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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엑츠] NO.19 COVER STORY - 고시엔에 진출했던 한국인 유학생, 김동민을 만나다②

기사입력 2010.01.15 18:51 / 기사수정 2010.01.15 18:51

김현희 기자

[1편에서 계속] 부산고 톱타자 유망주였던 김동민(20, 후쿠오카 경제대학)은 국내보다 현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았다. 이는 고시엔(甲子園) 출전이 그만큼 일본인들에게 상징적인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일본에서 학생야구에 몸담고 있는 이들이 누구나 꿈꾸는 것이 바로 ‘지역예선 1승’이라고 한다. 야구부 창단 후 처음으로 고시엔에 진출했던 후쿠오카 이이즈카(飯塚) 고등학교 역시 예선에서 1승을 거둔 이후 교내에 ‘1승 기념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그렇다면, 창단 4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1승을 거두지 못했던 이이즈카 고교가 어떻게 김동민 하나로 인하여 변화할 수 있었을까. 국내에서의 추억을 잠시 접어놓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일본 학생야구와 생활스포츠 이야기를 들어 보고자 한다.


▲ 당시 현지 지역 언론에서 대서특필로 보도된 김동민 선수의 활약상. 그는 고시엔 지역 예선에서 0.485의 고감도 타율을 기록했다.

제2부 : 일본으로 떠난 야구유학, 그리고 고시엔 진출

- 일본 야구유학을 떠났을 때에는 언어 문제도 각오했어야 했다. 앞서 이야기했던 강경덕이나 안태경, 정수민 등도 미국에 진출했을 당시에 영어 문제로 애를 먹었던 것으로 안다.

김동민(이하 ‘김’) : (공감한다는 듯) 정말로 처음에는 의사소통이 하나도 안 됐다. 그나마 간단한 영어와 몸짓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6개월 되니 (일본어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1년 되다 보니 일어에 제법 익숙하게 됐다(웃음). 1학년 때에 현지 인터뷰에서도 한마디도 못했는데, 고시엔 진출했을 때에는 제법 말을 잘할 줄 알게 됐다.

- 그러한가? (웃음) 지난번 부모님 인터뷰에서 들으니, 김동민 본인이 이이즈카 학원의 연습벌레라고 들었다. 더군다나 김동민 본인이 오기 전까지 야간 훈련을 하지 않았다고 하던데?

김 : 연습량이 너무 적은 것 같아서 야간 자율 훈련을 했다. 내가 하는 것을 보고 가장 먼저 따라한 친구가 바로 나와 포지션이 겹치는 라이벌이었다. 사실 말씀하신 대로 원래 이이즈카 학원에는 야간 훈련이 없었다. 내가 시작하면서부터 개인 자율훈련으로 정례화가 됐다. 야간 자율 훈련을 통해서 웨이트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다. 원래 내가 살이 잘 안 찌는 체질인데, 웨이트를 하면서 6~7kg이 늘었다.

- 그 정도 연습량이 뒤따랐으니, 야구부 창단 이후 처음으로 고시엔에 진출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 본인이 직접 체험했던 ‘일본 고시엔’은 어떤 대회였나?

김 : 일본 사람들이 야구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프로에 가기 위해서라고 보는가? 아니다. ‘고시엔’에 가기 위해서다. 꿈이 ‘고시엔’이다. 실제로 내가 그 무대에 서 보니 알 것 같았다. 스트레칭 시간 등 세심한 것까지 배려를 해 준다.

다만, 대회 당일에는 부모님과도 말을 못 해봤다(웃음). 한국에서는 반가운 마음에 인사라도 할 수 있지만, 일본에서는 그게 안 됐다. 결국, 고시엔 본선 1회전에서 부모님 얼굴을 못 봤다. 시합만 했다. 경기 자체에만 집중할 수 있을 만큼 권위 있는 대회다. 관중 역시 원활한 경기 진행을 위해 한꺼번에 입장시켰다가 한꺼번에 퇴장시킨다. 개인별로 입/퇴장할 수 없다. 그래서 당시 관중석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계실 부모님 얼굴도 못 봤다(웃음).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지역 자원봉사자들이었다. 고시엔을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자기 지역에서 고시엔이 열린다는 자부심도 강했다. 그리고 일본에서 고시엔 한 번 다녀왔다는 이유로 우리를 우러러보기도 했다. ‘고시엔’ 이야기가 현지에서 30%는 먹고 들어간다(웃음).

- 그러나 후쿠오카 지역예선을 통과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명문 학교들 가운데 이이즈카 고교는 철저한 무명 아니었는가.

김 : (고개를 끄덕이며) 후쿠오카의 야구 수준이 정말 높다. 강팀이 많다. 그래서 지역 예선 통과는 생각도 안 했다. 더구나 우리는 에이스가 한 명밖에 없었다. 지역 예선 우승을 위해서는 6~7경기를 연달아 이겨야 했는데, 이는 우리에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고시엔에 출전하는 팀은 하늘이 정해준다는 말도 있을 정도다. 아무리 잘하는 팀이라도 하늘이 정해주지 않으면 못 간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 우리 야구부가 창단 후 처음으로 고시엔에 진출하고 나니, 자부심도 생겼다.

이에 앞서 우리가 큐수 대회에 나간 적 있었는데, 그 한 경기에서 이겼다고 학교 측과 지역 사회에서 교내에 비석을 세워줬다(웃음). 그 전만 해도 정말 못 하는 팀이었기에 1승의 값어치가 상당했던 것 같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역 예선 우승 후 또 비석을 세워 놨다. 지금 학교에 비석이 두 개 있다(웃음). 지금은 도내에서도 주목받는 팀이 됐다.

- 고시엔에 진출했을 당시 현장상황을 듣고 싶다.

김 : 관중 3만 명이 꽉 들어찬 운동장에 몸 풀러 들어갈 때 가슴이 뛰는 것보다 상당히 벅찼다. ‘이런 곳도 있구나!’라는 생각도 컸다. 고시엔 구장 잔디 상태도 최상이었고, 흙도 스프링 달린 것처럼 푹신푹신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본선 1회전에서 만난 상대가 고교 최상급 투수였다. 시속 152km를 던졌는데, 아무리 봐도 상대가 안 됐다. 그렇지만, 우리가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 2회에 찬스가 있었지만, 3루 주자를 불러들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큰 경기 경험도 없어 수비 에러 역시 많았다. 또한, 처음 고시엔에 진출하다 보니 학교 측에서 응원하는 방법도 몰랐던 것 같았다. 반면 상대 학교는 응원전도 화려하게 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1안타, 1도루를 기록했다.

- 패하고 나면 고시엔 구장에서 흙을 가져오는 전통이 있던데?

김 : 흙을 퍼담는 순간 너무 아쉬웠다. 경기를 더 해서 많은 관중 앞에 서고 싶었다. 작은 병 한 개, 큰 병 한 개에 넣어 가져 왔는데, 부모님께서 TV 위에 놓고 매일 쳐다보신다고 한다(웃음). 영원한 추억이 될 것 같다. 고시엔에 출전하고 보니, 롯데 자이언츠의 응원문화가 떠올랐다. 많은 관중 앞에서 응원받고 야구하는 것이 정말 대단한 축복이라 생각한다.

- 만약에 부산고에 남아있었다면, 2009시즌 드래프트에 참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드래프트에서는 오지환(LG 트윈스), 안치홍(KIA 타이거즈) 등을 제외하면 좋은 내야수가 드물었다. 본인이 지명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는가?

김 : 일본에 가서 야구가 늘었다고 생각한다. 기숙사에만 있다 보니. 하루종일 야구생각만 하게 됐다. 따라서 국내에 있었다 해도 프로지명 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솔직히 365일 중 한국 들어오는 기간 빼고 일본 내에서는 야구만 생각한다. 야구부 쉬는 날이 1년에 10일밖에 안 된다. 하루종일 야구만 생각하고, 야구만 하게 된다.

- 그래서 이이즈카 고교 졸업 이후 후쿠오카 경제대학으로 진로를 정하게 되지 않았는가. 그래, 어떠한가? 일본 대학 야구와 고교야구의 차이가 몸으로 느껴졌는가?

김 : 수준 차이를 느꼈다. 고교야구에서는 보통 공이 빨라 봐야 140~144km에서 구속이 형성되는데, 대학 야구는 평균 148km다. 볼 끝과 컨트롤에도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변화구 각 차이가 너무 크고, 포크볼/체인지업 구사가 많아 자연스럽게 타율도 떨어지게 됐다. 고교 야구에서 알루미늄 배트만 쓰다가 대학 때 나무 배트를 쓰기 시작한 것도 적응에 큰 어려움을 느꼈다. 솔직히 나무배트 쓰고 처음에는 내야도 못 넘겼다(웃음). 그런데 후반기에 나무 배트 적응이 끝났는지, 방망이에 감이 오면서 홈런도 잘 나오더라. 어떻게 쳐야 하는지 이제 알게 됐다. 현재까지 정확히 3할을 치고 있다.

- 전화 통화로 듣고 보니, 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김 : 신인상과 특별상을 받았다(웃음). 특별상은 9번째 리그전 경기에서 만루 홈런을 때리면서 받았다. 고교 때에도 9회 말 역전 만루 홈런을 때린 바 있었지만, 그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 일본은 그런데 학업과 운동을 철저하게 병행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공부는 어느 정도 하는가?

김 : 학점은 두 과목 빼고 다 수료했다. 시험 기간 내에는 정말로 열심히 공부하게 된다. 출석률이 좋아 성적도 괜찮게 나왔다(웃음). 고교 때에도 그렇지만, 시험 성적 안 되면 경기 못 나갔다. 현재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다.

-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일본 학생 야구가 ‘멘투멘’에 약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경험해 보니 어떠한가?

김 : 고교 때 슬럼프가 걸린 적 있었는데, 제아무리 연습해도 ‘이 타격폼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 때가 있었다. 옆에서 가르쳐 주고 지도해 줄 수 있는 코치님이 있다면 분명 좋지 않은 부분을 고칠 수 있을 텐데, 내가 전문가가 아니라서 확실히 세세한 부분에 대한 것은 모르는 부분이 많게 된다. 사실 일본 학생 야구는 우리나라 같지 않게 감독/코치님들이 뒤에서 지켜만 본다. 그래서 한국에 올 때마다 개인 연습을 할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은 ‘부산 베이스볼 클리닉’ 사회인 야구에 감사 인사를 건네고 싶다.

- 정말로 그렇다면 본인이 원하는 것을 코치에게 물어볼 수 있지 않은가?

김 : 솔직히 학원스포츠는 생활스포츠의 일환이기 때문에 생각보다 운동량이 적다. 수업받는 날에는 노크를 아예 안 한다. 월~금요일에는 종합 타격 연습을 하고, 토/일요일에는 프리 베팅을 한다. 사실 야구부 인원은 많고(120여 명), 시간은 적어 세세한 부분에 약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 이번에는 대학 선배인 김무영 선수(소프트뱅크 호크스) 이야기를 해 보자. 몇 번 만나보았는가?

김 : 고교 때 한 번, 대학 때 한 번, 총 두 번 만났다. 고교 때에는 야구에 관한 것 얘기 안 하고 주로 일상에서 할 수 있는 편안한 이야기를 했다. 대학 때 만났을 때에야 야구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소프트뱅크 연습량 비롯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참 좋으신 분이다.

- 타국에 나가 있다 보면, 본인도 ‘국가대표’에 대한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은데?

김 : 물론 희망이 있다고 본다. 사실 WBC와 베이징 올림픽 때 우리나라 응원한다고 일본 친구들과 싸울 뻔하기도 했다(웃음). 그러다가 진짜로 우리가 이기면 아무 말 못 하고 슬그머니 빠져나오게 된다(또 웃음).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싶다. 제의가 들어오면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다. 2013 WBC, 2014 인천 아시안게임, 2018올림픽 등에서 기회를 잡고 싶다. 국가가 나를 부를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다.

- 국가대표 외에 장래희망이 있다면?

김 : 일본 프로를 가서 미국에 진출한 후 한국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싶다. 한-중-일 3개국 야구를 모두 경험한 이상훈-구대성 선배님과 같은 선수가 되고 싶다. 실제로 3개국 야구를 모두 경험한다면, 야수로는 (3개국 야구를 경험한) 내가 처음이지 않겠는가.

- 마지막 질문이다. 본인에게 야구란 무엇이고, 대한민국이란 무엇인가?

김 : 야구는 한국에 있을 때에는 ‘성공’하기 위한, 꿈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지만, 일본 가고 나니 야구를 ‘사랑해서’ 하게 된 것 같다. 정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마인드가 많이 바뀌었다. 나에게 야구란 ‘좋아서 하는 것’이다.

일본에 있으면 누워 있다가 우리나라 노래를 듣고 나면 눈물나려고 한다. 역시 우리나라가 낫다는 생각이 든다. 전에는 그런 것이 전혀 없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기도 한다. 객지생활이란 것이 다 그런 것이 아닌가. 이는 비단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웃음). 우리나라 사람들, 외국 나가고 싶어하지만, 우리나라가 최고라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나에게 대한민국이란 그런 존재다.

※ 김동민(후쿠오카 경제대학)

1. 생년월일 : 1991. 2. 9

2. 학력 : 양정초 - 사직중 - 부산고 - 이이즈카 고교 - 후쿠오카 경제대학

3. 포지션 : 내야수(주 포지션 유격수)

4. 특이사항 : 전 일본 고교야구 선수권대회(일명 고시엔) 본선 출전. 일본 소프트뱅크 호크스 김무영 선수 대학 후배

[사진=김동민 선수 (C) 엑스포츠뉴스 DB 김현희 기자]



김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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