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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박스] K-리거들이여, 거룩한 부담감을 가져라

기사입력 2009.05.11 01:31 / 기사수정 2009.05.11 01:31

전성호 기자

[엑스포츠뉴스=전성호 기자] K-리그의 '이상기류'는 5월에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K-리그의 약자였던 전북 현대, 광주 상무, 인천 유나이티드, 전남 드래곤즈가 상위권에 포진한 반면, 전통적 강자에 속하는 수원 삼성, FC서울, 울산 현대, 포항 스틸러스, 성남 일화는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예년 같으면 5월 이 맘 때쯤 상위권에 집중 포진하고 있어야 할 팀들이지만 이들 중 3위안에 드는 팀은 단 한 팀도 없다.
 
지난 시즌 정규리그에서 두 번밖에 지지 않았던 서울은 벌써 세 번의 패배를 당했다. 성남, 포항, 울산은 나란히 6위부터 8위를 달리고 있는데, 리그 상위권이 익숙한 이들은 이겨야 될 경기를 비기고, 비겨야 될 경기를 지면서 실망스런 시즌 초반을 보내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디펜딩 챔피언 수원. 1승 3무 5패라는, 무언가 숫자가 뒤집힌 듯한 최악의 성적을 거두며 최하위로 떨어져 있다. 

K-리그의 전통적 강자였던 이들의 부진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는 걸까. 전문가들은 리그의 평준화나 AFC 챔피언스리그의 영향을 지적하기도 한다. 일부는 이러한 치열한 순위경쟁으로 인해 K-리그가 좀 더 역동적이고 즐거운 리그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많은 팬층을 확보하고 있는 명문팀의 부진은 커다란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들이 최전선에서 K-리그 전체의 흥행을 진두지휘해주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최근 프로야구 인기의 가장 긍정적인 요소는 롯데 자이언츠의 흥행 돌풍이었다. 그간 성적이 좋지 않아 침체돼있던 부산의 야구에 대한 열정은 롯데가 좋은 성적을 거두며 그대로 현실화됐다. 그러면서 사직 구장의 뜨거운 열기와 다채로운 응원 열전은 언론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고, 사람들은 야구장에 가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라는 걸 새삼 다시 알게 됐다. 이러한 효과는 곧바로 프로야구 전반으로 흘러 들어가 리그 전체에 긍정적인 효과를 창출했다.

그러나 K-리그 경기장에 찾아가는 일은 과연 즐거운 일이란 인식이 있는가? K-리그가 TV 중계될 때마다 민망할 정도로 텅 빈 경기장의 모습은 조롱의 대상이다. 축구장에 축구 보러 가자고 하면 "거길 왜 가?"라는 반응이 먼저 튀어나온다. 이런 인식을 뒤바꾸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편이 있겠지만 가장 효과적인 것은 K-리그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리더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가능성을 가장 크게 갖고 있는 팀은 K-리그의 전통적 강자들이다. 실제로 수원과 서울의 라이벌전은 경기 내용 면에서도, 서포터즈의 응원대결에서도 많은 흥미를 자아냈고, 이는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K-리그에 대한 편견을 가진 이들조차도 '서울-수원전은 가볼 만하다.'라는 인식을 갖게끔 했다. 실제로 지난 시즌 서울과 수원의 맞대결에는 항상 3~4만 명이 넘는 관중이 들었고 역대 챔피언 결정전 최다관중이란 결과로도 이어졌다.

서울과 수원의 경기에 관중이 많은 이유는 경기력도 훌륭하지만 열정적인 대규모 서포터즈에 의해 주도되는 흥겨운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결코 질 수 없다는 선수들의 열정적인 플레이에 서포터즈는 감동받고 더 열심히 응원을 펼친다.

수원, 서울, 포항, 울산, 성남의 전력이 광주, 전북, 제주, 인천, 부산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전문가나 축구팬은 아마 없을 것이다. 오히려 앞선 전력을 갖추고 있다는 게 맞다. 그럼에도, K-리그 9라운드에서 단 한 팀도 이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열정과 투쟁심, 그리고 승리에 대한 ‘부담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열정의 부족을 야기하는 제도적 문제

세르비아 출신으로 레드스타, 글래스고 레인저스, 레알 소시에다드 등의 빅클럽에서 활약했던 인천 유나이티드의 외국인선수 드라간은 한 인터뷰에서 'K-리그에는 긴장감이 덜해서 좋다'라는 솔직한 심정을 밝혔었다.

그가 뛰었던 레드스타나 레인저스는 우승을 한 뒤에도 매 경기를 위기기 위해 열심히 싸워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K-리그에선 경기에서 이기지 못하더라도 큰 문제될 것이 없다는 분위기였고, 그러한 상황에 익숙해져 있는 K-리거들에 대해 드라간은 처음에 많은 어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이런 열정의 부족은 플레이오프 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 K-리그는 유럽 프로리그와는 달리 우승컵을 차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정규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필요가 없다. 상위 6개 팀에 들기만 하면 단기전에서의 역전의 기회가 얼마든지 열려있다. 이는 이미 2007년에 포항에 의해 증명된 바 있다.

K-리그 선수들에게 긴장감이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하부리그로의 강등위험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전력이 떨어지는 팀은 정규리그를 제쳐놓고 대신 단기전인 FA컵이나 리그컵 중 어느 하나에 집중하면 된다. 포기한 대회의 경기에 대한 압박감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고맙지만 익숙해져버린 서포터즈의 사랑

우리는 부모님이나 연인처럼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주고 감싸주는 소중한 사랑의 가치를 종종 잊어버리곤 한다. 처음엔 고맙고 소중한 걸 느끼지만 익숙해질수록 당연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K-리거들이 패배에 큰 걱정을 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도 K-리그 서포터즈 특유의 '어떤 경우에도 박수를 쳐주는 '아가페적' 사랑 때문이다. 최근 서울월드컵경기장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가장 승리에 목마른 이들은 선수들이 아닌 '수호신'과 '그랑블루'처럼 보인다.

물론 선수들도 승리를 위해 뛰겠지만 패한다고 해도 운이 없었다고 여기거나 심판 때문에 졌다고 생각하면 그뿐인 것 같다. 그만큼 투쟁심과 열정이 부족해 보인다는 것이다. 가끔은 무력하게 패배한 뒤 자신들의 서포터즈 앞에서 ‘죄책감(이라면 너무 가혹한 표현인가?)’ 없이 박수를 치는 선수들의 모습에선 민망함마저 느낀다.

광주와의 K-리그 9라운드 경기에서 정말 지고 싶지 않았던 수원의 선수는 송종국 하나뿐인 것처럼 보였다. 송종국은 승리를 향한 결연한 의지에 매 순간 집중력을 가지고 뛰었다. 삭발은 그런 ‘거룩한 부담감’이란 본질의 하나의 현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선수들은 기대 이하의 정신력을 보였다.

이건 다른 팀들도 마찬가지다. 서울의 수비진은 매 경기 집중과 긴장이 상실된 어이없는 실수로 실점을 허용한다. 반대로 성남의 공격진은 골 결정력이 부족하다. 울산은 홈경기 때도 한 발 물러난 소극적인 플레이를 펼친다. 포항은 다 이긴 경기 마지막에 집중력을 흩트리며 동점골을 내주며 개막전 이후 무승(6무 1패) 기록을 이어갔다.

팬들과 서포터즈는 선수들에게 조건 없는 성원과 너그러운 관용만을 보여줄 것이 아니다. 특히 빅클럽의 팬들은 매번 승리를 거두지 못하는 자신의 팀들에 대해 압박감과 부담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건 욕심이나 잘못된 사랑이 아닌 팬으로서의 당연한 권리다. 마치 비싼 음식점에서의 맛없는 식사에 대해 주인에게 따질 수 있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들의 존재 이유는 바로 팬이기 때문이다.

빅클럽의 책임감

 


수원, 성남, 서울, 울산, 포항은 그 규모나 역사 면에서도 K-리그의 손꼽히는 빅클럽이라 부를만한 팀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과연 K-리그에서 선두주자로서의 책임감과 부담감이 있는가?

아르헨티나 출신 수비수 에인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뛰던 시절 “우리는 매일 승리해야만 하는 팀에서 뛰고 있다.”라며 볼멘소리를 했다. (그리고는 리버풀에 가려고 했고, 레알 마드리드에 갔지만)

첼시에서 뛰고 있는 니콜라스 아넬카 역시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신경 쓰지 않던 볼튼 시절과는 달리 매 경기 승리를 향한 압박감에 시달린다. 첼시에서는 이기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이겨야 한다."라며 승리에 대한 부담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실제로 유럽 빅리그의 빅클럽에서 뛰는 선수들을 보면 매 경기 승리를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그라운드에 선다. 그런 모습을 K-리거에게선 라이벌전이나 플레이오프 등 일부 경기, 혹은 대표팀 경기에서나 볼 수 있는 것 같다. 이는 ‘정말 K-리그가 유럽리그보다 실력이 떨어져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의 대답이 될 것이다.

어떤 리그든 빅클럽에 있는 선수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다. 좋은 시설과 경기장, 많은 팬과 좋은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고 큰 액수의 연봉을 안겨준다. 또한, 사회, 경제, 문화적 여건상 빅클럽은 대부분 대도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더 윤택한 삶이 가능하며, 구단의 높은 수준의 관리 시스템이 제공된다. 그러나 선수에겐 이에 버금가는 책임감이 부여된다.

물론 매 경기 승리하라는 것은 선수의 입장에서 엄청난 부담감일 수 있다. 그러나 K-리거들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축구를 잘하는 선수에게 주어지는 이름이다. 그 중에서도 제일 훌륭한 선수들이 빅클럽에서 뛴다. 그렇기에 구단은 엄청난 금액의 연봉을 주고, 팬들은 기꺼이 입장료를 지불하고 경기장을 찾는다. 승부에 결연하게 임하는 것은 프로선수의 당연한 의무이며, 더군다나 리그를 대표하는 강자의 위치에 선 이로써 일종의 ‘거룩한 부담감’을 가져야 한다.

물론 수원, 서울, 성남, 울산, 포항은 평균적으로 대부분의 경기에서 상대를 압도하는 경기를 펼친다. 그러나 올 시즌에는 공격이든 수비든 결정적인 장면에선 집중력이 떨어지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기량은 있되 열정과 정신력은 한참 미치지 못하는 모습이다.

득점엔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하지만, 실점은 아주 작은 오차의 실수만으로도 가능해진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득점은 올리지 못하고 실점은 잦아지는 현상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너무 자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나태해진 것은?

최강희 전북 감독은 시즌 무패를 달리다 부산 아이파크에 첫 패를 당했던 것에 대해 선수들이 이겨야겠다는 의지가 약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최 감독은 "유럽 축구 연수를 다니면서 지켜본 결과, 영국의 유소년들은 정말 대단했다.”라며, 17세 이하 혹은 19세 이하 선수들이지만 훈련 때 절대로 웃는 법이 없고 어떻게든 자신의 실력을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유럽의 지도자들이 한국에 와서 가장 놀라는 것은 연습하면서 웃거나 혹은 슬슬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라며 K-리거들의 정신 자세를 꼬집었다.

덧붙여 최 감독은 "프로선수들에게 일일이 '열심히 해라'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돈을 받고 자신이 기량을 파는 선수들에게 그런 것을 강조하는 것이 말이 되냐?"라며 일침을 가했다.

더군다나 더 많은 팬의 성원을 받는 빅클럽에서 뛰는 선수들이라면 이는 더욱더 강조돼야 할 부분이 아닐까.

열정이 거세되 버린 K-리거들이여, 거룩한 부담감을 가져라.

[전성호의 스카이박스] 대한민국 축구를 가장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랍니다.


 



전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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