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11-27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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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웃 돌아보기 (2)

기사입력 2005.04.25 19:25 / 기사수정 2005.04.25 19:25

김주우 기자


좌투수와 유격수 첫번째


윤석환의 쇠락과 한오종의 방출 등을 전후하여 80년대 후반부터 이어진 좌완투수에 대한 갈증은 OB 특유의 모험 지명과 90년대 스카웃 실패의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진('89)-이상현('92)-유택현('94)-여준홍('95)-한명윤('96)-김영수('97) 등으로 이어지는 끈질긴 좌투수 스카웃은 '5년 간 좌완 선발승 無'라는 처참한 결과로 나타났다. 결국 99년 롯데에서 이적해 온 차명주가 숙적 LG를 상대로 선발승을 따내며 두산은 좌투수에 맺힌 한을 풀게 된다.

거기에 후반기부터 가능성을 보여준 이혜천 또한 시즌 내내 맹활약, 롯데를 상대로 완봉승을 거두는 등(박정태의 연속안타 기록을 저지한 바로 그 경기) 99년 두 선수는 팀의 좌완투수史를 새로 쓰기 시작한다.

실패한 선수들의 면면을 살펴볼 때 유택현, 이진 등의 다소 무리한 스카웃도 눈에 띄는 반면, 김영수와 이상현 등 비교적 검증도가 있는 편인데도 이상하리 만큼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케이스도 있다. 그만큼 프런트, 코칭스탭 양쪽 모두 좌완투수에 대해 극심한 조급증을 갖고 있었고, 가진 능력에 비해 지나친 기대를 받은 것 또한 선수들의 정신적인 측면에 있어 큰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이상현 선수는 공을 뿌리기 직전 눈을 감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 버릇을 수정하자 스피드가 현저히 줄어 결국 고질적인 컨트롤 부재를 해결하지 못하고 은퇴했다고 한다. 그는 장원진, 권명철과 인하대 3인방으로 불렸던 선수로, 포스틸 입단을 선언하고 잠적하는 등 소동 끝에 8천 만원이라는 거액을 받고 입단한 기대주였다.

한명윤은 박명환, 김선우와 함께 우선 지명 3명에 포함된 선수로, 당시 경합했던 선수는 장성호가 아니라 전근표, 양현석이었다. 두 선수가 모두 고교 시절에 좌완투수로 이름을 알린 선수들이었던 반면 1루수였던 장성호는 서울권 팀들의 관심권 밖이었다. 당시 OB에는 막 전성기를 맞은 김종석이 1루에 버티고 있었고 강혁의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던터라 장성호를 지명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두산이 지명한 좌완투수 중 최대어는 단연 김영수를 꼽을 수 있다. 김영수는 고교시절부터 투/타 양면에 모두 두각을 나타냈던 재원으로 대학시절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며 애틀랜타 올림픽에도 출전했다. 한일 슈퍼게임이 열리던 도중 요미우리의 마쓰이 히데키가 "고교시절 한국팀의 괴물투수에게 세차례 내리 삼진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회상한 적이 있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김영수라 밝혀져 화제가 된 바 있다.

98년 가을, OB 투수들을 태운 버스가 빗길에 전복되고 이경필을 비롯한 투수 몇 명은 포스트시즌을 앞둔 상황에서 크고 작은 부상을 입게 된다. 이 당시 창가 쪽에 타고 있던 이혜천은 유리창 밖으로 튕겨져나가 큰 부상을 당할뻔 했으나 옆자리에 타고 있던 김태형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인해 별다른 부상을 입지 않을 수 있었다.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지만 이 당시 이혜천마저 부상을 당했다면 지금까지도 베어스의 좌완 징크스는 지속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김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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