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5.09.06 09:22 / 기사수정 2005.09.06 09:22
1990년대 후반, 세계 축구는 이른바 '4대 미드필더'의 시대였다. 이전까지 축구가 강력한 포워드를 중심으로 한 '공격적인 성향'의 흐름이 세계 축구를 지배했다면,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계기로 중앙, 즉 허리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었다. 이 당시 등장한 지네디 지단(프랑스)이나 루이스 피구(포르투갈), 데비이드 베컴(잉글랜드), 후안 세바스찬 베론(아르헨티나) 등은 모두 걸출한 미드필더 플레이어들로 세계 축구의 흐름을 중원으로 돌려놓으며 '미드필더'들의 시대를 만들어 냈다. 지단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조국에 우승컵을 안기며 최고의 미드필더로 우뚝 섰으며, 1991년 세계 청소년 선수권에서 포르투갈을 우승에 올려놓은 피구는 에우제비우 이후 무너져가던 포르투갈을 다시 세계 정상으로 견인하게 된다. 베컴도 무너진 자존심의 축구 종가 잉글랜드를 구원할 한줄기 빛으로 떠올랐고, 베론 역시 공격 라인에 비해 무게가 떨어졌던 허리를 받치면서 아르헨티나의 계속되는 진군에 힘을 보태고 있었다. 세상은 이들을 가리켜 '세계 4대 미드필더'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이들은 십 여년이 흐른 지금에도 최고의 플레이어들로 각광을 받고 있다. 하지만, 4대 미드필더를 칭하는 데 있어 조금씩의 이견이 뒤따르기도 한다. 베컴은 실력보다는 영화배우를 연상케 하는 수려한 외모와 각종 뉴스메이커를 생산하는 인기 덕분에 4대 미드필더에 올랐다는 혹평이 있는가 하면, 베론은 기량적인 면에서는 부족함이 없지만 팀을 이끄는 리더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며 그들이 4대 미드필더에 속하는 것을 부정하는 팬들도 많았다. 비운의 스타 '라이언 긱스' 이때, 항상 그들의 이름을 대신해 거론되는 선수가 있었는데 바로 '비운의 스타' 라이언 긱스다. 90년대를 넘어 지금까지도 최정상급의 왼쪽 터치 라인의 주인으로 군림하고 있는 라이언 긱스. 만약 이런저런 요소들을 모두 배제하고 오로지 경기에서의 실력만으로 4대 미드필더를 경쟁시킨다면 최고라고 자부하기에 손색이 없다.
그렇다면, 라이언 긱스는 그처럼 화려한 경기력과 최고의 플레이어임에도 불구하고 왜 자신의 이름을 최정상에 세우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바로 긱스의 조국인 웨일스가 단 한 번도 월드컵, 유로 같은 메이저 대회에 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웨일스는 영국을 구성하는 4개의 연방 중 하나이다. 인구 290만의 소도시의 웨일스는 다른 연방 국가인 잉글랜드나 북아일랜드에 비해 축구 저변과 인프라가 그다지 확고하게 자리 잡지 않았다. 물론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나 여타 다른 대륙의 축구 저변보다야 훨씬 앞선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지만, 축구가 제1의 스포츠인 유럽에서의 웨일스는 그다지 높은 수준의 축구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리 많지 않은 인구도 축구의 활성화 부족에 한 몫을 했지만, 정작 중요한 이유는 프리미어리그를 운영하고 있는 잉그랜드에게 있다. 잉글랜드의 프리미어리그가 영국 축구계 전체에서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상대적 소국인 웨일스로서는 양질의 프로리그를 운영하며 좋은 선수를 배출해 내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웨일스에 라이언 긱스라는 걸출한 스타플레이어가 태어나긴 했지만, 라이언 긱스 하나만 갖고는 세계무대에 명함을 내밀기 어려웠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2006 독일 월드컵' 유럽지역 예선에서도 긱스가 속한 웨일스는 6그룹에서 단 1승도 챙기지 못한 채, 5위에 머물러 있다. 남은 경기가 있긴 하지만 이번에도 월드컵 본선의 꿈은 무너졌다. 지난 4일 열렸던 잉글랜드와의 예선 7차전에서도 웨일스는, 잉글랜드의 조 콜에게 뼈아픈 결승골을 내주며 0-1로 패배 마지막 남은 희망의 불씨마저 꺼트리고 말았다. 2무 5패로 아제르바이잔에 골 득-실에서 앞서 꼴찌를 면하긴 했지만, 라이언 긱스라는 이름을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까운 성적임에 틀림없다. 조국을 웨일스를 택한 긱스 긱스는 자신이 14살이 되던 해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소년팀과 계약하면서 맨체스터와 길고 긴 동거에 들어갔다. 유소년 팀에서도 긱스는 주장까지 맡으며 발군의 기량을 보였고, 2년 동안은 잉글랜드 유소년 대표팀의 일원으로 맹활약하기도 했다. 이런 긱스를 놓칠리 없는 퍼거슨 감독은 16살이 된 긱스와 1990년 정식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후 긱스는 조지 베스트의 등번호 11번을 물려받으며 조지 베스트의 향수에 젖어 있던 팬들의 눈길을 자신에게 돌리기 시작했고, 맨체스터의 확고한 왼쪽 윙어로서 입지를 굳히게 된다. 당시 팬들 사이에서는 조지 베스트의 영광스런 등번호를 물려받은 것이 웨일스 출신의 긱스란 선수인데 대해 적지 않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도 4개의 연방 사이에 적지 않은 지역감정이 뿌리 깊게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긱스가 이러한 틈을 헤집고 팬들과 팀 관계자들을 설득하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북아일랜드 출신의 조지 베스트도 데뷔 초반엔 이런 고초를 겪어야 했음은 물론이다.
긱스는 이후 프랑스 출신의 에릭 칸토나와 함께 맨체스터의 중흥기를 이끌어 나가기 시작했고, 이는 올드 트래포드에게 1960년대 이후 맛보는 참으로 감격스러운 영광이었다. 이렇게 긱스의 명성과 활약이 눈부시자 잉글랜드 축구협회와 맨체스터의 관계자들은 긱스를 잉글랜드로 귀화시키고자 부단한 노력을 가했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잉글랜드 선수로 남기고 싶어했다. 하지만,긱스는 모든 선수들의 꿈인 '월드컵'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는 조국 웨일스를 택했고, '비운의 스타'라는 서글픔마저 감수했다. 긱스가 축구 선수로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던 잉글랜드 대신 웨일스를 택한 가장 큰 이유는 어머니 때문이었다. 자신의 유소년 시절 이혼한 홀어머니를 위해 긱스는 조국 웨일스를 택했고, 웨일즈 엠블럼을 가슴에 다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 뒤에도 긱스는 잉글랜드의 질긴 구애를 끝내 외면한 채, 웨일스를 월드컵과 유로 대회에 진출시키기 위한 외롭고 긴 싸움을 시작했다. 4일 벌어졌던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패한 뒤 가진 인터뷰에서 긱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목표는 월드컵이 아니다. 유로 2008에 진출하는 것이다. 우리 팀의 미래인 어린 선수들은 좋은 경험을 쌓고 있고 다음 경기는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이 경기에서 풀 타임 출전하며 투혼을 불살랐던 긱스의 메이저대회 진출의 꿈은 아직 진행중인 것이다. 긱스의 재능을 일찍이 발견하고 맨체스터로 영입한 스승이자 동반자인 알렉스 퍼거슨 경은 라이언 긱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긱스가 경기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세계의 어떤 팀도 그의 스피드와 돌파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긱스가 있어 행복하다." 이제 32살이 된 긱스는 '맨체스터의 미래'라는 포르투갈 출신의 C.호나우두와 에인트호벤에서 공수된 '한국산 신형 엔진'박지성과 주전 경쟁을 펼쳐야 하는 입장에 처했다. 권불십년이라 했던가, 맨체스터의 왼쪽 터치 라인을 십여 년 넘게 호령했던 긱스는 젊고 강한 도전자들과 맞서야 하는 위기에 처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과의 대결에 대한 결과와 상관없이 지금까지 그가 이룩한 성과에 대한 명예나 맨체스터와 조국 웨일스를 위해 헌신한 그의 지난날은 결코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 '왼쪽 터치 라인의 주인'라이언 긱스, 그의 폭발적이고 화려한 경기는 영원히 팬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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