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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프로야구] 6. 일어나라 임수혁

기사입력 2005.07.10 23:45 / 기사수정 2005.07.10 23:45

김광수 기자

  99년 롯데와 삼성간의 플레이오프 3차전. 롯데는 앞선 4경기에서 1승 3패로 한국시리즈 진출의 좌절될 위기에 처했고, 삼성은 3경기 중에 1승만 추가하면 6년만의 한국시리즈가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롯데는 특유의 단결력으로 3연승을 차지, 삼성의 한국시리즈 행을 좌절시킨다. 3:5로 뒤져 패색이 짙던 7차전 9회초 롯데의 공격. 이 선수의 동점 홈런 한방은 롯데를 부활시키고 결국 11회초 결승점을 올려 극적인 한국시리즈에 진출한다. 삼성은 다 잡았던 한국시리즈 행이 좌절된 울분을 삼켜야 했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명승부로 꼽히는 99년 플레이오프. 7차전에 극적인 한 방을 터트린 이 선수는 병상에 누워 있다. 갑작스러운 심장 발작으로 5년이 넘게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임수혁이다.


  상무 입대로 2년 늦은 프로생활


  대학생활 4년 내내 국가대표 포수로 활약한 임수혁은 한-미-일 3국을 다 거친 최초의 선수로 기록된 이상훈, 마해영 등과 같이 뛰면서 소속팀을 이끌었다. 졸업 후 병역문제 해결과 국가대표 차출을 위한 상무 입대로 프로진출을 2년간 유보한 그는 94년 계약금 5500만원 연봉 1500만원으로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한다. 입단 첫 해, 수비형 포수였던 강성우와 터줏대감이었던 김선일에게 밀려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했던 그는 다음해 두 선수보다 월등히 앞선 공격력을 바탕으로 일약 주전으로 도약한다. 당시 소총부대였던 롯데의 타선에 호쾌한 장타력으로 새 바람을 불어넣던 그는 이듬해 113경기에 출장 .311의 성적에 116안타 11홈런 76타점으로 최고의 활약을 보이며 팀에서 빠져서는 안 될 주축 선수로 성장한다.


  갑작스런 무릎부상, 그리고 반쪽짜리 선수


  97년에도 여전히 그는 롯데의 주전포수로 활약한다. 한창 잘나가던 성적을 거두고 있던 그는 전반기가 한창 진행중이었던 5월 한화와의 경기 도중에 슬라이딩을 하다가 오른쪽 무릎을 크게 다쳐 남은 경기에 출장하지 못하는 고초를 겪는다. 그가 빠진 롯데는 주선 선수들의 부상과 부진으로 총체적인 난국에 빠져 결국 꼴찌라는 참담한 성적을 거두게 된다.


  뼈를 깎는 재활 끝에 그는 98년 주전자리를 자시 꿰차게 됐지만 무릎부상의 후유증이 컸던 탓일까? 예전에 보여주었던 호쾌한 타격을 보여주지 못했다. 110경기에 .247의 타율에 83안타 9홈런 55타점의 성적으로 부상전의 성적에 비해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두었다. 롯데의 팀성적이 2년연속 곤두박질 쳤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로 모른다.
 

  2년연속 참담한 결과를 거둔 롯데는 99년 팀의 개편을 진행하던 중, OB에서 홍성흔과 진갑용에 밀려 빼어난 기량에도 불구하고 1군과 2군을 전전하던 포수 최기문을 영입한다. 수비형 포수였던 그의 영입은 임수혁이 더 이상 주전으로 뛸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과 동일했다. 입단 후, 호쾌한 타격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평가를 받았던 수비력이 항상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강성우와 번갈아 가며 마스크를 썼던 그였기 때문. 거기에 강성우까지 공격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줘 그는 좀처럼 마스크를 쓸 기회를 잡지 못한다. 임수혁의 1루수 전향이 이때부터 거론되기 시작했지만 마해영이라는 워낙 강한 경쟁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간간히 대타로 혹은 지명타자로만 출전했다. 최기문의 합류는 롯데의 전력에 새바람을 불어넣으며 돌풍을 일으켰고 결국 드림리그 우승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99년 플레이오프에서 그는 단 한 개의 극적인 홈런으로 그의 저력을 확인시켜 준다. 플레이오프에서 대타로 나와 겨우 4경기에서 3타수 1안타에 그친 그를 쓴 건 김명성 감독의 모험이었으나 그 경기에서 믿을만한 선수는 장타력을 가진 임수혁 밖에 없었음을 시인하는 결과이기도 했다. 최기문이나 강성우에게 밀려 기회를 잡지 못했을 뿐이지 그는 여전히 롯데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선수임을 이 한경기만으로도 충분히 보여준 셈이다.


  갑작스런 심장 마비, 그라운드를 영영 떠나다


  2000년 4월 18일 LG전. 선발로 출장한 그는 유지현의 실책으로 1루 주자로 나간 뒤 후속타자 우드의 우전안타로 2루에 진출했다. 그러나 2루에서 갑작스럽게 그는 쓰러졌고, 어쩔줄 몰라 우왕좌왕하던 선수들과 코치, 진행요원들 틈에서 대기하고 있던 엠블런스에 실려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로 향한 그는 병원 측의 응급처치로 호흡과 맥박은 정상으로 돌아왔으나 의식은 되찾지 못했다. 당시 병원 측에서 “CT 촬영 결과 뇌에는 전혀 손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는 상황이다. 의식이 언제 돌아오는지가 문제인데 경과를 지켜봐야 되겠다.”고 하여 모두들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일어나서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임수혁은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고 팬들의 쾌유기원을 아는지 모르는지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이때부터 롯데와 LG, 임수혁 가족 간의 힘겨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서로 떠넘기기에 급급했고 법원의 조정안도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당시 의사가 응급처치만 제대로 했어도 이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목소리가 높았다. 화려하진 않지만 꾸준히 선수 생활을 한 임수혁을 이 지경까지 오게 했으면서 '최소한의 적은 보상금'을 내려고 하는 두 구단의 처사에 팬들은 많은 비난을 퍼부었다.


  설상가상으로 의료계 폐업으로 임수혁은 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수모도 겪었다. 거기에다 롯데는 임수혁을 시즌이 끝나자 전력 보강을 이후로 방출하기에까지 이른다. 롯데가 위기에 빠져있을 때, 선수들이 모자에 20번을 새기면서 단결력을 발휘, 결과적으로 팀을 2년연속 포스트 시즌에 진출시킨 구심점 역할까지 보여주게 한 선수에 대한 예우를 롯데는 무시해 버린 것.


  인과응보일까. 롯데는 이후 3년연속 꼴찌라는 참담한 성적표를 쥐었다. 임수혁 사태에 대한 대응, 프렌차이즈 선수에 대한 홀대는 사직구장을 찾은 많은 롯데팬들의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수혁이 형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마라


  2002년 삼성의 극적인 한국시리즈 우승. 극적인 끝내기 홈런을 쳐 임수혁의 병실을 찾은 마해영은 “간밤에 수혁이 형과 같이 훈련하는 꿈을 꿨다. 수혁이 형이 힘을 준 것이 틀림없다” 며 한국시리즈 첫 우승의 공을 임수혁에게 돌렸다. 팬들로부터 관심이 멀어졌던 임수혁의 관심이 다시 떠오르게 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대선과 맞물려 다시금 피어난 임수혁의 관심에 많은 정치인들이 임수혁의 병실을 방문했다. 어떻게 보면 그에 대한 관심이 살아난 것에 대해 환영을 보낼 수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자 모든 정치인들이 그랬듯이 본색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저 기자들과 당원들 몰고 다니면서 얼마인지도 모를 금일봉을 전달하는게 다였다. 봉투를 내민 그들의 모습에 임수혁에 대한 진심어린 마음을 볼 수는 없었다. 그저 상대후보측이 하니까 우리도 해야 되지 않을까 식이었던 것.


  임수혁을 찾은 많은 정치인들의 행보는 순수한 의미를 퇴색시켜 버리고 말았다. 그 당시 병실을 찾았던 정치인들중에 한 번이라도 더 그를 찾았던 정치인은 누가 있을까. 반면 그를 돕기 위해 선수들은 자신의 애장품들을 경매에 내놓았고 팬들은 얼마되지 않는 금액이어지만 그 애장품을 구매하며 진심어린 쾌유를 기원했다. 

  다시 그가 그라운드에 돌아오길 꿈꾸며...


  4년이 넘는 지루한 법정공방 끝에 임수혁의 가족은 롯데와 LG를 상대로 3억여원의 보상금을 받는 것으로 합의를 끝냈다. 당시 2003년 당시 4억여원의 조정신청에 이의를 제기한 끝에 얻어낸 판결이었다. FA영입을 위해 몇십억원씩 쏟아붓는 구단이 1억원을 아끼기 위해 팀을 위해 최선을 다한 선수와 선수 가족을 이렇게도 고생시킨 대목은 너무나 씁쓸함을 남겼다.


  임수혁이 현역시절에 달고 있던 20번은 최준석이 새기며 뛰고 있다. 그가 보여주고 있는 호쾌한 장타력은 과거 흡사 임수혁 선수를 보는 듯하다.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임수혁의 명성을 이어가기 위해 열심히 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임수혁은 현재 치료차 중국에 머물러 있으며 곧 돌아올 예정이다.
예전에 보여주었던 그에 대한 많은 관심이 지금은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의 희생으로 응급처치 관련 규정이 바뀐 것과 구단이 경기 중 사고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어 전담닥터의 운영으로 선수들이 좀 더 편하게 그라운드에서 뛸 수 있게 된 것을. 이제 그가 그라운드에 돌아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보고 싶다. 코치든 선수든 연습생이든 그가 보란듯이 그라운드에 나서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임수혁의 부친이 그가 그라운드에서 쓰러질 당시 썼던 편지를 올리면서 글을 마무리 한다. 임수혁 선수의 쾌유를 기원한다.



  사랑하는 수혁아 어서 일어나거라


  세상에 너의 명성이 알려질 때부터 내 이름은 덮어지고 '수혁이 아버지'로 바뀌었지만 그것이 나에겐 자랑이었고 보람이었다. 그 날도 내가 도착하여 보니 경기장은 양팀 응원단의 함성으로 가득 찼고 너는 5번 타자로 배정되어 아버지 기분은 너무나 좋았단다. 하지만 경기가 시작되고 네가 1회에 4구로, 2회에 실책으로 출루하면서 아버지의 마음은 왠지 모를 긴장감과 초조함으로 계속되었다. 그때 네가 많은 관중의 환호 속에 2루를 뛰고는 쓰러졌지.. 순간 갑자기 쓰러지는 너의 모습을 보고 정신없이 운동장으로 들어가 병원으로 옮겼는데. 벌써 병원에 누워 있는지 10일이 넘었건만 너는 마치 잠이라도 자는 것처럼 그렇게 누워있구나.


  네가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 저 야구할게요!" 라고 말했을 때 보수적이던 아버지는 늘 마음이 아팠단다. 그렇지만 너는 많은 인내와 노력으로 야구인의 길로 정진하여 강남중학교와 서울고교를 거치면서 너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우리 가정에 즐거움과 기쁨을 항상 가득 채워 주었다. 고려대학교를 나와 상무팀에 입단하면서 체육인으로서 최고의 선망인 국가 대표가 되어 나라의 명예를 지켰지. 아버지는 네가 국가대표 선수가 되어 김포공항을 떠날 때마다 너무나 마음이 뿌듯했단다. 그런 네가 어떻게 이렇게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단 말이냐.


  사랑하는 내 아들 수혁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너의 아들 딸 세현이와 여진이의 간절한 기도가 들리지 않니! 어서 일어나서 아직 초등학교도 못들어 간 이 아이들에게 살아가는 법도 가르쳐 주고 해야지. 내 아들 수혁아! 아비의 애끓는 절규와 기도가 들리지 않니! 부디 오늘까지만 쉬고 내일 아침엔 훌훌 털고 일어나거라. 어서 일어나 아버지와 같이 아침운동도 하고, 너를 사랑하는 스포츠팬들, 선후배 동료, 야구협회 지도자분들, 각 구단 임직원들 등 많은 성원을 보내주시는 분들에게 보답해야지. 수혁아! 어서 일어나거라!


  2000년 4월 28일 중앙병원 중환자실에서 아버지가


사진출처 : 롯데자이언츠 홈페이지



김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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