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 나금주 기자] '선녀들-리턴즈' 선녀들이 일본에 의해 안타깝게 희생당한 한인들을 추모했다.
5일 방송된 MBC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45회에서는 김혜윤, 유병재, 김종민, 설민석, 전현무가 사이판 특집 3탄을 함께했다.
이날 선녀들은 노스필드 활주로를 찾아갔다. 강제 동원된 한인들이 만들어낸 활주로였다. 김혜윤은 "아이들에게 비행장을 닦으라고 시켰는데, 전쟁 중이었다. 폭격을 피하면서 닦아야 했다"라고 밝혔다. 전현무는 "목숨 걸고 하는 거다"라며 분노했다.
김종민은 "오줌 싸움이 있었다. 땡볕에 배고프고 목이 너무 마르지 않냐. 본인 소변을 숨겨서 먹었는데, 그것마저도 빼앗길까 봐 싸웠다고 한다. 그러다 감시하는 사람들에게 체벌을 당하고"라고 말했고, 전현무는 "구타를 할 게 아니라 물을 갖다줘야지. 최소한 물은 줘야 할 거 아니냐"라며 안타까워했다.
설민석은 "아이러니한 게 강제로 끌려온 우리가 일본 제국주의의 날개에 디딤돌을 만들어준 셈이다. 그런데 복수의 날개를 달고 일본 본토로 발진하는 미군들의 디딤돌이 될 거라곤 그땐 아무도 알지 못했다"라고 밝혔다. 김종민은 "디딤돌인 줄 알았는데, 걸림돌이 되어버렸네"라고 했다.
이어 선녀들은 2차 세계대전 원자폭탄을 보관했던 적하장에 도착했다.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첫 번째 원자폭탄 적하장이었다. 설민석은 "일왕이 바로 항복해야 하는데, 8월 15일에 한다. 일왕을 비롯한 고위 관료가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라고 밝혔다. 설민석은 "일본은 가해국이자 유일한 원폭 피해국이라고 하는데, 조선인 피해자도 엄청났다고 한다"라고 했다.
전현무는 "추정치로는 7만여 명이 피폭당하고, 4만여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일본은 한인 피해자를 1만 명으로 말하고 있다고 한다"라고 밝혔다. 심지어 2차 피해는 포함돼 있지 않은 집계였다.
이어 선녀들은 또 다른 자살 절벽으로 향했다. 설민석은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에 관해 "미군이 처음 느낀 충격과 공포는 엄청났을 거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고 한다. 가미카제 명령이 처음 내려졌을 때 군부에서도 이해 못했고, 아무도 안 가겠다고 했다"라고 밝혔다.
설민석은 "당시 대위였던 세키 유키오가 지원했지만, 일왕, 일본을 위한 게 아니라 아내를 위해 싸우러 가는 거라고 했다"라고 했다. 유일한 생존자 역시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죽었다고 하는데, 그런 전우는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 '오카상(어머니)'을 외쳤다"라고 했다고. 일본의 침략 전쟁 미화에 이용당했던 것.
전현무는 "나도 그렇다고 믿고 있었다. 우리랑 너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집단군국주의의 망상이 빚어낸 참극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람들도 사람이었던 거 아니냐"라고 말했다.
그중엔 우리 한인들도 있었다. 설민석은 "그중 탁경현이란 분이 있는데, 전쟁 후 군인 전용 식당을 운영하던 일본인 여성이 방송에서 탁경현의 유족을 찾으며 알려졌다"라고 밝혔다. 그렇게 희생된 수십여 명의 한인 가미카제 부대원들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죽어서도 일본 침략 전쟁 미화에 이용되고 있다고.
한인들의 억울한 희생은 끝이 없었다. 동굴에 숨었던 한인 민간인들이 미군에 투항하려고 할 때 일본군이 옥쇄 작전을 했고, 한인들은 희생당했다.
주변에 일본군, 오키나와인 위령비가 많이 있었지만, 한인들을 위한 위령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선녀들은 강제동원된 한인들을 추모하는 한국인 위령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유병재, 김혜윤은 눈물을 흘렸고, 김혜윤은 "이분들이 도대체 뭘 잘못했길래 이런 죽음을 맞이해야 했는지 너무 가슴 아프다"라고 했다.
설민석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란 게 가슴 아프다. 한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살아계신다. 일본 정부에게 배상과 사과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했다고 주장한다"라고 밝혔다. 설민석은 "우리가 잘 사는 게 복수다. 교류는 교류대로 하고, 우린 묵묵히 진정 어린 사과와 배상을 요구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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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금주 기자 nkj@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