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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홈런 ‘장종훈 신드롬’

기사입력 2006.03.07 02:19 / 기사수정 2006.03.07 02:19

윤욱재 기자

[프로야구 25년 특별기획 - 나의 몬스터시즌 10] 1992년 장종훈


‘장종훈 신드롬’ 연일 강타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더니 프로야구가 10년이 되자 홈런역사도 바뀌기 시작했다. 30홈런도 꿈이었던 그 시절, 혜성처럼 등장한 장종훈은 역대 최다인 35홈런(1991시즌)을 터뜨리며 전국을 강타했다.


빙그레에서 연습보조원으로 출발해 연습생으로 유니폼을 입게 된 장종훈은 데뷔 첫 타석에서 2루타를 때린 것을 시작으로 신화의 포문을 열었고 손이 마르고 닳도록 스윙연습을 한 끝에 최고의 홈런타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원래 장종훈은 유격수였다. 수비 부담이 많은 가운데에서도 눈에 띄는 장타력으로 팬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한국프로야구에서 처음 보는 초대형 유격수였다. 그러나 ‘유격수 장종훈’은 오래가지 못했다. 부상 때문에 유격수란 포지션을 포기하고 대신 1루수와 지명타자로, 즉 공격력을 한층 강화하는 방면을 택했다.


지명타자로 출전한 91시즌에 35홈런을 때린 장종훈은 얼떨결에 92시즌 목표를 홈런 40개로 잡아버렸고 이 말 한마디 때문에 기록과의 전쟁에서 하루도 쉴 틈이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장종훈이 아니었다. 엘리트 코스를 밟은 스타 출신은 아니었지만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특유의 잡초근성과 오직 살 길은 연습과 노력뿐이라는 그의 신조라면 충분히 해볼 만했다.


시범경기 첫 타석에서 시원한 아치를 그려내며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새로운 신화의 출발을 알린 장종훈. 당시 국내 최고의 ‘이슈메이커’ 장종훈의 홈런사냥은 그렇게 시작됐다. 


마지막 타석서 41호 피날레


홈런타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힘이다. 그러나 그 힘을 정확히 쓸 줄 모른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정확한 타이밍은 물론 공을 맞출 때(흔히 야구에선 임팩트 순간이라고 한다.) 힘을 적절하게 써야 담장 밖으로 나가는 타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장종훈은 피나는 연습 끝에 힘과 기술의 적절한 조화를 만들어냈고 이것은 전설의 기틀이 되었다. 또 밀어치는 능력 역시 뛰어나 완벽하게 자기 스윙을 가져가는 ‘타석의 제왕’이었다.


점점 쌓여가는 홈런 개수만큼 장종훈에 대한 세간의 관심도 뜨거워졌다. 물론 단순히 홈런에 대한 관심도 컸지만 밑바닥에서 시작해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가 만들어온 노력의 과정 또한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웬만한 그라운드의 수퍼스타들은 모두 대졸 출신이었고 학력이 곧 능력이라는 시대적 상황이 맞물린 당시에 고졸이자 연습생 출신인 장종훈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하나의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신드롬의 주인공이 된 장종훈은 많은 이들에게 교훈을 주었고 팬들의 성원과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국민타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결국 40번째 홈런을 터뜨린 장종훈은 정규시즌 마지막 타석에서 41호 홈런을 작렬하며 피날레를 장식했다. 이해 홈런-타점 부문 신기록을 작성하고 장타율 타이틀까지 거머쥐며 2년연속 정규시즌 MVP를 수상함은 물론 3년연속 홈런왕과 3년연속 골든글러브(놀랍게도 모두 다른 포지션으로)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렸다.


멀어져버린 KS 우승의 꿈


빙그레는 여전한 우승후보였다. 특히 페넌트레이스에선 발군이었다. 정규시즌 운영에 있어 탁월한 능력을 가진 김영덕 감독이 버티고 있었고 이정훈, 이강돈, 이상군 등 노장군단과 장종훈, 송진우, 장정순, 정민철 등 신진세력들이 합쳐 막강한 전력을 이뤄냈다.


정규시즌 81승으로 역대 최다승 기록을 수립한 빙그레는 한국시리즈에 자동 진출, 기다리는 입장이 되었지만 마음이 썩 편하지는 않았다. 진검승부에서 항상 우위를 점했던 해태 역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고 유력한 한국시리즈 우승 후보였기 때문. 빙그레는 그동안 올라갔던 세 번의 한국시리즈에서 모두 해태를 만나 우승 트로피를 넘겨야했던 아픔이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플레이오프에서 ‘수퍼루키’ 염종석을 앞세운 롯데가 해태를 꺾는 파란을 연출한 것이다. 빙그레는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롯데의 패기가 만만치 않은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해태보단 훨씬 편한 상대임은 부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다. 다름 아닌 롯데 강병철 감독. 강 감독은 빙그레 수석코치 시절 김영덕 감독이 자신에게 감독직을 물려주기로 한 약속이 뒤틀리면서 다시 한번 롯데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동고동락했던 세월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듯 빙그레 선수들의 세세한 면까지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던 강 감독이었다. 결국 빙그레는 1승 4패로 무릎을 꿇었고 4번의 한국시리즈에서 모두 패하는 진기록을 낳았다. 송진우를 무리하게 기용한 것이 뼈아팠다.


장종훈은 속상했다. 페넌트레이스에선 최고의 스타로 늘 주목을 받던 그였지만 포스트시즌에선 눈에 띄지 못하는 활약으로 또 한번 주저앉는 팀을 보면서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이후 장종훈은 부상과 씨름하면서도 꾸준한 커리어를 쌓아갔고(아쉽게도 92시즌과 같은 위력은 다시 볼 수 없었다.) 결국 7년이 지난 99 한국시리즈에서 자신의 결승 희생타로 우승 트로피를 끌어안으며 ‘4전 5기’의 주인공이 되었다. 


장종훈 (1992) → 41홈런 119타점 타율 0.299



윤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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