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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 자산관리사가 된 야인, 양현석을 만나다

기사입력 2009.01.16 15:09 / 기사수정 2009.01.16 15:09

유진 기자

[엑스포츠뉴스=유진 기자] 야구선수들이 처음부터 대타나 릴리프 투수를 하고자 야구단에 입단한 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 프로에 입문했다는 사실 자체가 수백 명의 유망주 풀(Pool)에서 살아남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누구나 주전선수로 뛰고 싶고, 누구나 최고가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선수가 결정적인 순간에 약점을 노출한다는 사실이다. 이를 극복하고 최고가 되는 선수들이 있는 반면, 대타요원이나 릴리프 요원으로 출전하는 선수들도 있다. 그러나 결국 대타나 구원투수들이 있어야 선발로 나서는 선수들이 있는 법이다. 특히, 특정 순간에 쓰게 되는 대타작전이 먹힐 경우 그 효과는 배가 된다.

원 포인트 릴리프 역시 마찬가지다. 위기의 순간에 단 한 타자만 제대로 잡아준다면 경기를 역전으로 이끌 수도 있다. 그런 점에 있어서 2007 시즌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은 양현석(前 LG트윈스)은 상당히 안타까운 케이스였다. ‘경희대학교 클린업 트리오’로써 프로무대에서도 큰 활약을 펼칠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큰 꿈을 가슴에 묻은 채 지금은 야구와는 비교적 거리가 먼일을 하고 있었다.

야구선수가 은퇴를 하고 나면 보통 코치직이나 지도자 연수를 받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양현석 선수는 ‘자산관리사(Financial Consultant)’라는, 다소 이색적인 직업을 바탕으로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 벌써 자산관리사 경력이 1년째가 다 되어간다는 그를 강남의 한 사무실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 양현석 선수는 야구계와는 거리가 먼, 자산관리사로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

현역시절의 추억

Q : 바쁘실 텐데 시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교적 최근에 은퇴하셔서 현역시절에 대한 추억이 아직 생생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먼저, 경희대학교 시절 때 이야기를 잠시 해 주신다면요?

양현석(이하 ‘양’으로 표기) : 대학 시절에는 무서울 것이 없었습니다. 1년 선배인 홍성흔(롯데 자이언츠) 선수와 3, 4, 5번 클린업 트리오를 이루었고, 또 1년 후배인 정대현(SK 와이번스) 선수도 건재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제가 대학에 온 것이 국가대표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꿈을 2학년 때 이루었는데, 당시 2학년 멤버가 김선우(두산 베어스), 서재응(KIA 타이거즈)을 포함하여 저뿐이었습니다. 즉, 2학년 야수 중에서는 제가 유일했죠. 아직까지 그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4학년 때에는 대학야구 우승도 했구요.

Q : 꾸준한 아마시절의 활약이 결국은 해태(現 KIA) 타이거즈의 지명을 받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양 :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해 5월에 바로 SK로 트레이드됐죠. 그리고 이듬해에 풀시즌을 뛰었습니다. 홈런 11개를 기록하는 등 나쁘지 않은 활약을 펼쳤지만, 몸이 뻣뻣해서 잔부상이 많기도 했습니다. 허리, 팔꿈치 모두 아팠지만, 그저 직업병으로 인식하고 몸 관리를 잘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이후부터는 대타 요원으로 많은 경기를 출장하게 됐어요.

Q : ‘대타’ 이야기가 나와서 드리는 말씀인데, 양현석 선수에게 ‘대타’란 어떤 의미였습니까?

양 : 풀타임을 뛰었을 때와 달리 대타는 대부분 단 한 번 나가는 순간이 승패를 좌우할 수 있는 상황이 많았습니다. 즉, 적시타를 치지 못하면 ‘나 때문에 졌구나’라는 생각이 많이 들기도 했죠. 그래서 처음에는 상당한 부담감으로 많이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즐기면’ 당일 경기 MVP에도 선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바꾸다 보니 오히려 이후부터는 대타작전 상황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단 한 방으로 화자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타석에 임하다 보면 더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대타입니다.

Q : 특히 LG 시절에는 이순철 감독이 양현석 선수를 대타로 많이 기용했어요.

양 : 그랬습니다. 그런데 당시 LG로 트레이드되어 온 상황이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상훈 선배(은퇴. 前 SK 와이번스)와 맞트레이드 되어 왔기에 이순철 감독님도 저에게 갖는 기대도 있으셨고, 그만큼 저를 기용하시는 데에 따른 부담도 적지 않으셨겠죠. 그런데 트레이드되어 오자마자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적 이후 잘하겠다는 생각으로 왔는데 스윙조차 못하게 되어 저 자신도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이순철 감독님께서 “너는 그냥 시합 때에만 방망이 휘두르고, 팔꿈치에 부담이 가니까 연습조차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다른 선수들은 열심히 연습하는데, 저는 가만히 있어야 하니 그것이 저에게는 또 다른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Q : 그렇다면 현역 시절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양 : 첫 번째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대학 2학년 때 국가대표로 선발되었을 때였습니다. 국가대표 유일한 ‘2학년 야수’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죠. 두 번째는 SK시절, 한 달간 플레이오프를 치렀던 순간이었습니다. 준플레이오프에서부터 한국시리즈까지 쉼 없는 일정을 소화했던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이 생생합니다. 당시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현대(現 히어로즈)에게 3승 4패로 패했지만, 그 기억만큼은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제 현역 시절 마지막 경기였습니다. 그때가 2004년 8월 25일이었는데, 친정팀 SK와의 경기에서 역전 3점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그 경기가 마지막이 될지 몰랐습니다.

군복무와 은퇴

Q : 이후 군복무 때문에 2년간 그라운드를 비우셨어요.

양 : 당시 터져나왔던 병역비리 파동에서 저 역시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저도 참 반성을 많이 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동료들과는 달리 저는 집행유예 판결이 났고, 이에 따라 상근예비역으로 2년간 군 복무를 했습니다. 2년 동안 정말 운동만 했습니다. 제 인생의 99%가 아구였기에 현역에 대한 복귀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에는 야구가 멀어지는 느낌이 들어 정말 무섭기도 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복무하지 않는 토/일요일에는 선수단과 함께 훈련할 수 있었죠. 그리고 병장시절에는 LG 재활군 선수들과 함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연습게임도 할 수 있었는데, 타석에 들어서다 보니 집중력이 생긴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홈런도 기록했고요. 용기를 얻을 수 있었죠.

그러다 전역 이후 5월에 KIA 2군과 경기를 앞두고 스트레칭을 했는데, 허리가 잘 굽혀지지 않더군요. 그래서 코치님의 도움으로 허리를 굽혀 몸을 풀고 있었는데, 그 순간 온몸이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목만 움직일 수 있었는데, 그때 사람 몸이 이렇게 움직이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2년간의 준비 기간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었죠. 재활도 가능할 법했지만, 디스크가 걸린 허리만큼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수술을 한다고 해도 1년 이상의 재활기간이 필요했고, 그 오랜 기간을 구단에서 기다려 주리라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결국, 그해 10월에 방출되었는데, 의외로 담담했습니다. 아마 그 전부터 무의식적으로 운동을 그만둘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Q : 은퇴 이후 다른 일을 하신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많으셨던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의외로 ‘자산관리사’의 길로 들어오셨습니다.

양 : 운동을 그만둔 이후 다른 쪽으로 일해 볼 생각을 하고 있던 도중 어느 형님의 소개로 자산관리사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방면으로 일할 수 있게끔 많은 분들이 도와주시고 힘이 되어 주셔서 ‘아,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하면 나를 도와 준 사람들에게 최소한 피해를 주지는 않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남들 한 번 알아듣는다는 이야기를 저는 3, 4번을 봐야 이해할 수 있을 정도여서 그 이상의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어쨌든 지금의 이 자리까지 오게 된 데에는 운이 참 좋았던 것 같아요. 



▲ 양현석 선수는 인터뷰 내내 진솔한 모습으로, 많은 이야기를 가감없이 풀어냈다.

자산관리사 양현석입니다.

Q : 그렇다면 자산관리사가 되신 이후 첫 번째 고객은 누구였습니까?

양 : 제 아내였습니다(웃음). 아내에게 계약서 들고 가서 “네가 나의 첫 번째 고객이라는 사실을 영광으로 알아라”라고 말하고서는 바로 계약을 했죠. 야구선수들 중에는 정대현(SK 와이번스), 이대수(두산 베어스), 조중근(히어로즈) 딱 세 명만 고객으로 두었습니다. 사실 제가 여기 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주위에서 ‘거물이 들어왔다’고 이야기할 정도였습니다. 전직 프로야구 선수였으니 프로야구장을 큰 시장으로 인식하고, 선수들과 쉽게 계약할 수 있다고 판단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저는 주위를 바라보고 이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제 고객 중 70% 이상이 소개로 받은 분들입니다.

제가 하는 일은 보험상품이나 기타 투자상품에 대해 거짓을 말하지 않고 상품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고 판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객이 상품에 대해 만족하면 그에 따른 자산을 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간자 입장에서 관리하는 역할을 합니다.

Q : 그렇다면 자산관리사로서 지금과 같은 불경기에 대처하는 태도에 대해 잠시 조언해 주신다면요?

양 : 대체로 부자들은 ‘역발상’을 많이 합니다. 즉, 지금 이런 시기를 오히려 기회로 삼아 다른 사람들에 비해 한 단계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불황 속에서 ‘가장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바로 저 같은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저를 믿고 계약해 주시는 분들에게 이러한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양현석 FC(자산관리사)님 믿고 할게요.”라는 말이 저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보험이라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인식이 강합니다. 그렇다면 가입도 중요하지만, 보험금 수령 등 각종 제반 사항을 보조하는 것도 제가 반드시 해 드려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저를 믿고 계약해 주시는 분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합니다.

Q : 현역 코치로의 복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양 : (단호하게) 지금은 아닙니다. 많은 고객분들이 자주 물으시는 질문 중 하나다 “이 일을 얼마나 오래 하실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만큼 많은 자산관리사들이 중도에 그만 두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죠. 저는 관계를 갖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관계를 깨트리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를 믿고 계약해 주신 많은 분들을 위해서라도 이 일을 오래 해야겠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토/일요일에는 사회인 야구팀을 코치하면서 하루종일 야구장에서 살다시피 합니다. 그분들의 야구 열정은 정말로 현역 선수들 못지않거든요. 그 가운데에서 보람을 찾습니다.

Q : 이렇게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신 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양 : 맞습니다. 바로 주신스포츠 유영원 대표이사님이십니다. 힘들 때 정신적으로 큰 힘이 되어 주신 분이시며, 특히 이 일에 적응하실 수 있도록 많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분입니다. 사실 제가 자산관리사를 한다고 했을 때 주위의 반대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유영원 이사님만큼은 최선을 다하라고, 네 적성에 잘 맞을 것이라고 끝없이 격려해 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비로소 감사인사 드리고 싶습니다.

Q : 마지막으로 후배 선수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신다면요?

양 : 예전에는 몰랐는데, 사회에 나와 보니 운동할 때가 가장 좋았습니다. 프로에 있다는 것부터가 ‘야구 잘한다’는 인정의 표시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있을 때에는 본인들이 그것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지금처럼 생각했다면 저 역시 조금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평생 야구하는 것이 아닌 만큼, 후배 선수들이 대인관계를 중요시하고, 겸손하게 생활했으면 합니다. 다치지 말고 열심히 하는 후배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저 역시 부상으로 제 실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은퇴하여 아쉬움이 많이 남는답니다.

[정리 = 엑스포츠뉴스 유진 기자] 

※ 양현석은 누구?

동대문상고(現 청원고등학교) - 경희대학교를 거쳐 2000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해태(現 KIA) 타이거즈의 지명을 받고 입단한 중거리 타자로써, 아마시절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당시 홍성흔(롯데 자이언츠)과 함께 경희대학교 클린업 트리오를 이끌 만큼 타고난 타격재주를 지녔지만, 프로에서는 홍성흔과는 달리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후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된 양현석은 이듬 해에 11홈런을 기록하며 두각을 나타냈고, 2002년도 부터는 주로 대타요원으로 타석에 나서며 나름대로 쏠쏠한 활약을 펼쳤다. 그러다 2004 시즌을 앞두고 일명 ‘이상훈 항명 파동’으로 인하여 오승준과 함께 LG유니폼으로 바꿔 입었다.

LG시절에도 주로 대타요원으로 활약했지만,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던 그는 2004 시즌 이후 군복무로 2년간 그라운드를 떠나있어야 했다. 복귀 이후 연습경기에서 홈런을 기록하는 등 제 모습을 찾는 듯 했지만, 고질적인 허리부상으로 2007 시즌 직후 그라운드를 다시 떠나야 했다. 현재는 ‘자산관리사’로써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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