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6.05.13 07:35 / 기사수정 2006.05.13 07:35
◆한국, 월드컵 도전사-1986년 멕시코 월드컵 한국 축구 역사에 있어서 가장 화려하고 강력했던 멤버들이 활약한 시기는 언제였을까?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가 작용할 수밖에 없는 물음이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출전했던 대표팀을 꼽지 않을까 한다. 물론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대회 4강이라는 눈부신 성과를 이룩한 대표팀 멤버들도 '최고'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지만,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출전했던 멤버들이 가장 화려하고 탄탄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승리를 거두기는커녕 1무 2패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초라하게 돌아서야 했지만, 당시 대표팀을 구성했던 선수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탄성과 아쉬움이 나올 정도다.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맹활약하던 '차 붐' 차범근을 시작으로 세리아 명문인 유벤투스가 5년 동안 짝사랑한 불세출의 스트라이커 최순호, 아시아의 야생마로 불리며 그라운드를 질주했던 김주성, 강한 투지를 보이는 진돗개를 닮은 허정무, 쓰러져도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상대 공격수들을 차단했던 '오뚝이' 박경훈 등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함께 활약했던 대회였다. 만약, 1986년 대회 우승의 주인공인 아르헨티나와 1982년 월드컵에서 우승했던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와 한 조가 아니었다면, 한국의 월드컵 첫 승과 16강 토너먼트 진출은 진작 이루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만큼,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의 한국은 강했고 또 아쉬웠다. ▲경기 다시 보기 △1986년 6월 3일(이하 한국 시각), 멕시코시티 올림피코 스타디움 대한민국 vs 아르헨티나 '축구 신동'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와의 경기는 애초부터 승리를 기대하기 힘들었다. 기술과 전술은 물론이고 우리가 자신하던 체력조차도 아르헨티나를 압도하기엔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모든 선수는 물론이고 감독마저 처음으로 경험하는 월드컵이었기 때문에 첫 경기에 대한 부담과 긴장감도 엄청났다. 아르헨티나는 역시 강했다. 게다가 황금 전성기에 들어선 마라도나는 빈틈이 없는 선수처럼 보였다. 대표팀은 아르헨티나 전력의 핵인 마라도나를 견제하기 위해 김평석 선수로 하여금 개인 마크를 하도록 지시했지만, 크게 효과를 보지 못했다. 비록 마라도나는 골을 기록하진 못했지만, 적절한 공수 조율과 탁월한 경기력을 선보이며 우리 선수들을 여러 번 당황케 했었다. 전반 6분 발다노에게 첫 골을 허용한 대표팀은 전반 18분엔 루게리에게 두 번째 골을 허용했고, 후반 시작과 동시에 다시 발다노에게 득점을 내주면서 0-3으로 크게 뒤지고 있었다. 점수 차를 벌린 아르헨티나는 후반 중반 이후 조금 느슨한 플레이를 펼쳤고 대표팀은 조금씩 공격 횟수를 늘려가며 아르헨티나의 문전을 위협했다.
아르헨티나 수비수 3명을 따돌리며 중앙을 휘젓던 김주성의 드리블을 박창선이 이어받아 번개 같은 중거리 슛으로 연결시켰다. 아르헨티나의 품피도 골키퍼가 김주성과 박창선이 엇갈리는 순간을 목격함과 동시에 왼쪽 골포스트 모서리를 향해 공이 날아왔다. 이어 크로스바 하단을 맞고 살짝 굴절된 공은 품피도가 손쓸 겨를도 없이 그대로 골 망을 흔들었다. 한국의 월드컵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통쾌한 첫 골이 터진 것이다. 이후에도 대표팀은 여러 차례 아르헨티나 문전을 위협했지만, 추가골을 기록하지 못하고 1-3의 패배를 허락해야 했다. 비록 승점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우승 후보인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득점을 뽑아냈다는 점은 한국 축구의 가능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했고, 이 경기를 계기로 대표팀은 '할 수 있다!'라는 커다란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1986년 6월 6일, 멕시코시티 올림피코 스타디움 대한민국 vs 불가리아 아르헨티나 전에서 얻은 경험은 대표팀에게 커다란 자신감으로 돌아왔다. 대표팀의 두 번째 상대는 유럽의 강호 불가리아. 분명 우리보다 한 수 위 기량을 보유하고 있는 팀임에는 틀림없었지만,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에 비하면 해볼만한 팀이었다. 더군다나 불가리아도 월드컵 본선에서 승리(본선 5회 진출, 6무 8패)가 없었던 팀이라 한국 대표팀의 자신감은 대단했다. 하지만, 경기 초반 골키퍼 오연교의 뼈아픈 실책으로 불가리아에 첫 골을 헌납하면서 경기는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전반 12분 오연교가 펀칭한 공이 불가리아 미드필더인 게토프의 발 앞에 떨어졌고, 게토프는 어렵지 않게 첫 골을 뽑아낼 수 있었다.
이 골로 한국은 불가리아와 무승부를 기록,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승점을 기록할 수 있었으며, 지난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당했던 악몽 같은 참패의 기억을 어느 정도 씻을 수 있었다.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 힘겨운 수중 전을 치러야 했던 한국 대표팀에게 이날 경기는 '만약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하는 아쉬움이 컸을 것이다. 당시 한국 축구는 유난히 수중 전에 약했는데, 만약 정상적인 날씨에서 경기를 펼쳤더라면 훨씬 좋은 경기를 펼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날 경기에서 변병주 차범근으로 대변되는 대표팀의 빠른 측면 공격수들이 나쁜 그라운드 상태로 인하여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해 더 큰 아쉬움을 남겼었다. △1986년 6월 11일, 푸에불라 콰테모크 스타디움 대한민국 vs 이탈리아 A조 예선 마지막 경기. 1무 1패를 기록하고 있던 대표팀은 이탈리아와의 일전을 앞두고 있었다. 디펜딩 챔피언이자 월드컵 3회 우승에 빛나는 이탈리아는 비록 간판 스트라이커 파울로 로시가 빠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무서운 팀이었다. 4년 전 우승 멤버들이 건재했고, 특히 당시 유벤투스 황금기의 주역들이었던 스치레아와 카브리니가 버티는 이탈리아의 수비 라인은 말 그대로 '빗장수비'였다. 전반 17분 이탈리아의 알토벨리에게 선제골을 내준 대표팀은 0-1로 뒤지고 있었지만 물러서지 않고 강하게 밀어붙이며 이탈리아와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전반 35분 허정무의 반칙으로 이탈리아에 페널티킥을 허용했지만, 키커로 나선 알토벨리가 실축하는 바람에 더 이상의 실점을 허용하지는 않았다. 0-1로 뒤진 채 전반을 마쳤지만, 대표팀은 이탈리아와 같은 7개의 슈팅을 기록하며 우승 후보와의 대결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 경기를 펼쳤다.
지난 81년 호주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 이탈리아를 4-1로 격파하며 파란을 일으켰을 당시, 2골 2도움을 기록하며 이탈리아를 경악케 만든 최순호였다. 그토록 자랑하던 이탈리아의 빗장수비를 무참히 짓밟았던 최순호가 또다시 이탈리아의 빗장수비를 열어 제치며 동점골을 성공시켰다. 이후 대표팀은 치열한 공방을 계속했지만 후반 28분 알토벨리에게 추가골을 허용했고, 후반 37분 조광래가 측면에서 날아온 크로스를 걷어 내려다가 공과 함께 골라인을 통과하는 자책골이 터지면서 1-3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꼭 이겨야만 16강 진출이 가능했던 대표팀에게 어두운 탈락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던 것이었다. 후반 종료 직전인 44분에 허정무가 골을 성공시켜 2-3까지 추격했지만 끝내 승부를 뒤집지는 못했다. 하지만, 경기 종료 직전까지 이탈리아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한국 축구의 저력을 보여준 경기였다. 지난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처녀출전해 헝가리에 0-9, 터키에 0-7이란 참패를 당하며 쓸쓸하게 귀국해야 했던 한국 축구가 32년 만에 진출한 월드컵 본선에서 우승후보인 아르헨티나 이탈리아를 상대로 분전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고, 박창선 김종부 최순호 허정무 등이 4골을 기록하며 한국 축구의 가능성을 세계로 타전했다. 비록 1무 2패라는 아쉬운 성적으로 기대하던 1승과 16강 진출에는 모두 실패했지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커다란 '자신감'을 갖게 한 소중한 대회였다. 또, 한국 축구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을 시작으로 다가오는 2006 독일 월드컵까지 6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금자탑을 세우게 되는데,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은 그 금자탑의 든든한 초석이 되었다.
|
ⓒ 엑스포츠뉴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실시간 주요 뉴스
실시간 인기 기사
엑's 이슈
주간 인기 기사
화보
통합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