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신명철 칼럼니스트] 2016년 8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리는 제31회 하계 올림픽부터 프로 복싱 선수의 출전이 제한적이긴 하지만 허용된다. 이로써 올림픽에서 아마추어와 프로의 벽은 완전히 무너졌다.
미국 동부 지역의 유력 일간지인 ‘보스턴 글로브’는 지난 4일 국제아마추어복싱연맹(AIBA)이 각국 복싱 연맹에 ‘아마추어’라는 말을 폐기할 것을 통보했다고 보도했다. 우리나라 아마추어 복싱 경기 단체 이름은 ‘대한아마튜어복싱연맹’이다. 연맹이 어떻게 새로운 단체명을 지을지 모르겠지만 ‘아마튜어’는 무조건 빼야 한다. 1934년 1월 조선아마추어복싱연맹이 출범한 지 80여년 만에 이뤄지는 개명이다.
프로 복서가 올림픽 무대에 서는 데에는 여전히 몇 가지 제약이 있다. AIBA가 올 가을 창설할 복싱 단체인 ‘AIBA 프로 복싱(APB)’에 등록한 선수들은 APB에서 활동하며 파이트머니를 받는다. 대전료를 받으니까 분명히 프로다. 그러나 아마추어 대회인 올림픽이나 아시경기대회에서 뛸 수 있다. 2011년 10월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AIBA 세계복싱선수권대회 라이트 플라이급에서 은메달을 딴 한국 아마추어 복싱의 간판 신종훈은 2012년 런던올림픽 직전 APB와 계약했다.
AIBA는 프로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수들에게도 APB의 문을 열었다. 단, 세계복싱평의회등 기존 프로 복싱 단체의 경기 전적이 15전 미만이어야 한다. 또 APB에 참여하려면 기존 프로 복싱 단체에서 나와야 한다. 올림픽 이후 적어도 2년은 APB에서 활동해야 하며 이 기간 다른 프로 복싱 단체 선수와 경기를 할 수 없는 등 몇 가지 제약이 있지만 프로 복서가 올림픽 링에 서는 장면을 3년 뒤 볼 수 있게 됐다.
아마추어리즘의 수호자였던 에이버리 브런디지 전 IOC(국제올림픽위원회, 미국) 위원장이 지하에서 땅을 칠 일이지만 리우데자네이루 대회에는 골프도 프로 선수들이 출전하게 돼 있어 올림픽은 이제 더 이상 아마추어 스포츠의 제전이 아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아마추어와 프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1972년 삿포로 동계 올림픽은 올림픽의 아마추어리즘과 스포츠의 상업주의가 정면으로 충돌해 한바탕 소동을 빚은 대회로 기록돼 있다. 오스트리아의 유명 스키 선수 칼 슈란츠가 소동의 주인공이자 희생양이었다. 슈란츠를 비롯해 그 무렵 세계적인 스키 선수들은 특정 스키 용품 제조사의 제품을 사용해 브랜드 가치를 높여 주는 대가로 경제적인 도움을 받고 있었다.
삿포로 올림픽을 앞두고 브런디지 IOC 위원장은 “IOC의 아마추어 규정을 위반한 40명의 명단을 갖고 있다. 이들은 모두 스키 선수들”이라며 스키 종목의 상업주의에 대해 경고했다. 브런디지 위원장의 이 같은 발언에 IOC 위원이자 국제스키연맹(FIS) 회장인 마크 호들러(스위스)는 “단 한 명의 (스키)선수라도 실격시키면 삿포로 올림픽에서 스키 종목을 제외하겠다”고 맞받았다.
스키 선수들의 아마추어 자격 문제를 놓고 IOC와 FIS가 티격태격한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1936년 가르미슈 파르텐키르헨(독일) 대회부터 이 문제를 놓고 맞선 두 단체는 뚜렷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한 채 삿포로 대회에 이르렀다. IOC는 집행위원회를 열고 슈란츠의 삿포로 대회 출전 자격을 박탈했다.
슈란츠는 “소련 선수들은 정부로부터 (경제적인)보조를 받고 있고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모든 선수가 여러 곳에서 도움을 받고 있다”며 항변했지만 IOC의 결정에 따라 퇴촌할 수밖에 없었다. 브런디지가 공언한 40명의 명단이 실재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슈란츠만 희생됐다. 슈란츠는 소련과 동독 등 사회주의 나라들의 ‘스테이트 아마추어리즘’을 지적했지만 이는 메아리 없는 외침이 됐다.
슈란츠가 비엔나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그를 개선장군처럼 환대했다는 일화에서 일반적인 스포츠 애호가들과 IOC 고위층 사이에 올림픽의 아마추어리즘을 보는 시각에 이 무렵 이미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브런디지의 뒤를 이어 마이클 모리스 킬러닌(아일랜드)이 IOC 위원장이 되면서 올림픽의 아마추어리즘은 급속히 쇠퇴하고 스포츠 상업주의가 자리를 잡게 된다. 1973년 불가리아 바르나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는 아마추어리즘 용어를 IOC 헌장에서 삭제하는 한편 아마추어 규정을 대폭 완화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마침내 프로 선수에게 올림픽의 문호가 개방돼 테니스 여자 단식에서 프로 선수인 슈테피 그라프(서독)가 금메달을 차지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국제육상경기연맹이 선수에게 주는 상금이나 광고 출연료를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프로 농구 선수들로 이뤄진 미국의 ‘드림팀’은 조별 리그에서 앙골라를 116-48, 크로아티아를 103-70, 독일을 111-68, 브라질을 127-83, 스페인을 122-81로 꺾은데 이어 8강전에서 푸에르토리코를 115-77, 준결승전에서 리투아니아를 127-76으로 어린아이 손목 비틀 듯 이겼다. 결승전에서는 크로아티아를 다시 117-85로 눌렀다.
모두 농구깨나 한다는 나라들이었지만 시쳇말로 “게임이 안됐다.” 바르셀로나 대회 이후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미국의 압도적인 우위는 사라졌지만 이때만 해도 프로와 아마추어의 수준 차는 컸다.
올림픽에 프로 복서가 출전하면 어떤 변화가 있을까. 역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을 살펴보면 복싱 올드 팬들의 귀에 익은 이름이 꽤 많이 등장한다. 특히 미국의 중량급 선수들이 그렇다. 1952년 헬싱키 대회 미들급 금메달리스트인 플로이드 패터슨은 17살 때 올림픽 챔피언이 됐다. 패터슨은 4년 뒤인 1956년 ‘무패의 챔피언’ 로키 마르시아노가 은퇴하고 빈자리가 된 프로 복싱 헤비급 타이틀을 놓고 6명의 선수가 겨룬 챔피언 결정전 마지막 경기에서 아치 무어를 5회 KO로 누르고 당시 기준 최연소인 21살에 타이틀을 차지했다. 패터슨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 첫 프로 복싱 헤비급 챔피언이기도 하다.
패터슨은 스웨덴의 잉게마르 요한손과 1959년부터 1961년 사이 세계 프로 복싱 역사에 길이 남을 세 차례의 타이틀매치를 벌였고 최종 승자가 됐다. 이후 그는 1962년 소니 리스턴과 치른 타이틀매치에서 KO로 져 챔피언 벨트를 내려놓았고, 1963년 리턴매치에서 또다시 KO패하며 현역에서 물러났다. 이후 프로 복싱 헤비급 타이틀은 1964년 무하마드 알리에게 넘어간다. 무하마드 알리는 무슬림으로 개종하기 전 이름인 캐시어스 클레이로 1960년 로마 올림픽 라이트 헤비급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4년 뒤 프로 복싱 헤비급 챔피언이 됐다.
이밖에도 미국의 또 다른 프로 복싱 헤비급 챔피언 조 프레이저는 1964년 도쿄 올림픽 헤비급, 조지 포먼은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헤비급, 레온 스핑크스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라이트 헤비급 금메달리스트다. 그러나 미국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헨리 틸먼,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레이몬드 머서가 헤비급 금메달을 딴 이후 2012년 런던 올림픽까지 이 체급에서 금메달리스트를 배출하지 못했다.
그 사이 테오필로 스테벤손(1972년 뮌헨, 1976년 몬트리올, 1980년 모스크바 1위)과 펠릭스 사본(1992년 바르셀로나, 1996년 애틀랜타, 2000년 시드니 1위)등 쿠바의 헤비급 복서들이 올림픽 무대를 휩쓸었기 때문이다.
이제 3년 뒤에는 미국의 프로 복서들이 올림픽 링에 오르게 된다. 리우데자네이루 대회를 시작으로 올림픽 복싱 중량급에서 미국과 쿠바의 일대 격전이 예고되는 까닭이다.
신명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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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 프레이저, 무하마드 알리 ⓒ 엑스포츠뉴스DB]
김덕중 기자 djkim@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