을 발했고, 성남은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렇게 그는 프로생활을 시작했던 수원과 챔피언 결정전에서 맞붙게 되었다.
챔피언 결정전에서 그는 김상식, 김두현과 함께 성남의 허리를 책임졌다. 이러한 상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없진 않았다. 그동안 거의 출전하지 못한 선수를 '이런 중요한 경기에 출전시켜도 되는 것인가.'에 대한 술렁임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손대호는 이러한 걱정을 모두 기우로 만들어버렸다. 김남일, 이관우 등이 포진한 수원의 허리에도 결코 주눅이 들지 않고 그는 자신만의 거칠지만, 날카로운 플레이를 펼쳐나갔다.
그의 태클은 ‘원샷 투 킬’ 김남일과 이관우를 모두 저지하기도 했고, 그가 가진 대담함은 적진 수원에서 김용대가 지키고 있는 성남 골문 근처에서의 마르세유 턴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 턴은 일명 ‘삼정턴’으로 불리며, 근래에도 축구팬들에게 간간이 회자되곤 한다.
그렇게 그는 조금씩 성장통을 이겨 나갔다. 그리고 그만큼 성장한 자신을 보여줬다. 김철호의 부상이 한몫했지만, 07시즌 그는 리그 최강이라는 성남의 허리의 한 자리를 당당히 꿰찼고, 결국 그토록 염원했던 태극 마크를 가슴에 달 수 있었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선수가 될 수도 있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거칠기만 하고 별다른 능력 같은 것은 가지지도 못한,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런 선수. 그러나 그는 6년 동안 세 벌의 유니폼을 갈아입으면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그러나 강하게 성장해 나갔다. 아직도 그의 성장은 끝나지 않았다.
적어도 그는,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 정도 성장쯤은 자신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래서 그에게 거는 기대는 더욱 크다. 그는 1년 만에 자신에 대한 ‘물음표’를 ‘느낌표’로 만드는 데 성공했고, 이제 그 느낌표의 개수를 늘려나갈 것이다. 계속해서 성장해 나가는 그를 지켜보는 것 또한, 또 다른 축구의 즐거움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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