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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전, 한국 프로스포츠에는 어떤 일이?

기사입력 2007.02.10 12:29 / 기사수정 2007.02.10 12:29

이준목 기자
[엑스포츠뉴스 = 이준목 기자]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년전인 1997년은 한국 사회에 있어서 격변기였다. 외환위기로 인한 IMF 구제금융 사태가 본격화되며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나라 전체가 어려움에 빠져들던 시대였다.

그러나 암울했던 시기, 현실에 대한 불안과 무기력증에 시달리던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빛을 안겨준 것은 바로 스포츠였다. 프랑스 월드컵 지역예선, 메이저리그의 국내중계 본격화, 프로농구 출범 등 굵직한 이슈들로 이어지는 97년은 한국 스포츠 역사에서 하나의 이정표로 남을만한 시대였다. 차범근, 최용수, 박찬호, 선동렬 등 한 시대의 풍미한 스포츠 영웅들의 눈부신 활약은 패배주의와 우울증에 젖어있던 한국사회에 ‘할수 있다.’는 새로운 희망을 안겨준 상징과도 같았다.

<차범근 대통령, 박찬호 국무총리?>

1997년, 한국 스포츠계를 뒤흔들었던 최고의 스타를 꼽으면 당연히 차범근과 박찬호를 제일 먼저 이야기하지 않을수 없다.

한국축구 역대 최고의 스타로 꼽히는 차범근은, 96년 아시안컵 8강에 이란에 2-6으로 참패하며 불명예 중도 퇴진한 박종환 감독의 뒤를 이어 98프랑스 월드컵 사령탑에 올랐다. 아시안컵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월드컵 지역예선에 도전한 한국축구의 상황은 당시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세대교체의 실패로 인한 주전들의 노쇠화와 계속된 국제대회 부진으로 팀 사기는 바닥이었고, 간판 스트라이커 황선홍은 당시 부상으로 최종예선에서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당시 일각에서는 역대 최약체 대표팀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96년 애틀란타올림픽 멤버 중심으로 세대교체에 성공한 차범근호는 홈&어웨이 방식으로 치러진 최종예선에서 예상을 딛고 승승장구했다. 최종예선에서 일본,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UAE와 한 조에 배속된 한국은, 홈 2연전에서 카자흐스탄(3-0)과 우즈베키스탄(2-1)을 연파한데 이어, 도쿄 원정에서 숙적 일본과 격돌했다.

후반 일본의 야마구치에게 선취골을 내주며 종료 7분전까지 0-1로 끌려다니던 한국은 패색이 짙었으나 후반 38분 이기형의 오른쪽 크로스와 최용수의 헤딩 패스에 이은 서정원의 헤딩골로 동점에 성공했다. 이어 41분에는 다시 최용수가 내준 공을 오버래핑으로 공격에 가담한 수비수 이민성이 페널티에이리어 좌측에서 장쾌한 30m 중거리슛을 작렬시키며 극적인 역전승을 따내는데 성공했다. 5만 ‘울트파 닛폰’을 침묵에 빠뜨린 이날의 극적인 승리는 이후 ‘도쿄대첩’으로 인구에 회자되며 역대 축구 한일전 사상 최고의 명승부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이후 한국은 기세를 몰아 최종예선 6승1무1패의 성적을 기록하며 조1위에 주어지는 월드컵 본선직행 티켓을 따내는데 성공했다. 최종예선에서 7골 2도움을 기록한 최용수는 득점왕과 최다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며 황선홍의 뒤를 잇는 차세대 스트라이커로 입지를 굳혔다. 본선진출이 확정된 이후 홈에서 벌어진 일본과의 리턴 매치에서 0-2로 완패한 것이 옥의 티였지만, 위기의 한국축구를 구원해내며 프랑스행 티켓을 따낸 차범근 감독은 지도자로서 제 2의 성공신화를 개척하며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국내에 차범근이 있었다면, 해외에는 ‘코리안 메이저리거 1호’ 박찬호가 있었다. 풀타임 메이저리거 2년차를 맞이한 박찬호는 중간계투요원을 거쳐 97년부터 LA 다저스 선발진의 한축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성적은 32경기 등판 14승8패. 방어율 3.38(완투 2회)으로 일본인 투수 노모 히데오(14승11패)와 함께 그해 다저스 팀내 최다승을 기록했다.

당시 iTV를 통하여 생중계되던 박찬호 선발등판 경기는, 한국에서는 일부 마니아계층 중심으로만 소비되던 메이저리그 경기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고, 새벽마다 박찬호 등판 경기의 보기위해 아침잠을 설치는 ‘야구폐인’들을 양산했다.

한국투수로서는 보기드문 150km대의 강속구를 뿜어대며 거구의 타자들을 잇달아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닥터 K´의 모습에 미국도 환호했다. 미국진출 당시만해도 한국에서조차 이렇다할 네임밸류가 없고 임선동, 조성민 등 동기들에 비해서 저평가받던 25세의 영건이 세계 최고의 무대라는 메이저리그에서 당당히 마운드를 호령하는 모습은 수많은 한국인들에게 자긍심을 안겨주었다. 이 당시 유행했던 ‘차범근 대통령, 박찬호 국무총리’ 구호는 스포츠 영웅들의 활약에서 구원을 찾았던 대중들의 희망을 상징한다.

<나고야의 태양에서 프로농구 출범까지. 한국스포츠 격변의 시대>

한국에 차범근, 미국에 박찬호가 있었다면, 일본에는 ‘국보급 투수’ 선동렬이 있었다. 일본 진출 첫해였던 96년, 한국 최고의 투수라는 명성이 무색하게 생애처음 2군으로 내려가는 수모를 당하며 절치부심했던 선동렬은, 이 해부터 서서히 ‘무등산 폭격기’의 진가를 입증하기 시작했다.

주니치 드래건즈의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던 선동렬은 43게임에 등판하여 63과 1/3이닝을 소화하며 1승1패 38세이브, 방어율 1.28(총 9자책점)을 기록했고, 특히 한 시즌동안 피홈런을 단 한 개도 허용하지 않는 엄청난 기록을 남겼다. 비록 일본 최고투수로 꼽히던 ‘대마신’ 사사키 가즈히로에 아쉽게 밀려 세이브 타이틀은 놓쳤지만, 이후 선동렬은 99년까지 주니치의 수호신으로 활약하며 통산 10승 4패 98세이브 방어율 2.70이라는 맹활약으로 ‘나고야의 태양’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선동렬이 떠난 97년 한국프로야구에서는 코끼리 김응룡 감독이 이끄는 해태 타이거즈가 한국시리즈에서 LG를 4승1패로 물리치고 통산 9번째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이 때가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팀이자 한국시리즈 최다 우승기록에 빛나는 ‘해태 왕조’ 최후의 우승 기록이기도 하다.

‘아시아의 홈런왕’ 이승엽(삼성)은 고졸 3년차였던 이해 32홈런을 기록, 생애 첫 홈런왕과 정규시즌 MVP 타이틀을 동시에 석권하는 기염을 토하며 이후 한국야구사를 빛낼 ‘이승엽 시대’의 본격적인 개막을 예고했다. ‘바람의 아들’이종범은 포스트 선동렬 시대의 해태를 이끈 간판스타로 생애 세 번째 우승컵과 두 번째 한국시리즈 MVP 타이틀을 거머쥐며 시즌 직후 선동렬의 뒤를 이어 주니치에 입단,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하게 된다.

국내 프로축구에서는 이차만 감독이 이끌던 부산 대우가 K리그 역사상 최고로 단일 시즌 전관왕이라는 초유의 대업을 달성했다. 아시아 최고의 공격수에서 수비수로 전향한 ‘삼손’ 김주성이 MVP를 차지했고, 샤샤, 마니치 등 외국인 선수들의 확률높은 골결정력을 앞세워 97년 아디다스컵, 정규시즌 라피도컵, 프로스펙스 컵 등을 싹쓸이하며 한국프로축구의 역사를 다시쓰는데 성공했다.

배구에서는 신생팀 삼성화재가 현대자동차를 제압하고 사상 첫 정상에 오르며 이후 9년간 계속될 ‘삼성왕조’ 시대의 첫 서막을 열었다. 명장 신치용 감독의 지휘아래 신진식-김세진- 김상우 등 초호화멤버를 앞세운 삼성은 이후 현대, 고려증권 드오가의 라이벌 시대를 청산하고 프로배구가 출범하기까지 절대강자로 군림하며 전성기를 구가했으나 자금력을 앞세운 지나친 선수 싹쓸이로 도마에 오르며, 배구인기 하락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97년 2월 1일에는 대학들이 인기를 주도하던 ‘농구대잔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본격적인 프로농구의 시대가 첫 닻을 올렸다. 프로농구 출범전 대학과 프로팀이 함께 한 ‘마지막 농구대잔치’에서는 서장훈이 이끄는 연세대가 사상 첫 농구대잔치 전승 우승이라는 기록을 수립하며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했다.

시범리그 형식으로 21경기로만 치러진 프로농구 원년 시즌에서는 당대 실업최강을 자랑하던 부산 기아가 원년 우승의 영광을 안으며 성공적인 첫 테이프를 끊었다. 기아가 원년 정규시즌 기록한 16승5패(76.2%)의 성적은 아직도 프로농구 역대 최고승률 기록으로 남아있다.클리프 리드, 제이슨 윌리포드, 제럴드 워커 등 수준높은 외인선수들이 한국무대에 첫 선을 보이며 ‘우물안 개구리’에 만족하던 국내 농구에 커다란 문화적 충격을 안기기도 했다.

97년 여름, 정광석 감독이 이끌던 농구 국가대표팀은 사우디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 허재의 공백과 서장훈, 현주엽의 잇단 부상에도 불구하고 전희철의 활약을 앞세워 숙적 중국과 일본을 연파. 20년만의 우승컵을 손에 쥐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다사다난한 기록으로 채워진 97년은 한국 프로스포츠 전반에 하나의 전환점이 되는 시기였다. 그 시절 우리를 웃기고 울렸던 스포츠 영웅들은 지금 이제 세월의 흐름에 밀려 하나씩 과거형이 되어가고 있지만, 그들이 순수한 열정이 보여준 투혼은 대중들에게 결코 불가능은 없다는 희망을 안겨준 소중한 추억으로 남았다.


이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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