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09-2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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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바 토크 ⑭] 통곡으로 바뀐 1950 브라질 월드컵

기사입력 2010.02.10 19:06 / 기사수정 2010.02.10 19:06

박문수 기자

- 브라질 축구의 출발과 1950년 제4회 브라질 월드컵의 뒷얘기를 알아보자

[엑스포츠뉴스=박문수 기자] 축구는 영국이 만들었지만, 브라질이 완성했다는 말이 있다.

브라질은 1930년 우루과이 월드컵 이래로,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세계인의 축제에 참석했으며 5번이나 주인공이 되는 영광을 얻었다. 누구든 깰 수 없는 대기록도 수립했으며 이를 통해 세계 어느 국가보다 월드컵 역사에서 화려한 족적을 남겼다.

이 때문에 현재까지 넓은 선수 인프라를 바탕으로 세계 축구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브라질은 축구의 상징이자 그 자체로 인식되었고 월드컵 단골손님이자 영원한 '축구 왕국'으로 불리고 있다.

그들은 2010 FIFA 남아공 월드컵 남미지역예선에서도 1위를 차지하며 19번의 월드컵에 모두 개근했으며, 2014년 월드컵이 자국 브라질에서 열린다는 것을 고려할 때 20회의 월드컵에 모두 출전하는 세계 최고의 기록을 보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늘 찬란한 영광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강력한 전력을 바탕으로 대회 직전까지 우승후보 0순위로 불린 적도 많았지만, 기대 이하의 성적으로 쓸쓸하게 귀국행에 몸을 실은 적도 비일비재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선수가 그라운드에서 쓰러진 적도 있으며, 온 국민이 충격의 도가니에 빠져 몇몇 사람은 자살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었다.

그렇다면, 이번 삼바 토크 14편부터는 브라질 축구의 역사를 통해 그들이 강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아보자.

그 중에서도 월드컵이 4개월 앞으로 다가온 만큼 브라질 대표팀에 큰 영향을 끼친 전 대회를 중심으로 분석해 보겠다. 단, 기자의 정보력과 자료도 한계가 있었다는 점은 양해를 바란다.

브라질 축구의 출발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브라질 아이들도 모래 구장에서 축구를 즐긴다. 동네 어느 곳이든 공간이 있으면 친구들과 어울려 팀을 짠 뒤 경기에 임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팀에 대한 애정도 갖고 있다.

5살 어린 아이부터 백발의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종교 이상의 것으로 브라질에 자리 잡은 축구는 하나의 문화로써 브라질에 깊숙하게 자리 잡았다.

1894년부터 축구를 접한 브라질은 영국 출신의 아버지와 브라질 출신의 어머니를 둔 찰스 밀러를 통해 이를 보급받았다. 지주 출신인 그는 자신의 재력을 이용해 축구장을 건립했으며 영국에서 가져온 축구공과 유니폼으로 축구 클럽을 만들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을 바탕으로 브라질 국민은 축구에 빠졌으며 협회 창설 등, 내로라하는 축구 강국이 그랬듯이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1914년은 브라질에 의미가 있는 해이다. 7월에는 잉글랜드팀이 브라질을 방문해서 친선 경기를 맺으면서 브라질 최초의 선발팀이 모습을 보여줬으며 같은 해 8월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아르헨티나와의 원정 경기를 시작으로 국제 축구에 발을 내밀게 된다.

이후, 브라질 대표팀은 1919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축구 강호로서의 면모를 드러내지만,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등쌀에 밀리며 남미의 3인자로 전락하게 된다. 이 때문에 그들은 1,2회 월드컵에서 1라운드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으며 축구와는 인연이 없는 듯 보였다.

이 시대의 브라질은 프로와 아마추어가 대립하는 구도였다. 현재는 각 지역의 주 리그를 비롯해, 코파 두 브라질과 전국 리그를 시행하며 1년 내내 팬들에게 축구라는 즐거움을 선물하지만, 당시 분위기는 달랐다. 우여곡절 끝에 아마추어와 프로가 합의를 맺으면서 오늘날의 윤곽을 드러냈으며 이후, 브라질은 강 팀으로 다시금 부상하게 된다.

이러한 그들의 노력을 축구의 신도 알았을까? 193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브라질은 레오디나스라는 당대 최고의 선수와 함께 축구 강호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된다.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한 브라질은 그의 맹활약 때문에 4강 진출에 성공. '브라질리언' 그들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된다.

비록 레오디나스가 결승전 출전을 위해 이탈리아와의 4강전에 결장했다는 소문과 당시 이탈리아 권력자였던 무솔리니가 조국의 우승을 위해 브라질 대표팀의 경기장을 임의로 옮겼다는 불미스러운 얘기도 전해졌지만, 이 대회에서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진정한 챔피언에 가까웠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의 후유증 때문에 유럽 국가들이 월드컵 개최를 꺼리는 상황에서 브라질은 아르헨티나와 함께 월드컵 개최를 선언했다. 전쟁의 피해를 덜 받은 남미국가의 입지를 살린 브라질은 1946년 7월 26일 룩셈부르크 시에서 열린 FIFA 총회에서 제4회 대회에서 월드컵 개최를 확정. 브라질 축구의 진정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통곡으로 바뀐 1950년 제4회 브라질 월드컵

앞서 말했듯이 3차 대회 직후, 전 세계는 전쟁의 소용돌이 빠지며 혼란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의 피해는 유럽과 아시아 곳곳에 스며들었으며 상대적으로 전쟁의 상처를 덜 받은 남미 대륙이 월드컵 기회를 얻게 됐으며, 브라질이 제4회 월드컵 개최국으로서 선정되는 행운을 얻게 됐다. (지난 시즌 우승을 차지했던 플라멩고의 홈 구장으로 유명한 리오 데 자네 이루 주의 마라까나 스타디움도 이 대회를 위해 건립됐다.)

대회 초반부터 브라질은 승승장구했다. 예선 라운드에 나선 그들은 스위스와 2-2로 비겼지만, 멕시코와 구 유고 슬라비아를 각각 4-0과 2-0으로 대파하며 결선 라운드에 진출했으며, 예선에서부터 막강한 득점력으로 브라질의 선전을 이끈 아데미르는 레오디나스가 지난 대회에서 보여줬던 파괴력을 또 다시 선사. 브라질의 우승 가능성을 점점 커지게 했다.

결선 라운드에 진출한 브라질은 첫 경기인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7-1로 대승을 거둔다. 전반 17분 아데미르의 선제 득점으로 이 날 축포를 올린 브라질은 안데르센이 후반 22분 만회 득점을 넣은 스웨덴을 상대로 골 폭풍을 쏘아 올리며 우승을 위해 한발 다가선다. 반면, 우루과이는 스페인과 무승부를 기록했으며 접전 끝에 스웨덴에 승리했기 때문에 결선 라운드 마지막을 앞둔 시점에서 그들은 브라질의 적수가 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운명의 7월 16일, 브라질은 우루과이와의 결선 라운드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승리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앞선 두 경기에서 상대를 크게 격파하며, 승승장구하고 있었으며 팀 분위기도 좋았다. 결승전이 열린 마라까나 스타디움은 브라질 대표팀의 첫 세계 제패를 지켜보기 위해 역대 기네스북에도 오른 관중 199,854명이 지켜보고 있었으며(비공식적인 관중까지 합하면 25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브라질은 무승부만 기록해도 월드 챔피언이 되는 최고의 기회를 얻게 된 상황이었다.

경기가 시작된 순간, 모든 이의 예상처럼 브라질은 우루과이를 상대로 파상공세를 펼쳤다. 쉴 새 없이 그들의 수비진을 공략했으며 홈 팬들에게 우승이라는 선물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우루과이의 철옹성 같은 수비는 좀처럼 쉽게 실점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후반 3분, 경기장을 가득 메운 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바로, 브라질의 프리아카의 발에서 선제 득점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선제 득점과 관중의 열광은 브라질 선수들에게 혼란을 야기했다. 당시 대표팀 감독이었던 플라비우 코스타는 흥분한 선수들을 향해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서 자신의 역할을 담당하라고 지시했지만, 대회 첫 우승만 바라보던 선수는 경기에 제대로 임하지 않았다. 수비 라인은 점점 허술해지며 모든 선수가 공만 잡으면 골을 넣기 위해 지나치게 의욕적인 모습만 보였다.

결국, 후반 21분 우루과이의 전설인 스키아피노가 동점골에 성공했다. 그럼에도, 브라질은 부담이 없었다. 지지만 않으면 우승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관중은 경기 시각이 흐를수록 하나의 허리케인처럼 거대한 함성을 질렀다.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라디오 앞에서 열광했으니 경기장에 온 관중의 분위기는 더욱 고조됐을 것이다.

후반 34분 축제의 분위기는 어느덧 어둠으로 변했다. 바로 선제 득점에 성공한 스키아피노의 패스를 받은 기지아가 역전 골을 넣은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결선 라운드 마지막 경기에 임했던 우루과이가 난적 브라질을 제압한 것이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고, 마라까나 스타디움은 고요함과 적막함이 공존했다. 열광적으로 브라질을 응원했던 관중은 힘을 잃은 채 쓸쓸히 경기장을 빠져나갔으며 예정됐던 모든 행사가 취소됐다.

이렇게 브라질의 첫 월드컵 결승 무대는 실패로 끝났다. 반면 우루과이는 4번의 대회에서 2번이나 우승을 차지. 세계 최고의 축구 강국으로 한 발 나아갔다. 한편, 1950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패한 브라질은 기존의 흰색 유니폼을 대신해 현재까지 그들의 상징이 된 초록색 선과 노란색의 티셔츠, 파란색의 반바지를 유니폼으로 채택했다.

[예고] ▶ 삼바 토크 15회는 '축구 황제’ 펠레와 가린샤가 이어집니다.

브라질 대표팀 명단(3월 2일 아일랜드 평가전)

골키퍼: 줄리우 세자르(인테르 밀란), 도니(AS 로마)

수비수: 마이콘, 루시우(이상 인테르 밀란), 다니엘 알베스(바르셀로나), 지우베르투(크루제이로), 미셸 바스토스(올림피크 리옹), 주안(AS 로마), 루이장(벤피카), 티아고 시우바(AC 밀란)

미드필더: 카카(레알 마드리드), 엘라노(갈라타사라이), 지우베르투 시우바(파나시나이코스), 조슈에(볼프스부르크), 필리페 멜로(유벤투스), 줄리우 밥티스타(AS 로마), 끌레베르손(플라멩구), 하미레스(벤피카)

포워드: 호비뉴(산투스), 아드리아누(플라멩구), 니우마르(비야레알), 루이스 파비아누(세비야)

기대를 모은 호나우지뉴가 빠졌으며 17년 만에 플라멩구의 우승을 이끈 아드리아누가 오랜만에 대표팀에 돌아왔다. 또한, 좌측 풀백은 2007년 후반기부터 대표팀과 인연이 없었던 크루제이로의 지우베르투가 차출됐다. 기존의 멤버와는 변동이 거의 없으며 지난 잉글랜드, 오만전에 나왔던 FC 포르투의 헐크는 이번 명단에서 제외됐다.

[관련 기사] ▶ [삼바 토크⑬] 네이마르와 호비뉴, 두 천재의 만남

[사진=1950년 브라질 월드컵 포스터] 



박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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