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강산 기자] '비운의 투수' 故 조성민, 그는 '92학번 황금세대'를 이끈 주축이었다. 고려대학교 재학 시절부터 194cm의 큰 키에서 내리꽂는 직구와 포크볼은 일품이었다. 아마추어 시절에는 '코리안 특급' 박찬호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다.
화려한 아마추어 시절을 보냈다. 특히 등이 살짝 보일 정도로 비틀어 던지는 투구폼은 일본인 메이저리거 노모 히데오(전 LA 다저스)를 연상케 하기도 했다. 큰 키에 잘생긴 외모, 위력적인 강속구 투수라는 좋은 조건을 모두 갖췄다.
1996년에는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계약 조건은 7년간 계약금 1억 5000만엔, 연봉 1200만엔. 대학을 갓 졸업한 그에게는 파격적인 대우였다.
승승장구였다. 1997년 1승 2패 11세이브 평균자책점 2.89를 기록하며 안정감을 보여줬다. 이듬해인 1998년부터는 선발로 전환해 전반기 7승 6패 평균자책점 2.76을 올리며 팀 내 입지를 굳건히 했다.
그러나 팔꿈치 부상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감독 추천으로 올스타에도 뽑혔지만 올스타전서 팔꿈치 부상을 당한 이후 이전의 모습을 되찾지 못했다. 그는 일본 프로야구 4시즌 통산 53경기에서 11승 10패 11세이브 평균자책점 2.84를 기록한 뒤 2002년 퇴단했다.
이후 조성민이 한국프로야구 마운드에 다시 서기까지는 3년이 걸렸다. 2005년 5월 한화 이글스와 계약금 없이 연봉 5000만원에 계약했다. 2005년 8월 15일 수원 현대 유니콘스전서 국내 데뷔전을 치렀다. 패전처리로 마운드에 올랐지만 신경현의 역전 홈런에 힘입어 그는 국내 무대 데뷔전서 승리투수가 되는 감격을 맛봤다. 드라마같은 제2의 야구인생이 시작되는 듯했다.
하지만 국내 무대 성적은 신통치 못했다. 그가 남긴 성적은 3시즌 통산 35경기에서 3승 4패 평균자책점 5.09. 2007시즌을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에는 프로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며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투수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2011시즌을 앞두고 두산 베어스 2군 재활코치로 현장에 복귀한 그는 재활코치와 불펜코치를 역임하며 지도자로서 경력을 쌓았다. 하지만 재계약에 실패한 뒤 크게 상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1월 6일 오전, 조성민은 안타깝게도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서울 수서경찰서는 "조성민이 도곡동에 위치한 한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고 밝혔다. 그의 아내였던 배우 최진실이 세상을 떠난 지 5년 만이다. 야구와 함께하길 원했던 조성민, 그는 향년 40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야구에 대한 그의 열정은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기억될 것이다.
[사진=조성민 ⓒ SMC21 스포테인먼트 제공]
강산 기자 posterboy@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