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6.05.13 07:42 / 기사수정 2006.05.13 07:42
월드컵 역사에서 고대와 근대를 지나 이제 막 현대로 접어든 1990년대. 월드컵은 축구만의 한계에서 탈출할 필요성을 느꼈다. 물론 이전에도 축구와 자본이 만나 거대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해 냈지만 월드컵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는 더 큰 무언가가 필요했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세계 자본 시장의 중심인 미국에 강한 매력을 느꼈고, 미국도 끝없는 국가 이미지 상승과 천문학적인 파급 효과를 주는 월드컵에 이미 오래 전부터 매료됐다. 두 거대한 세력은 결국 하나로 뭉치기로 합의했고 월드컵과 축구는 드넓은 자본 시장 위에 다시 한 번 진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냈다. ◆제15회 1994년 미국 월드컵(상) ▲개최 배경
1988년 베른에서는 제15회 개최국을 선정하기 위한 FIFA 총회가 열렸다. 미국을 비롯해 축구 강국인 브라질과 아프리카의 모로코가 15회 대회의 개최권을 놓고 맞붙었지만 모로코는 물론이고 브라질도 미국의 적수조차 되지 못했다. 브라질은 '광적인 관중의 유혈 사태에 대한 우려'로 뒤처졌고 모로코는 '시설 미비' 등의 결격 사유로 밀려났다. FIFA는 "세계 최대 시장을 흡수하기 위한 장기적인 포석으로 과감히 미국을 선택했다"며 "미국이 이른 시일 내에 NBA(미프로농구협회) NFL(북아메리카프로미식축구리그) NHL(북미아이스하키리그) MLB(메이저리그)와 견줄 수 있는 세계 수준의 축구 리그 탄생을 약속했다"고 미국을 선정한 이유를 발표했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매우 정당하고 미래 지향적인 것이었으며, 유럽과 남미에 의존했던 '월드컵'을 세계화시킨다는 점에서도 무척이나 고무적인 것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에 속한 멕시코가 앞서 두 차례 월드컵을 개최하긴 했지만 남미로 보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사실상 제3의 대륙에서 열리는 첫 대회가 된 것이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나타난 순수하고 정상적인 이유 못지않은 것은 거부할 수 없는 미국의 거대한 경제력 때문이었다. FIFA는 1984년 LA 올림픽에서 보여준 미국의 엄청난 '머니 파워'에 감탄을 연발하고 있었다.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 국가들이 대거 불참했지만 올림픽은 역대 어느 대회보다 성공적이었으며 경제적 파급 효과도 대단했다. FIFA는 이러한 결과들이 올림픽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에서 열렸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결국 미국의 거대한 자본 시장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이었다. FIFA의 생각은 적중했다. 미국인의 70%가 개최 사실도 몰랐던 미국 월드컵은 '축구의 나라'인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때보다 무려 100만 명이 더 많은 356만 명이라는 관중 동원을 기록했고 총수입 역시 사상 최고액인 3조2천억 원을 기록한 것이었다. 1988년 7월 4일 미국의 독립 기념일에 결정된 이 사항은 '미국인에게 주는 독립 선물'이라 불리게 되었고 사실상 제3의 대륙에서 열리는 첫 대회로 기록되게 되었다.
다시 등장한 마라도나. 그러나… 지난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마음껏 과시하며 조국 아르헨티나에 월드컵 트로피를 안겨주었던 '축구 신동' 디에고 마라도나.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유럽의 압박 축구에 희생되어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지만 4년 뒤인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마라도나는 예전의 기량을 다시 회복했다. 나이지리아 불가리아 그리스와 함께 D조에 편성되었던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의 활약으로 16강에 진출했다. 그러나 마라도나는 경기 후 실시된 약물검사에서 에페드린 양성 판정을 받아 대회에서 추방됐다.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고 '발칸의 마라도나'로 불리던 게오르그 하지가 이끄는 루마니아에 2-3으로 패했고, 화려한 부활을 선언했던 마라도나는 약물 복용으로 '월드컵무대 영구 제명'이라는 중징계를 받고 말았다. 세계에서 가장 불운했던 축구 선수 6월 23일 LA 로즈볼 경기장에서는 미국과 콜롬비아의 본선 1라운드 2차전 경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남미 지역예선에서 아르헨티나를 5-0으로 눌렀던 콜롬비아는 펠레가 대회전 강력한 우승후보로 지목하기도 했을 만큼 막강한 전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루마니아와의 첫 경기에서 1-3으로 패해 미국전마저 진다면 16강 탈락이 확정될 위기에 놓였다. 콜롬비아 국민은 물론이고, 대부분 축구팬도 콜롬비아가 미국에 패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변은 빨리 찾아왔다. 콜롬비아의 안드레스 에스코바르가 미국 선수가 올린 크로스를 걷어내려다 자책골을 기록하고 만 것이었다. 당황한 콜롬비아는 이후 미국의 스튜어트에게 한 골을 더 헌납하고 경기 종료 직전 1골을 만회하는데 그쳐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콜롬비아로 돌아간 에스코바르는 동북부 메데인시의 한 술집 주차장에서 폭력배로 보이는 젊은이들과 말다툼을 벌이다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당시 목격자는 콜롬비아 라디오를 통해 가해자 중 1명이 "자살골에 감사한다"라고 말했다고 밝혀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단 한 번의 실수가, 그것도 스포츠 경기에서 일어난 실수로 소중한 생명을 잃은 에스코바르는 분명 월드컵이 낳은 비운의 선수였다.
지난 2002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은 8강에서 승부차기 끝에 강호 스페인을 물리치고 4강에 진출하는 기적과도 같은 드라마를 연출했다. 8년 전이던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도 우리와 참 많이 닮았던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불가리아였다. 미국 월드컵 본선 첫 경기까지 5번의 대회 총 16경기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불가리아가 미국 월드컵 4강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루마니아의 하지와 함께 1994년 대회를 빛냈던 '열정의 스트라이커'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가 이끌던 불가리아는 1라운드 첫 경기에서 예키니가 이끄는 나이지리아에 0-3으로 완패해 월드컵 본선 '첫 승'의 꿈을 미뤘다. 하지만 그리스와의 두 번째 경기에서 4-0으로 감격적인 본선 첫 승을 거두었다. 이후 1라운드 마지막 경기에서 바티스투타와 카니자가 버티는 아르헨티나를 2-0으로 제압하더니 16강에서는 승부차기 끝에 멕시코를 제압하고 8강에 올랐다. 8강에서 만난 상대는 우승후보로 평가받던 독일, 불가리아는 '만점 콤비' 스토이치코프와 레치코프가 각각 한 골씩을 기록해 마테우스가 페널티킥으로 한 골을 만회하는데 그친 독일을 제치고 4강에 오르는 감격을 누렸다. 본선 '첫 승'에서 기적 같은 '4강'까지, 2002년의 우리와 참 많이 닮은 불가리아였다.
이전까지의 월드컵이 오로지 축구에만 집중한 대회였다면 1994년 미국 월드컵은 축구와 월드컵은 물론이고 경제를 비롯한 갖가지 파생 효과가 어우러진 대회였다. 축구만으로 시작한 월드컵이 문화와 이념 그리고 종교를 넘어 경제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다시 한 번 도약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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