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윤인섭 기자의 수다메리까!] - 풋볼 아메리까노(14) 남미 축구의 3인자들과 그들의 영웅(하)
인데펜디엔테, 우니베르시닷 카톨리카, 다누비오, 리베르탓 등 지난 시간 우리는 아르헨티나와 칠레, 우루과이, 파라과이 리그의 Nº3에 관해 알아보았다. 이번 시간에는 지난 시간에 누락된 브라질 축구의 Nº3에 대해 알아볼 차례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팀이 브라질의 Nº3일까? 정답은 있을 수 없다. Nº3 뿐 아니라 Nº1과 Nº2를 매기는 일도 브라질 축구의 규모와 리그 역사를 안다면, 감히 행할 수 없는 일이다.
세계 최대 규모의 리그를 둔 브라질 축구에서는 어떤 클럽도 Nº1로서 과반수는커녕, 1/4의 지지도 받기 힘들다. 또한 브라질의 광대한 영토 탓에 전국리그가 시작된 지는 고작 40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이 40년 동안 브라질 전국리그 최다 우승팀 상파울루가 우승한 횟수도 고작 6번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도 브라질 축구에서 명실상부한 Nº1 클럽을 매길 수 없는 이유이다.
게다가 브라질리그 최다 우승팀 상파울루는 상파울루 주리그에서 코린찌안스와 파우메이라스에 이은 Nº3 대접을 받고 있다. 즉, 브라질 축구의 Nº3을 찾자면, 그것은 팀으로서의 Nº3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마치 브라질 축구의 광대한 규모처럼, 우리들의 포커스를 리그의 한 팀이 아닌, 브라질의 한 지역으로 넓히고자 한다. 그곳은 바로 브라질의 최남단, 가우슈(목동이란 뜻의 포르투갈어, 히우 그랑지 두 술 주리그의 이름이기도 함)의 고장 히우 그랑지 두 술, 그리고 그곳의 중심지 포르투알레그리이다.
비록 오늘날 브라질 축구의 상징이 상파울루와 히우 제 자네이루(이하 히우)로 양분되었지만 올해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남미 최고 권위의 클럽대항전) 우승컵을 포르투알레그리의 인테르나씨오날이 가져갔듯, 포르투알레그리 축구는 상파울루와 히우로만 브라질 축구를 설명하는 시도에 커다란 빈자리를 느끼게 해준다.
또한 둥가, 루시우, 타파레우, 팔캉, 니우마르(이상 인테르나씨오날), 호나우지뉴, 에메르송, 루이스 펠리피 스콜라리 (이상 그레미우, 스콜라리의 경우 그레미우에서 감독만 역임했지만 역시 히우 그랑지 두 술 출신) 등 브라질 축구에 없어서는 안 될 축구인들이 바로 포르투알레그리와 히우 그란지 두 술에서 자신의 축구 인생을 시작했다.
브라질 축구의 기원, 포르투알레그리
포르투알레그리가 브라질 축구에서 가진 또 다른 중요성은 바로 이곳에서 브라질 축구가 처음으로 시작됐다는 데 있다.
포르투알레그리는 브라질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히우 그랑지 두 술 지역에 위치, 브라질에서 기후가 가장 서늘하다. 그래 봤자 제주도와 비슷한 온화한 기후지만, 가장 유럽과 비슷한 기후 덕에 유럽의 백인 이민자들이 집중적으로 몰려들었고 특히 독일인 이민자들이 자신들의 새로운 터전으로 이곳, 히우 그랑지 두 술을 선택하곤 했다.
그래서 히우 그랑지 두 술 주에는 노부 암부르고(Novo Hamburgo, 새로운 함부르크라는 포르투갈어), 상 레오폴도 같은 독일식 지명이 흔하고 인접한 우루과이, 아르헨티나처럼 백인의 비율이 80%에 달할 정도로 브라질에서 가장 백인의 비율이 높은 지역이기도 하다.
참고로 위에서 언급한 둥가, 타파레우를 비롯, 이번 남아공 월드컵에 참가한 엘라누, 브라질이 자랑하는 세계적 모델 지젤리 뷘첸(영어식으로 지젤 번천) 등이 대표적인 독일 혈통의 브라질인이다.
이렇듯, 포르투알레그리와 히우 그랑지 두 술은 근대 브라질에서 유럽과의 접촉이 가장 적극적인 공간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어떤 지역보다 당시 유럽 최고의 오락거리인 축구 역시, 가장 먼저 접할 수 있었다.
1900년, 브라질 최초의 축구 클럽 SC 히우 그랑지가 히우 그랑지 시에서 창립되었다. 물론 보타포구, 플라멩구, 바스쿠 다 가마처럼 19세기 후반부터 클럽의 역사가 이뤄진 경우도 있지만, 이들 클럽에서 축구가 행해진 것은 20세기 이후의 일이다. 히우 그랑지의 뒤를 이어 1903년에는 그레미우가 포르투알레그리를 기반으로 창단되었고 1909년에는 그레미우의 최대 라이벌이 될 인테르나씨오날이 창단된다.
그리하여 남미에서 격렬함으로 둘째라면 서러워할 라이벌 관계가 성립되었다. 인테르나씨오날의 창단이 그레미우의 지나친 독일 중심주의에 반발, 이탈리아 계와 아조레스(대서양 한가운데 포르투갈의 섬지방) 계를 중심으로 이뤄져 포르투알레그리의 유색인종을 포섭하며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도시의 상류층(그레미우의 독일계)과 노동계층의 감정싸움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물론, 인테르나씨오날의 레전드인 둥가, 타파레우가 독일 계이고 그레미우의 레전드 호나우지뉴와 에메르송이 흑인이듯, 클럽 창단 당시의 인종적 성격은 오늘날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어쨌든, 양팀의 격렬한 라이벌 감정은 오늘날 히우 그랑지 두 술 지역을 넘어 브라질 전국 무대, 혹은 남미 클럽 대항전에서도 이루어질 만큼, 양 팀의 발전에도 분명 큰 도움이 되었다. 서로 경쟁하듯 발전을 거듭한 그레미우와 인테르나씨오날은 오늘날 브라질 축구의 10대 명문으로 자리 잡아 상파울루와 히우 제 자네이루로 양분될 뻔 한 브라질 축구에서 만만치 않은 포르투알레그리의 축구를 대변하고 있다.
그레미우
창단: 1903년 업적: 자국리그 2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2회, 주리그 36회 우승
비록, 브라질 축구의 제3지대, 포르투알레그리를 연고로 하지만, 그레미우는 지난해 브라질 축구협회가 집계한 브라질 축구클럽 랭킹에서 코린찌안스, 플라멩구 등 상파울루와 히우 제 자네이루의 명문 클럽을 모두 따돌리고 당당히 1위에 올랐다. 최근 5년간 그 치열한 브라질 세리에-A에서 단 한 차례도 10위권 밖으로 밀려난 적 없는 꾸준한 성적이 크게 작용한 셈이다.
클럽의 전성기는 1980년대 초반과 1990년대 중반을 들 수 있다. 1981년, 첫 브라질 전국리그 타이틀을 획득한 그레미우는 이듬해 전국리그 준우승을 거두더니 1983년에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거둬 남미 정상에 오르는 기쁨을 맞이했다. 그리고 1984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다시 결승 무대에 올라 준우승을 차지하며 클럽의 명성을 남미 전역으로 확대했다.
1990년대 중반에는 에메르송이라는 걸출한 미드필더를 앞세워 1995년 브라질 세리에-A, 1996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를 연달아 제패하며 클럽에 제2부흥기를 몰고 왔다. 2004년, 2부 리그로 강등되는 아픔도 겪지만, 이듬해 2부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곧바로 1부 리그로 복귀했고 이후, 꾸준히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며 브라질 남부의 강자로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현재: 올 시즌 브라질리그 득점왕 조나스, 팀의 주장이자 베테랑 미드필더 호쳄바크, 브라질 대표팀 수문장 빅토르, 예상치 못한 대활약을 보여준 오른쪽 풀백 가브리엘을 앞세워 그레미우는 브라질 세리에-A 2010 대회에서 당당히 4위를 기록했다. 공수간의 짜임새가 돋보였는데 특히, 팀 득점에서는 68득점으로 리그 최다 득점을 기록했다. 비록 플레이오프를 거쳐야 하지만, 2년 만에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무대에 복귀하게 되었다.
주요배출선수: 호나우지뉴, 에메르송, 안데르송(현 맨유), 지우베르투, 그라피테, 막시 로페스, 장 보세주르, 세바스티안 아브레우 등
레전드★ 우고 데 레온(수비수, 1958년생, 1981-84년 활약)
우루과이 출신의 장신 수비수로 현 그레미우의 감독, 헤나투 가우슈와 그레미우의 1980년대 황금기를 이끌었다. 물론, 데 레온 역시, 지난 2005년 그레미우 감독을 역임한 바 있다.
데 레온은 수비수로는 남미에서 가장 많은 트로피를 획득한 선수이다. 자신이 프로생활을 시작한 우루과이 명문 나씨오날에서 자국리그 3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2회 우승을 이끌었고, 선수 생활 후반기 잠시 몸담은 아르헨티나 명문 리베르플라테에서도 두 차례의 아르헨티나 리그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우승 제조기답게 데 레온은 그레미우에 합류한 바로 그 시즌에 그레미우에 역사 상 첫 브라질 전국리그 타이틀을 안겼다. 데 레온이 가세한 그레미우는 브라질에서 가장 탄탄한 수비력을 선보였고 이듬해 브라질 세리에-A 준우승, 1983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도요타 컵 우승(함부르크 격파), 1984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준우승으로 클럽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후, 브라질의 산투스, 보타보구, 아르헨티나의 리베르플라테 등 남미 명문 구단에서 활약을 계속했고 스페인과 일본에서도 활약한 바 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는 우루과이 대표로 참가, 한국과의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최종 스위퍼로 풀타임 활약하며 우루과이의 1-0 승리를 이끈 바 있다.
인테르나씨오날
창단: 1909년 업적: 자국리그 3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2회, 주리그 39회 우승
창단은 그레미우보다 조금 뒤졌지만, 우승 기록에서는 모든 면에서 그레미우를 앞선다. 특히 지난 7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2010 결승에서 멕시코의 치바스를 꺾고 4년 만에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컵을 브라질로 갖고 왔다. 그리고 4년 전, 브라질의 마지막 남미챔피언도 바로 인테르나씨오날이었다.
인테르나씨오날의 전성기는 1970년대 후반을 들 수 있다. 브라질 대표 팔캉, 칠레 대표 엘리아스 페게로아라는 남미 최고의 미드필더와 수비수를 앞세워 인테르나씨오날은 1975, 1976, 1979년, 이렇게 세 차례나 브라질 전국리그 타이틀을 획득했다.
1980년대는 인테르나씨오날에게 아쉬움이 가득한 시대였다. 1980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대회를 시작으로 1987년과 1988년 브라질 전국 리그에서 준우승을 거둬, 이 시기 준우승만 세 차례 거뒀다. 그래도 둥가, 타파레우를 배출하며 브라질이 1994년 미국 월드컵을 제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0년대 다소 어려운 시기를 겪기도 했지만, 인테르나씨오날은 2006년과 2010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일구며 남미 강자로 우뚝 서는 계기를 맞이했다.
현재: 비록 브라질 세리에-A 7위를 차지했지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이라는 값진 성과로 인해 그들의 올 시즌에 '성공'이라는 꼬리표를 뗄 수가 없다. 아르헨티나의 잊혀진 천재이던 안드레스 달레산드로는 다시 천재의 모습으로 부활했고, 인테르나씨오날에서의 활약으로 인해 아르헨티나 대표팀에도 복귀했다.
최전방의 알렉상드루는 파괴력 넘치는 득점력으로 팀의 공격을 이끌었고 신성, 지울리아누는 고비마다 터지는 알토란같은 득점으로 성인 레벨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포항에서 '따바레즈'로 불렸던 앙드레지뉴도 꾸준한 활약으로 K-리그를 뒤흔들던 자신의 실력을 남미 무대에서 유감없이 발휘했다.
주요배출선수: 둥가, 루시우, 타파레우, 팔캉, 파투, 니우마르, 호쳄박, 카를로스 가마라 등
레전드★ 팔캉(미드필더, 1953년생, 1972-80년 활약)
1980년대 브라질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이다. 브라질 대표로 1982년 스페인 월드컵과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참가했고 1982년 대회에서는 실버볼을 수상했다. 2004년, 펠레, 마라도나 등 20세기 축구 영웅들과 함께 FIFA 100인에 선정되었다.
팔캉은 히우 그랑지 두 술 바로 북쪽에 위치한 상타 카타리나 주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의 고향에 이름을 내세울 만한 클럽이 없던 관계로 포르투알레그리의 인테르나씨오날에서 자신의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그러나 인테르나씨오날에서 활약한 8년의 시간은 팔캉을 뒷날, 브라질 대표팀의 중추적 미드필더로 성장하게 하는 데 커다란 디딤돌이 되었다.
번뜩이는 재치와 화려한 개인기,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팔캉은 브라질 무대 최고의 미드필더로 거듭났고 당시 남미 최고의 수비수이던 팀 동료 엘리아스 피게로아와 함께 인테르나씨오날을 1970년대 후반, 브라질 최강으로 이끌었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팔캉은 1978년과 1979년 브라질 리그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고 1980년 여름, 이탈리아 명문 AS 로마로 이적하게 되었다.
이후 팔캉은 지쿠, 소크라테스와 브라질의 1980년대를 이끌며 당대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로 발돋움한다. 특히, 팔캉이 로마로부터 받던 10,000파운드의 주급은 당시 세계 최고의 주급이었다 한다. 자신의 주급에 발맞춰, 팔캉은 로마를 1982/83 세리에-A 우승으로 이끌었고 이듬해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로마를 결승(리버풀에 패배)에 올려놓기도 했다.
[사진=호나우지뉴, 둥가, 안데르송, 파투, 데 레온, 팔캉 (C) 호나우지뉴, 둥가 개인 홈페이지, 맨체스터 유나이트, AC 밀란 공식 홈페이지, 테르세이루템푸.com, 삼바풋.com]
윤인섭 기자 press@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