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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무한대 그 첫번째 이야기 -게일로드 페리-

기사입력 2009.02.27 19:42 / 기사수정 2009.02.27 19:42

홍주형 기자

모든 사람들이 그를 'Cheater' 라고 불리웠다. 공에다가 바셀린을 대놓고 바르고도 그는 300승과 3000삼진을 기록한 대투수였다. 그의 이름은 바로 게일로드 페리였다.

1. 마이너리그 시절
그가 스핏볼러가 되기 이전(그는 1964년 부터 스핏볼을 썼다), 그는 마이너리그에서 촉망받는 유망주였다. 1958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싱글 A에서 9승 5패 방어율 2.39 를 기록했고, 1959년 더블 A에서 10승 11패 방어율 4.05를 기록했다. 그리고 1961년 트리플 A를 초토화 (다승, 이닝 1위)를 한채 1962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데뷔를 하게 된다.

2. 샌프란시스코 시절
1962년, 1963년 3승 1패 방어율 5.23, 1승 6패 방어율 4.03 으로 나름 괜찮은 시즌을 보냈지만 1964년, 1965년 선발과 마무리, 혹은 계투요원을 던지면서 2년 동안 20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마침내 각성이 시작했다.

3. 전성기를 맞이하다.
1966년에 일이었다. 첫번재 경기에서 중간 계투요원으로 1승을 챙긴 그는 그 다음 부터 마리칼과 원투 펀치를 이뤄 쿠팩스-드라이스데일 다음가는 원투 펀치를 만들어냈다. 페리가 던지면 계속해서 거의 이겼고, 실제로 8월 20일까지 페리는 20승 2패를 기록하게 된다. 아니다 다를까. 20승 2패로 시작한 선수는 그 뒤에 딱 한 번, 2001년 로저 클레멘스 밖에 없는 그런 기록이었다 (놀랍게도 2명 모두 약간 정당한 방법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한 명은 공에다가 침이나 바셀린을 바르는 수단을 썼고, 나머지 한 명은 약물로 인한 승리를 기록했다. 하지만 적발된 사람은 클레멘스 한 명 뿐이었다). 이 페이스라면 25승도 충분히 노려볼만 했지만 그의 시즌 승수는 21승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마지막 10경기 1승 6패 방어율 4.32). 하지만 그는 생애 첫 올스타에 선정이 되었다.

1967년에 그는 다소 부진한 스타트를 끊는다. 아니 부진하다고 보다는 정말 운이 없다고 해야 할까? 8월 7일까지 그는 8승 13패 방어율 3.57을 기록했다. 그리고 181.2 이닝을 소화를 했었다. 1966년에 비해 다승 페이스가 2배 이상 하락이 된 셈이다. 하지만 페리는 여기서 뒷심을 발휘하게 된다. 마지막 12경기에서 111.3이닝 7승 4패 방어율 1.05를 기록하는 모습을 보여줘
 (이와중에는 9월 1일 16이닝 무실점 경기도 있었다) 2년 내리 15승 이상 - 250이닝 이상을 던지는 모습을 보여줬다.

1968년에는 투고타저의 절정인 시절이었다. 당시에 미친 투수들이 막 쏟아져 나온 시기였고, 특히 밥 깁슨 같은 경우는 22승 9패 방어율 1.12를 기록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페리도 이 때 승-패에선 불운 (16승 15패)했지만 방어율에서 2.45를 기록했고 3년내리 15승-250이닝 이상을 기록했다. 페리는 이때에도 290.7이닝을 소화를 해냈다. 그리고 깁슨과의 대결에서도 노히트를 작성한다. 1969년 규정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페리의 성적은 변하지 않았다 (19승 14패 방어율 2.44 325.3이닝). 왜냐하면 페리에게는 스핏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0, 1971년에도 2년동안 600이닝이 넘는 투구 내용 (608.7이닝)과 39승 25패 방어율 3.00 을 기록한채 샌프란시스코는 그를 샘 맥도웰과 바꿔 버린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는 금새 후회를 하고 만다.

클리블랜드로 이적한 그는 리그가 바뀌자 마자 팀의 에이스로 변하게 된다. 첫 2년동안 40승 이상을 거두면서 무려 686.7 이닝을 기록하는 엄청난 연투 능력을 보여줬다. 그 뿐만이 아니다. 사이영 상을 처음으로 수상을 했고, 그리고 압도적인 스핏볼 또한 여전한 위력을 발휘했었다. 클리블랜드에서 3번째 시즌 (1974년) 또한 21승 13패 방어율 2.51로 강력한 모습을 발휘했다. 게다가 8년 내리 15승-290이닝을 동시에 작성하는 이닝 이터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1975년 그는 첫 15경기에서 6승 9패 방어율 3.55로 인디언스의 에이스 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인디언스는 짐 비비, 재키 브라운, 릭 웨이츠와 10만 달러를 받고 페리를 텍사스로 보내버린다. 페리는 텍사스와의 남은 잔여 시즌에서 12승 8패 방어율 3.03으로 마무리. 9년 내리 15승-290이닝을 작성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야 만다. 그리고 텍사스에서 남은 2시즌 동안 예전 만큼 이닝 이터 급(?) 은 아니어도 (2시즌 488.3이닝)연속해서 15승을 보여주고 샌디에이고로 이적한다.

샌디에이고로 이적한 그는 바로 사이영 상에 등극을 한다. 양대리그 사이영상을 거머쥔 셈이다. 21승 6패 방어율 2.73에 260.7이닝을 던졌다. 하지만 그도 나이 40이 되자마자 세월에 장사가 없는 걸까? 그는 12승에 그친채, 텍사스로 이적을 하게 된다.

4. 영광, 그리고 마무리.
원 아웃이라는 만화를 보면 거의 끝나갈 무렵에 토아가 이런 말을 했다 (내 기억으로는 18권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내 공따위는 언제든지 쳐낼 수 있게 된다. 나도 속고 속이고 던져왔지만 슬슬 내 공이 통용되지 않을 때가 온 것이다' 그런 순간이 페리에게도 온 것이다. 정말 16년동안 속여서 엄청난 위업을 작성했지만 그도 시간과의 싸움에서 지는 순간이 왔다. 1980년 부터 그의 생애는 저니맨이었다. 텍사스에서 6승 9패 방어율 3.43을 기록했지만 24경기에서 155이닝에 그친 그는 양키스로 이적을 했다. 양키스에서 10경기에 나와 4승 4패 방어율 4.44로 부진. 1981년 애틀란타에서 8승에 그쳤다. 그리고 시애틀로 이적. 그러나 16년동안 속여와서 얻은 승수 덕분인지 1981년까지 통산 297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는 시애틀에서 10승 12패 방어율 4.40 을 기록해 통산 307승. 그러나 그는 바셀린 공이 적발이 되면서 스핏볼을 쓴지 18년 만에 서스펜션 (10경기 출장 정지)을 당한다.  그리고 1983년 로열스에서 선수생활을 마무리 했다. 시간과의 싸움에서 지긴 졌지만 최대한 선방을 했다. 월터 존슨의 3509 삼진을 넘어서 3534삼진으로 마무리 했고, 결국 314승 - 5350.3이닝 - 3.11 방어율 - 3534 삼진이라는 엄청난 성적으로 마무리를 하게 된다.

동시대에 시버-칼튼-짐 파머 때문에 많이 밀린 커리어 (그는 거의 대부분의 커리어를 약팀에서 보냈다)에 가리긴 했지만 페리 또한 엄청난 대투수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마무리는 1991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이 되었다. 



홍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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