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조영준 기자] 지난 8일부터 10일까지 부산사직체육관에서 열린 그랑프리 2012에서 한국여자배구대표팀은 쿠바, 터키, 일본 등과 경기를 펼쳤다. 한국은 지난달에 열린 올림픽예선전에서 전체 2위로 런던행을 결정지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세계 경쟁력에 대해 짚어볼 필요가 있다.
[매거진V ①] 한국 女배구의 세계경쟁력, 어디까지 왔나
[매거진V ②] 나즈에게 들어보면 김연경과 한국 女배구
[매거진V ③] '숙적' 일본, "우리는 아시아가 아닌 세계를 원한다"
지난달 23일. 한국여자배구대표팀은 오랫동안 쌓인 수모를 한번에 날려버렸다. 적지인 일본 도쿄 메트로폴리탄체육관에서 일본여자배구대표팀을 제압했기 때문이다. 이때 거둔 승리가 특별한 이유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이후 무려 8년 만에 일본1진을 꺾었기 때문이다. 일본에게 당한 22연패의 사슬을 끊은 대표팀은 모처럼 승리의 환희를 만끽했다.
그러나 몇몇 배구관계자들은 한 번의 승리로 들떠있을 상황이 아니라고 충고했다. 일본이 우리를 상대로 22연승을 할 수 있었던 원인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비록 일본이 '숙적'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시스템과 선수 육성 등은 눈여겨볼 가치가 있었다. 일본의 체계적인 시스템을 참고삼아 한국의 문제점을 진단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숙적' 일본, "우리는 아시아가 아닌 세계를 원한다"
일본 여자배구는 오래전부터 '탈 아시아'를 선언했다. 아시아 최강이 아닌 세계 정상권에 오르겠다는 큰 목표를 세우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 결과 경쟁력 있는 대표팀을 완성했다. 그리고 이를 받쳐줄 수 있는 풍부한 선수층을 형성했다.
한국과 일본은 지난달에 열린 '2012 런던올림픽 여자배구 세계예선전'이 끝난 이후 그랑프리 대회에서 다시 만났다. 경기의 승패를 떠나 가장 부러운 점은 부상 선수를 대체할 '자원'이었다. 한국은 김연경(24, 터키 페네르바체), 김사니(30, 흥국생명), 황연주(26, 현대건설), 정대영(30, GS칼텍스) 등이 부상으로 경기에 출전할 수 없었다.
한국의 선수 대기 존에는 임효숙(30, 도로공사)만이 몸을 풀고 있었다. 반면 일본의 대기 존은 선수들이 풍부했다.
일본의 대부분 학교는 배구가 활성화됐다. 일본인들은 엘리트체육은 물론 생활체육으로도 배구를 폭넓게 즐기고 있다. 배구 인구가 많다보니 선수층은 자연스럽게 두터워진다. 또한 재능이 있는 유망주가 나오면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육성한다. 이러한 노하우를 오래전부터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계적인 경쟁력을 다질 수 있었다.
2009~2010 일본 V리그 시즌 때 배구 유학을 다녀온 박주점(47, 전 도로공사 수원시청 감독) 대한배구협회 기술이사는 "일본의 배구는 저변도 좋지만 국제대회를 자주 치른다. 그러다보니 국제배구의 흐름을 빨리 따라잡는다. 일본 배구의 장점은 선진 배구를 자기 몸에 맞게 완성시키는 점"이라고 평가했다.
박주점 이사가 일본 유학 도중 가장 충격을 받은 부분은 '노장 선수'들이 많다는 점이었다. 30세만 넘어도 황혼기에 접어드는 국내와는 달리 일본은 30대를 넘어선 선수들을 많이 목격할 수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 박 이사는 "일본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수들을 곧바로 리그에 투입시키지 않는다. 근력이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장기 레이스를 지속적으로 치르면 몸이 망가지기 때문이다. 일본은 어린 선수들을 섣불리 혹사시키지 않았다. 정규시즌을 치를 만한 근력을 만든 뒤 볼 운동에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일본의 프로리그는 한국과는 다른 세미프로리그다. 이 무대에 데뷔하는 어린 선수들을 위한 시스템은 미리 구축된다. 이들을 10년 동안 뛸 수 있는 선수로 만드는 작업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어린 선수들은 기나긴 레이스를 치를만한 체력과 근력을 키우기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에 들어간다. 큰 무대에 설 수 있는 몸을 완성한 뒤 볼 운동을 비롯한 기술 훈련을 시키는 것이 이들의 '기본 방침'이다.
박 이사는 "내가 유학을 갔던 시즌에 30대 이상의 선수들이 몇 명이 있는지 조사를 해봤다. 그 결과 10개의 팀들 중 30대 이상의 선수들이 무려 28명이나 있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40세가 넘은 선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38세의 한 선수가 경기를 하는 모습을 직접 지켜봤는데 몸 상태가 젊은 선수들을 압도했다. 어린 시절에 혹사를 당하지 않고 체계적인 시스템을 거쳐 왔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 또한 선수 관리를 위한 프로그램과 치료 시스템도 짜임새 있게 갖춰져있었다"고 밝혔다.
이와 비교해 한국은 초·중·고등학교 시절부터 결과에 중시하는 시스템에 갇혀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어린 선수들은 반드시 배워야할 기본기를 놓치게 된다. 또한 눈앞에 있는 승리를 위해 몸을 혹사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한국여자배구는 체격조건은 물론 재능이 뛰어난 인재가 종종 나타났다. 하지만 부상으로 인해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조기 은퇴한 경우가 있었다.
박 이사는 일본의 효율적인 훈련 방식도 인상적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박 이사는 "우리는 배구가 열리는 체육관이나 훈련장에 가면 코트가 하나 밖에 없다. 하지만 일본은 기본적으로 두 개의 코트를 갖추고 있다. 한쪽 코트에서는 서브리시브 훈련을 하고 다른 코트에서는 공격과 콤비플레이를 맞춰본다. 양쪽 코트의 지도는 그 분야에 전문적인 코치가 담당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박 이사는 "동일한 시간 동안 훈련을 한다고 가정할 때 한 코트에서 연습을 하는 것보다 두 개의 코트에서 다양한 훈련을 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으로 보였다"고 덧붙었다.
일본은 배구 강국들과 비교해 평균 신장이 10cm 이상이나 작다. 높이가 중요한 배구를 생각할 때 이 부분은 치명적인 단점이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체계적으로 몸을 만들어왔기 때문에 부상이 적고 순발력이 빠르다. 여기에 기본기와 수비 훈련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현 일본국가대표팀이 높이의 열세를 극복하고 배구 강국들과 대등한 경기를 치를 수 있는 원인은 여기에 있었다.
주전 선수가 되기 위한 '무한 경쟁'도 일본 배구의 저력
일본여자배구대표팀의 주장인 아라키 에리카(28)는 "일본에서는 매스컴은 물론 국민들이 여자배구에 큰 관심을 보여주신다. 우리가 하는 플레이가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책임감도 크다. 높은 관심만큼 더욱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알려진 대로 일본에서 여자배구의 인기는 매우 뜨겁다. 대표팀이 경기를 할 때 최고가 10만 원이 넘는 입장권도 모두 매진된다.
배구 열기가 뜨겁다보니 선수들이 대표팀에 가지는 애정도 남다르다. 기무라 사오리(27)와 함께 일본의 주공격수로 활약하고 있는 에바타 유키코(22)는 "일본에서는 대표팀 주전 선수가 되는 것이 매우 어렵다. 그만큼 경쟁도 치열해지고 기회가 주어졌을 때는 자신을 확실하게 어필해야 된다"고 밝혔다.
박 이사는 "일본의 지역 언론은 자신들의 연고지 소속 선수가 대표팀에 발탁되면 크게 홍보해준다. 이렇게 힘을 실어주다 보니 대표팀에서 뛰는 자긍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에바타와 함께 레프트 자리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사코다 사오리(25)는 "올림픽예선전에서는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앞으로 내 플레이를 확실하게 어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그랑프리 대회에서 최선을 다해 올림픽 무대에서는 주전으로 뛰는 것이 목표"라며 포부를 드러냈다.
한국여자배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분명 일본의 시스템에 본받을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일본여자배구는 뛰어난 만큼 분명히 거품도 존재한다. 일본 여자대표팀은 신장의 열세라는 약점을 항상 지니고 있다. 또한 전력의 핵심인 주전 세터 다케시타 요시에(34)와 리베로 사노 유코(33)의 뒤를 이을 인재가 부족하다는 점도 고민거리다.
박미희 KBSN 배구 해설위원은 "일본 팀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주전 세터인 다케시타의 신장(159cm)은 늘 고민하는 부분이다. 다케시타의 테크닉이 뛰어나기 때문에 단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있지만 높이의 열세는 항상 존재한다. 또한 백업세터의 신장도 작다는 점이 문제점"이라고 지적했다.
일본의 에이스인 기무라 사오리는 상대 팀에게 위협적인 존재도 되지만 동시에 '구멍'이 되기도 한다. 리시브가 약하기 때문에 일본을 상대하는 대부분의 팀들은 서브로 기무라를 공략한다.
양국의 배구 환경을 생각할 때 한국이 일본과 같은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러나 장기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선수를 육성하는 점은 배워야할 부분이다. 또한 경쟁력 있는 대표팀을 구축하는 시스템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사진 = 기무라 사오리, 이노우에 카오리, 에바타 유키코, 한일전 (C) 엑스포츠뉴스 권혁재 기자]
조영준 기자 spacewalker@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