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으로 말하는 사나이, 데이비드 베컴 (1) 보기
[엑스포츠뉴스=박형진 기자] 11년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으로 살아온 데이비드 베컴은 2003년 스타들의 보고(혹은, 스타들의 무덤)인 레알 마드리드에 정착합니다. 로리 커닝엄, 스티브 맥마나맘에 이어 레알 마드리드 유니폼을 입은 세 번째 잉글랜드 선수가 된 베컴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7번 대신 23번 유니폼을 입게 됩니다. 베컴은 이에 대해 '마이클 조던에 대한 존경심으로 23번을 선택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베컴은 7번을 선택할 수가 없었습니다. 레알 마드리드의 '간판'인 라울의 번호가 7번이었고, 라울은 7번 유니폼을 입도록 레알 마드리드와 문서로 계약까지 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베컴은 레알 마드리드의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선지 단 3분만에 골을 넣는데 성공합니다. 그야말로 환상적인 데뷔였죠. 전형적인 '잉글랜드 선수'가 스페인 축구에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세간의 의문을 한 번에 씻어버린 베컴은 데뷔 후 16경기동안 5골을 넣는 기염을 토합니다. 그러나 레알 마드리드는 베컴, 호나우두 등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리그 4위에 머물렀고, 챔피언스리그 우승컵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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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컴의 레알 마드리드 시절은 항상 트로피와 함께하던 맨유 시절과는 달랐습니다. 베컴이 있는동안 레알 마드리드는 리그 우승에 번번히 실패했고, 챔피언스리그 성적도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파비오 카펠로 감독이 부임한 이후, 베컴은 아스날로부터 임대되어온 안토니오 레예스에게 자신의 포지션인 오른쪽 미드필더 자리를 빼앗기게 됩니다. 베컴은 시즌 초반 9경기에 출장했지만, 그 중 7경기를 레알 마드리드가 패하면서 베컴은 완전히 신뢰를 잃게 됩니다.
2007년 1월이 되면서 베컴은 보스만 룰에 의해 자유롭게 다른 구단과 계약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베컴과 레알 마드리드는 재계약을 위한 협상에 들어갔지만, 초상권 문제 등 여러 문제로 협상은 난항에 부딪혔습니다. 미야토비치 단장은 베컴과의 재계약을 원하지 않는 듯한 뉘앙스의 발언을 해 협상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베컴은 레알 마드리드와의 협상을 포기하고 전격적으로 미국 MLS의 LA 갤럭시와 5년 계약을 맺습니다.
카펠로 감독은 베컴을 더 이상 출전시키지 않겠다고 공언했지만, 그는 자신의 말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베컴은 레알 소시에다드전에 출전해 스스로 골을 기록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고, 챔피언스리그와 프리메라리그 마지막 경기에 선발로 출전하며 자신의 역량을 입증해보였습니다. 베컴의 시즌 후반 활약에 힘입어 레알 마드리드는 극적으로 프리메라리가 우승을 차지했고, 그 우승컵은 베컴의 레알 마드리드 시절 유일한 우승컵이 되었습니다.
베컴의 파란만장한 대표팀 경력
베컴은 96/97 시즌 뛰어난 활약으로 맨유의 주전 자리를 차지했고, 리그에서 '올해의 유망주상'을 받으며 잉글랜드 축구계의 주목을 받습니다. 그 여세로 베컴은 1996년 9월 몰도바와의 월드컵 예선에서 처음으로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나섰습니다.
베컴은 98 프랑스 월드컵에서 콜롬비아를 상대로 멋진 프리킥을 성공시키며 자신의 대표팀 데뷔골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베컴에게 98 월드컵은 '악몽'으로 기억되고 맙니다. 다름 아닌 16강전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퇴장을 당했기 때문인데요, 이것은 베컴과 아르헨티나의 기나긴 악연의 시작이었습니다. 베컴은 디에고 시메오네의 거친 파울에 쓰러진 후 쓰러진 상태에서 시메오네의 다리를 차는 행동을 합니다. 이를 본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주심에게 강하게 어필했고, 주심은 베컴에게 퇴장을 명합니다. 베컴이 없는 잉글랜드는 승부차기 끝에 아르헨티나에 패배하며 16강에서 탈락하고 맙니다.
베컴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잉글랜드 내에서 거센 비난을 받게 됩니다. 그의 모습이 그려진 다트판까지 만들어지고, 살해 위협까지 받을 정도였으니깐요. 베컴이 잉글랜드에서 계속 축구를 할 수 있을지 의문시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퍼거슨 감독은 베컴을 잘 다독이며 그를 잔류시켰고, 베컴은 앞에서 본 것처럼 98/99 맨유의 트레블을 이끌며 위기를 기회로 바꾸었습니다.
2000년 임시감독이었던 피터 테일러에 의해 대표팀 주장에 임명된 베컴은 이후 6년간 잉글랜드 대표팀의 주장으로 활약합니다. 그리고 베컴은 2001년, 그리스와의 월드컵 예선 경기에서 극적인 프리킥 동점골을 기록하며 '원수'에서 '영웅'으로 부활합니다. 베컴의 골로 잉글랜드는 극적으로 2002 월드컵 티켓을 거머쥐었으니깐요. 이 드라마틱한 베컴의 인생역전은 이후 광고로도 만들어져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됩니다.
2002년 4월, 데포르티보의 아르헨티나 선수 두셰르에 의해 부상을 당한 베컴은 완전하지 못한 몸상태로 2002 한일 월드컵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르헨티나와의 조별예선에서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아르헨티나를 탈락시키는데 기여합니다. 베컴으로서는 오랜 '아르헨티나 악몽'을 완벽하게 끝낸 복수혈전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베컴은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만은 우승컵을 들어올리지 못합니다. 2002 월드컵에서는 브라질에게 패하며 8강에 머물러야 했고, 유로 2004에서 베컴은 두 차례나 페널티킥을 실축하며 잉글랜드 부진의 원흉이 됩니다. 2006 독일 월드컵에서 베컴은 군계일학의 활약을 보여주었지만, 전술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는 잉글랜드를 우승으로 이끌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베컴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퇴장을 당하며 팀을 패배로 몰아넣은 '후배' 웨인 루니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컴은 월드컵 이후 주장 완장을 내놓았고, 그는 새로운 감독인 스티브 맥클라렌 체제에서 좀처럼 대표팀으로 선발되지 못했습니다. 맥클라렌 감독은 아론 레논, 스티브 제라드 등을 오른쪽 미드필더로 선호했기 때문이죠. 팀이 위기에 빠지자 맥클라렌 감독은 베컴을 다시 불렀고, 베컴은 중요한 골들을 어시스트하며 팀의 유로 2008 본선행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베컴의 99번째 대표팀 경기였던 크로아티아전에서 잉글랜드는 2-3으로 패했고, 현재까지 그것이 베컴의 대표팀 마지막 경기로 남아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으로 간 베컴은 과연 어떠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까요? 베컴의 근황과 미국 생활에 대해서는 내일 더 자세한 소식과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박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