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11-28 0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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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1592', 동아시아史 뒤흔든 전쟁의 대미 '노량해전' (종합)

기사입력 2016.09.23 22:55 / 기사수정 2016.09.23 22:59

김주애 기자
 

[엑스포츠뉴스 김주애 기자] '임진왜란 1592'가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 '노량해전'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23일 방송된 KBS 1TV 팩츄얼드라마 '임진왜란 1592'에서는 5부작의 마지막회 '암흑의 종말, 노량해전'이 방송됐다. 노량해전은 7년 동안 지속됐던 '임진왜란'을 종결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최후의 전쟁이다.
 
이날 방송에서는 장기전으로 이어지는 전쟁에 군량미가 없어서 고전하는 일본군의 모습이 그려졌다. 
또 조선군은 계속되는 전투로 일본의 조총에 맞서는 법을 알아갔다. 행주산성에서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대패한 일본은 전투 의지를 잃었으며, 군량미 창고로 사용하던 용산창을 습격당해 식량의 보급까지 끊겨 명나라와 강화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명나라는 강화의 조건으로 조선의 영토를 반납하고, 일본이 명나라에 사죄문을 쓸 것을 요구했다. 일본은 명나라의 사신이 일본으로 와서 강화를 체결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김응수 분)는 명의 사신을 인질로 속여 국민들에게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알렸다. 

자금성에는 히데요시의 항복 문서를 들고 일본의 사신들이 도착했다. 하지만 이 역시 위조된 것으로, 히데요시는 이 항복문을 통해 중국 황제로부터 '순화왕'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왕으로 책봉됐다. 히데요시는 위조된 승리를 백성들에게 증명하기 위해 조선의 왕자를 인질로 요청했다.

하지만 명나라는 이를 들어주지 않고, 일본군의 완전 철수를 명령했다. 이에 일본은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당시 이순신(최수종)은 일본의 모략으로 투옥된 상태였고, 조선의 해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궤멸됐다.

앞서 진행된 화의가 일본의 거짓으로 점철된 것임을 깨달은 명나라는 다시 전쟁에 군을 투입했다. 이순신도 다시 수군통제사에 임명됐다.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에야 조선에 머물던 일본군들은 철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 바다의 재해권을 이순신의 수군이 잡게된 이상 이들의 철군도 쉽지 않았다. 특히 순천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박동하)는 궁지에 몰렸다.
 
이순신은 "한 척의 왜선도 무사히 돌려보낼 수 없다"며 전쟁 중 희생된 자신의 부하들과 백성들을 떠올렸다. 한 척이라도 더 많은 배를 격파하는 것은 일본의 조선 침략 의지를 꺾는 길이기도 했다. 그들은 이순신의 예상대로 일본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인 '노량'을 퇴로로 선택했다.
 
이순신은 분통, 비격진천뢰 등을 사용해 화전(불을 이용한 전투)을 펼쳤다. 또 빈틈을 만들어 왜군을 포구로 유인했다. 이순신은 그 포구를 일본군의 무덤이자 자신의 무덤으로 생각하고 최후의 해전을 진행했다. 살아나가기 위해 죽기살기로 싸우는 일본군에게 조선과 명 연합 수군은 승리를 거뒀지만, 이순신 장군은 총에 맞아 순국했다.

함께 전쟁에 참여한 명나라의 진린 장군은 고국으로 돌아가 이순신의 장례를 정중히 치뤘으며 명나라 황제는 이순신에게 감사의 표시로 8개의 선물을 줬다. 이순신 장군의 전공이 조선 뿐만 아니라 명나라에도 의미있는 승리임을 의미했다. 이 전쟁의 영향으로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점령했으며, 명나라는 1644년 후금에 의해 멸망했다. 조선은 피폐해졌지만 왕조를 이어갈 수 있었다.

savannah14@xportsnews.com / 사진=KBS 1TV 방송화면

김주애 기자 savannah14@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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