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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철의 캐치 콜] '농구월드컵 진출' 한국 남자농구의 발자취

기사입력 2013.08.13 10:42 / 기사수정 2013.08.13 16:13

김덕중 기자

[엑스포츠뉴스=신명철 칼럼니스트] “졌지만 재밌게 봤다.”

스포츠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러나 골프는 잘 치는 글쓴이의 오래된 친구가 최근 한 말이다. 승리 지상주의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말이 되지 않는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친구의 설명은 조금 특별했다. 그 친구는 농구 명문교 출신이다. 고등학교 때 단체 응원을 하러 장충체육관에 가서 본 농구가 자기가 본 농구 경기의 전부인데 주말 골퍼지만 나름대로 스포츠를 즐기다 보니 거의 유일하게 아는 농구에 조금씩 관심을 갖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실망이 컸단다. 프로화 되면서 선수들이 아마추어 때보다 더 큰 인기를 누리고 돈도 많이 벌지만 겉멋만 들고 실력은 그저 그렇다고 생각했단다. 국제 대회 성적도 시원치 않고.

그 친구의 얘기는 지난 10일 밤 열린 한국과 필리핀의 경기에서 반전한다. 케이블 TV에서 골프 채널을 찾다가 우연히 농구 경기를 보게 됐는데 꽤 재미있었다는 것이다. 그 경기는 2013년 FIBA(국제농구연맹) 아시아남자선수권대회 준결승전이었다. 내년 9월 스페인에서 열리는 FIBA 월드컵(세계선수권대회) 예선을 겸한 대회였다. 한국은 필리핀에 79-86으로 져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11일 열린 대만과 3위 결정전에서 75-57로 이겨 1998년 그리스 대회 이후 16년 만에 세계선수권대회에 나서게 됐다. 필리핀, 대만 전에서 3점슛을 쏙쏙 넣는 등 맹활약한 국가 대표팀 새내기 김민구(191cm 경희대)는 이번 대회 베스트 5에 뽑혔다.

그 친구는 글쓴이에게 두 가지 질문을 했다. “필리핀이 아직도 농구를 잘하냐.”, “김민구가 누구냐.” 그 친구의 머릿속에 있는 농구를 잘하는 선수는 고등학교(휘문) 선배인 신동파가 전부다. 김민구가 누구냐고 묻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친구의 머릿속에는 1960년대 필리핀 농구가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신동파 선배가 몇 십점을 넣는 활약 덕분에 필리핀을 누르고 우리나라가 아시아 정상에 올랐다는 건 학교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얘기였다.

그날 한국도 잘했지만 필리핀은 오랜만에 1950~60년대 아시아 무대를 휩쓸던 시절 실력을 펼쳐 보였다. 필리핀은 1970년대 중반 이후 중국에 밀려났지만 1960년 제1회 대회부터 1973년 제7회 아시아선수권대회까지 4차례나 우승한 강자였다. 한국은 1965년 제3회 대회까지 자유중국(대만)과 일본에도 뒤지는 등 3위 또는 4위에 그쳤다.

그 친구가 전설처럼 전해 들은 경기는 1969년 방콕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선수권대회 결승이다. 그 경기에서 신동파는 50점을 쓸어 담아 한국이 필리핀을 95-86으로 누르고 대회 사상 처음으로 우승하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 신동파는 좌우 외곽 먼 거리 슛이 주특기였기 때문에 요즘 시행되고 있는 3점슛을 적용하면 60점 이상 올렸을 것이다.

준결승이긴 했지만 이란 카타르 요르단 등 신흥 세력과 중국에 치여 기 죽어 있던 한국과 필리핀이 오랜만에 제대로 만나 일진일퇴 공방전을 펼쳤으니 “졌지만 재밌게 봤다”는 말을 할 만하다.

24개 나라가 출전하는 2014년 농구 월드컵에는 주최국 스페인과 2012년 런던 올림픽 우승국 미국, 오세아니아 대표인 호주와 뉴질랜드 그리고 아시아 예선을 통과한 이란과 필리핀, 한국 등 7개 나라가 출전권을 이미 손에 넣었다. 다음 달 슬로베니아에서 열리는 유럽선수권대회에서 6장, 베네수엘라에서 벌어지는 미주(북중미+남미)선수권대회에서 4장의 출전국이 결정되는데 내년 대회는 두 대륙 대표와 스페인, 미국이 우승 경쟁을 벌이게 된다.

여기서 잠시 한국 남자 농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자.

농구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1936년 베를린 대회에 이성구와 장이진, 염은현 등 3명의 조선인이 일본 대표팀의 일원으로 출전했다. 이들은 모두 연희전문(오늘날의 연세대학교) 선수였다. 마라톤의 손기정과 남승룡, 축구의 김용식이 그랬듯이 농구에서도 조선인이긴 하지만 1936년 1월 열린 전일본종합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연희전문의 주전인 이들을 뽑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대회는 베를린에 갈 일본 대표 선수를 뽑는 대회였다. 연희전문은 이 대회 준결승에서 일본 최강 도쿄제대를 46-38로 꺾었고 결승에서는 교토제대를 42-22로 크게 이겼다.

미국이 우승한 베를린 올림픽 농구 종목에서 일본은 1회전에서 중국(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과 다른 나라)을 35-19, 2회전에서 폴란드를 43-31로 꺾고 기세 좋게 3회전에 올랐으나 멕시코에 22-28로 져 8강 문턱에서 탈락했다.

베를린 올림픽 이후 1938년 1월에 열린 전일본종합선수권대회 결승에서는 보성전문(오늘날의 고려대학교)이 연희전문을 43-41로 누르고 우승했다. 일본 농구 관계자들에게는 속이 쓰린 일이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보성전문은 그해 9월 일본 국내 사정으로 일정을 앞당겨 치른 1939년 대회 결승에서 교토제대를 64-50으로 누르고 2연속 우승한데 이어 1940년 대회에서 문리대에 58-37 대승을 거두고 전일본종합선수권대회 3연속 우승의 위업을 이뤘다. 이때 멤버가 신광호 최해룡 조득준(조승연 전 삼성 썬더스 고문 부친) 이호선 오수철 오중열 안창건 최성철 이준영 우낙균 등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고 일본이 1940년 제12회 하계 올림픽을 예정대로 도쿄에서 열었으면 이들 가운데 몇몇은 이성구와 장이진, 염은현처럼 비록 일장기를 달았지만 올림피언이 될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출전한 1948년 런던 올림픽에 농구는 축구와 함께 출전했다.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되고 두 번째 대회인 런던 올림픽 농구에는 첫 대회 우승국 미국과 준우승국 캐나다 등 23개 나라가 출전했다.

한국은 조별 리그 B조 1차전에서 벨기에를 29-27로 물리친데 이어 2차전에서 이라크를 120-20으로 대파했다. 3차전에서 필리핀에 33-35로 일격을 맞았지만 칠레를 28-21로 꺾었다. 이어 중국(대만도 중화인민공화국도 아닌 나라)에 48-49로 졌다. 모든 경기를 마치고 나니 전패의 이라크를 빼고 한국과 칠레, 벨기에, 중국, 필리핀이 모두 3승2패를 기록하는 대접전이었고 골득실차를 따져 한국이 1위, 칠레가 2위로 8강에 올랐다.

한국은 8강전에서 멕시코에 32-43으로 져 5~8위 결정전으로 밀린 뒤 우루과이와 체코슬로바키아에 36-45, 38-39로 져 출전 23개국 가운데 8위를 차지했다. 필리핀이 12위, 이란이 14위, 중국이 18위, 이라크가 22위였다. 일본은 제2차 대전의 전범국으로 독일과 함께 이 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이때 기록한 8위가 한국 남자 농구의 올림픽 역대 최고 성적이다.

1950년 1월, 그해 10월 아르헨티나에서 열릴 예정인 제1회 세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할 대표 선수를 뽑기 위한 대회가 한국은행과 전 고려대, 조선운수, 일반 선발, 전 연희대 그리고 특이하게도 중학 선발군이 출전한 가운데 열렸다. 중학 선발군의 출전 문제는 논란이 있어 번외 경기로 열렸는데 1차 리그에서 4승1패로 전 연희대와 공동 1위를 하는 놀라운 성적을 올렸다. 2차 리그에서는 경험 부족을 드러내며 2승3패에 그쳤지만 당시 농구계에는 큰 충격이었다. 세계선수권대회 출전은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무산됐고 앞서 나온 1969년 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국 자격으로 1970년 세계선수권대회(유고슬라비아)에 처음으로 나섰다. 김영일 김인건 이인표 신동파 신현수 이병국 최종규 박한 윤정근 곽현채 유희형 추헌근이 출전한 이 대회에서 한국은 선전 끝에 11위를 기록했다. 이 성적은 역대 세계선수권대회 최고 순위다. 신동파는 경기당 32.6점으로 득점 1위에 올랐다.

글쓴이의 친구가 “김민구가 누구냐”고 물어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명철 칼럼니스트 sports@xportsnews.com

[사진=남자농구대표팀 ⓒ KBL 제공]



김덕중 기자 djkim@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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